사람과 사람간의 협동은 중요하지.
이 사회 자체가 그러한 관계로 지탱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꼭 모든 일에 협동이 필요한 걸까?
예를 들어, 개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때의 협동은, 오히려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에.......계절학기 중간고사가 어제부로 끝났으니, 첫날에 말했고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올려놓은대로........”
그러나 우리들의 앞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 교수님께선, 이런 나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다.
“조별과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
제기랄.
다른 사람이랑 함께하는 일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난 대인기피증은 아니니까.
그럼 왜 이렇게 싫어하냐고?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조는, 역시 첫날에 말한 대로........무작위입니다.”
그래, 어쩌면 이 방침은 배려일수도 있다. 무작위로 조를 지정하는 것이 말야.
세상에는 친구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꼭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어쩌다보니 이 수업에 같이 듣는 친구가 없을 수 도 있으니까.
사실 나야 상관없긴 하다. 준환이 놈이랑 같이 하건 말건, 그것은 내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학업에 힘쓸 때만이라도 조금 떨어지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지긋지긋하거든. 그렇게 되면 24시간 중에 자는 시간 빼고 계속 붙어다니게 될 텐데, 그건 싫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자.......그럼, 우선 1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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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이 막힐 것 같다.
굉장히 불편하다.
이 불편함은 나만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클 것이다.
“안녕하세요!! 16학번........”
“안녕하십니까!! 15학번........”
그래, 16학번이면 1학년인가? 벌써 계절학기를 듣는다니, 기특하기 그지없구나. 뭐, 옆에서 방금 자기소개한 놈과 커플 분위기를 풍풍 풍겨대서야 그 동기가 조금 의심스럽긴 하진 말이지.
근데, 분명히 무작위였을 텐데 용케 같은 조가 되었구나. 축하해.
하지만 이딴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 옆에 있다.
4개씩 직사각형의 형태가 되도록 붙인, 대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지같이 불편한 구조의 책상. 내 앞의 두 자리엔, 방금 꺄륵대며 자신들을 소개한 커플이 있다.
그리고 내 오른쪽엔 누가 있느냐,
흰 피부와 가느다란 팔뚝. 예쁜 손, 그리고 손목시계가 있다.
그 손의 주인은 조금 헐렁한 자주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가 그 연약한 어깨와 등을 덮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경계심 MAX의 길고양이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의 여자.
아까 그 여자다.
정수기녀.
아까, 수업에 들어오기 전 내 팔을 쳐내고 정수기 물을 마신 여자다.
제기랄. 시작부터 기분이 나빠진다. 잠깐 본 것이 전부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자기 눈에 자기밖에 안 보이는 족속은 내게 있어서 최악의 파트너인 것이다.
시X.
아무튼 자기소개를 해야겠지.
“........안녕하세요 12학번 이광진입니다.”
좋아, 모날 것 하나 없는 자기소개였다.
그렇게, 내 차례가 지나갔으니, 다음은 뻔하지. 나긋나긋하면서도,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예쁜 목소리가 내 오른쪽에서 들린다.
“........안녕하세요. 12학번 조지은입니다.
동기였어? 나랑?
잠깐만, 생각을 좀 해보자.
일단, 이 수업은 정치외교학과 전공이다.
그리고 이 강의를 듣는 전원은....... 내가 알기로는 전부 정치외교학과 학생. 타 과 학생 중 정외과 복수전공을 위해 들어온 학생은 없다.
참고로 이건 내가 쓸데없이 조사한 것이 아니라 첫 수업 출석 때 교수님이 지나가듯이 한마디 한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난 쓸데없는 건 잘 기억하니까.
아무튼, 다시 본제로 돌아가자면........
그런 상황임에도, 난 이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
내가 소극적이거나 주위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나름 1학년 때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조금 심각하게 나대...... 아니, 조금 과도하게 활발히 대학생활을 했으니까, 동기 대부분의 이름, 혹은 얼굴정도는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흑역사도 조금 생.......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어찌 되었건....... 조금 애매하다.
만약 이 여자가 갑자기 반갑게 내게 다가와서 ‘야! 오랜만이다! 나 기억나? 우리 동문이잖아!’라고 말하며 아는 척을 한다면, 결단코 모른다며 단언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여자가 기억에 있다고 하는 말은 또 아니지.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다. 12년도 당시, 우리 과 신입생은 80명이었으니까. 게다가 전과, 혹은 편입이라는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야.
물론, 이 여자가 나와 같은 나이,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것은 좀 놀랐지만 말야. 아니, 남자와 여자고 어차피 성장기 지난 성인이니까 덩치 같은 걸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군대를 다녀온 나는 조금 삭았으니까 더더욱 의미는 없겠지만.
하지만, 2주 정도 계절학기 수업을 듣는 동안 이 여자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은 신기할 정도이다.
뭐, 수업시간 동안엔 항상 김준환 자식이랑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었으니 이상한 건 아닌가?
“.......”
아무튼 조지은의 짧은 소개가 끝나자, 침묵이 감돈다.
뭐, 당연한 거겠지. 전혀 왕래가 없던 인간들을 모아서 주제하나 던져놓은 거니까.
게다가 내 경험상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나댔다간 최악의 경우, 모두의 노예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나 역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다른 셋도 같은 생각에 다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어색해서 다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
음....... 진짜 아무도 입을 안 여네?
그래도 과제는 해야겠지. 일단은 대화의 주제를 던져봐야지. 선배라는 건 이럴 때 나서야하는 거니까.
“자.......일단 우리 조 주제를 정하죠? 발표주제요.”
좋아. 차분하고, 선배다운 위엄을 살린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기만족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나아진 기분을 박살내는 자가 있었다.
“저.......여쭈어 볼게 있는데요.......”
