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 배신자야.”
“X까.”
서울의 여름이 항상 그렇듯이 불쾌하고 끔찍한 일요일. 느닷없이 나에게 배신 운운하는 놈이 오늘 따라 유독 거슬린다.
물론, 이건 당연하게도 김준환이다.
“윤앙이나 만나러 가시지?”
내 힐난에, 이 지저분한 근육돼지는 내 침대위에서 뒹굴면서 대답한다.
“아직 서울 안 올라왔다.”
“그래서 여기 있는거구만? 내가 니 세컨드냐?”
“응.”
“진짜로, X까. 아니, 꺼져 제발.”
“으으으응~~! 놀아줘 이꽝......켁.”
근육을 흔들면서 앙탈을 부리는 놈의 입을 베게를 던져 막고, 나는 백팩을 멘다.
“아, 저 속물 놈. 아니라고 그렇게 화를 내더니 결국엔........”
이 놈이 이야기하는 주제란 당연히 그 여자다.
정수기녀 조지은.
물론, 아직 새내기 시절, 술자리에서 닥치는 대로 커플로 엮던 버릇을 아직 못 버린 이 모자란 놈의 헛소리일 뿐이다.
“진짜로 아니거든.”
“신성한 과제에 사심을 넣다니. 역시 예쁜 애랑 같이 과제하니까 설레긴.......”
“닥치시고, 나갈 때 에어컨이나 잘 끄고 나가. 아니, 애초에 너희 집이 1층이니까 훨씬 쾌적할 텐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에어컨을 틀 수 있으니까?”
“나가.”
“아니, 다른 이유도 있음.”
“뭔데?”
“플레이X테이션도 있으니까.”
“꺼져. 나가. 돌아가.”
“시졍. 놀아줘어엉.”
“제발 죽어라. 제발.”
그 말을 남기고, 저 근육 뇌도 남기고 현관을 나섰다.
“.......”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햇살이 내 살갗을 지진다.
그래, 좀 타라. 내 피부야.
그리고 나는 희망 빌라가 위치해 있는 언덕길을 내려간다.
목적지는 요즘 묘하게 자주 가는 카페.
요즘 묘하게 자주 만나게 되는 정수기녀와의 약속장소다.
미리 말하자면, 이건 데이트나 그딴 것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다름 아닌 조별과제다.
왜 굳이 또 만나느냐 하면, 다른 두 명이 정말로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언하면 그 둘은 항변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누군가가 ‘선배의 꼰대짓’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름 전공 과제를 하면서도 여전히 쓸데없는 듣보잡 인터넷 신문사 기사 몇 개 스크랩해서 보내놓고 감감 무소식인 녀석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대놓고, ‘부족해. 더 해.’라고 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꼰대가 아닐까?
물론 알긴 안다. 정수기녀나 내가 조금만 더 리더십이 있었다면 이들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정수기녀는 둘 다 성격적 결함이 꽤나 두드러진 족속들이기에 그것은 힘들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불판 같은 아스팔트 길 위를 걷는다.
참고로, 바로 윗집에 사는데 왜 이렇게 굳이 따로따로 카페에서 모이느냐면.......
“우웩.”
나도, 정수기도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처음에, ‘1시, A카페’라는 약속장소와 시간을 적은 메시지를 받고, 그 외에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이 덥고 습한 날에 굳이 함께 걸으며 스트레스를 더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쌍방이 잘 아니까.
그렇게, 나는 카페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가 종이를 맞았던 그 자리, 얼마 전에 정수기에게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 그 자리를 보았다.
“.......늦었네.”
“아직 12시 40분인데. 왜 벌써왔지?”
“난 부지런하니까. 애초에 과제를 