이름이야 듣자마자 잊어버렸지만 자신을 15학번이라고 소개한 남학생이 손을 들며 말했다.
“네?”
오, 기특하기도 하지. 2학년이 제법 열정적으로 나서려는 건가?
“그.......발표는.......뭘 발표하는 거죠?”
“........”
분명히 수업 첫날에 교수님이 말해주었고, 조금 전에도 말씀 해 주셨을 텐데. 안들은 건가?
뭐지?
왠지 불안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조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는 얼빠진 놈과 달콤한 말을 나누고 있던 신입생도 ‘기회는 이때다.’라고 말하듯 눈을 빛내며 우리를 보는 걸로 봐선, 아마 그쪽도 말할 필요 없겠지.
이런 때, 정수기녀, 조지은인가 뭔가는 뭘 하고 있나 봤더니,
“.......”
그냥 부동자세로 책상을 쏘아보고 있었다.
망했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 혹은 불안감을 억누르느라 대답이 조금 늦었다. 아마 멍청한 표정도 짓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 애써 부드러운 선배목소리로 대답해주려고 했다.
“아, 발표주제는.......
그러나,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국제분쟁의 사례와 배경,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결방안입니다.”
“.......”
“아!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대답해주려는 찰나, 내 말을 자르며 들어온 목소리가 있었다.
예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지만, 동시에 얼음같이 싸늘한 목소리였다.
바로 옆이니, 그리고 내 목소리는 꽤 큰 편이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는 안하겠지. 즉, 이 여자는 처음부터 내 말을 끊어먹을 작정으로 말한 거다.
왜지? 나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 싸늘한 목소리와 싸늘한 표정은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
기분 나쁘다.
이 여자는 기분 나쁘다. 아까 정수기 때부터 그랬지만, 그 태도와 목소리 하나하나가 기분 나쁘다.
물론, 아까의 불쾌한 경험 덕분에 생긴 색안경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이다.
“........감사합니다.”
일단 나도 모르게 말해본다. 그리고 곧바로 나 스스로 한말에 대해서 분석한다.
감사하다고? 뭘? 내 입을 움직이는데 쓰이는 열량과 발성을 하는 데 쓰일 폐 속의 공기를 아끼게 해주어서? 아니면 내 지능과 말솜씨론 꽤나 어려움을 겪을 답변을 대신 해주어서? 혹은, 말수 적고 무게 있는 선배 코스프레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그럼 이 여자는 이 한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저 여자의 성격.......은 아직 잘 모르지만, 아무튼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저도 몰랐는데 쪽팔림을 겪지 않게 해 주셔서 정말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실수했다.
그렇게 또 다시 발동해버린 피해망상을 억누르며, 회의를 한다. 그렇게 발표를 위한 회의가 끝날 무렵, 어찌되었건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역할 분담은 끝났으니........ 조장을 정해야겠죠?”
왜 굳이 임시로 만들어진 발표조 안에서 장이니 뭐니 하는 것을 정해야하는 건지 의문이지만, 교수님이 분명히 말했으니 어쩔 수 없다.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고, 보고서를 제출할 역할은 필요하니까.
물론, 아는 사람이야 다 알겠지만 조장의 역할은 이것이 다가 아니지.
교수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 수업의 경우, 띵가띵가 노는 놈이 나오지 않도록, 혹은, 나온다면 그 이름을 살생부에 올리는 것 또한 조장이다.
참 비겁하고, 더러운 역할일지도 모르지만 무임승차라는 것을 줄이기 위한 교수님의 결단이니 어쩌겠는가. 누구하나는 맡아야하는 것을.
사실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지. 조장이 혓바닥으로 교수님 구두를 청소할 정도로 헌신적이면, 그 혜택이 조금이나마 떨어질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리고 저 교수님은 자기 기분에 성적을 좌우하는 양반이기도 하고.
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찌되었건 여기선 최고학번인 내가 나서볼까. 내 앞의 두 어린 것은 이미 책상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말야.
혹시라도 문제나 마찰이 생기면 그 결과가 두려우니까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것이 났다.
“.......조장은 제.......”
“제가 할게요.”
예쁘지만, 싸늘한 목소리.
“.......”
아 그랬지. 내 옆의 이 조지은인가 뭣이 은인가....... 아니 아니 이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저속한 인간인 것은 아니고 이 여자를 성희롱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시선으로 본 것도 아니고 내가 음란마귀가 들린 건 아니고 아무튼, 이 여자도 나랑 동기였지.
그런데, 또 잘랐다.
내 말을.
분위기상 내가 나서려고 한 것을 모르는 건가?
물론 조장이 하고 싶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귀찮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콩고물이 떨어질지 안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다른 사람이 맡아준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아마도 절대 나를 위해서 나선 것은 아닐테지.
나는 바보가 아니다. 눈치 없는 새X도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자타공인 눈치 빠른 놈이다.
이런 저런 흑역사를 겪으며 성장한 나다.
저 싸늘한 눈을 보면 안다.
누구도 바라보지 않으며, 누구도 믿지 못한 다는 저 싸늘한 눈을 보면 안다.
저 태도를 보면 안다.
‘니들은 못 믿겠다. 흥.’ 혹은, ‘멍청이들, 조장이 되어 추가점수를 받는 것은 나란다. 흥’ 아마 이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또 기분이 나빠진다.
망했다.
성적이야 어찌 되었건, 남은 계절학기 15일간의 내 정신건강이 망했다.
발표 직후는 기말고사이고, 우리 조는 제일 마지막 발표이니 아마도 나는 계절학기가 끝날 무렵, 기말고사 직전까지 이 여자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수업이 끝난다. 어찌되었건 발표준비는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전화번호 교환과 카X오톡 친구등록을 마친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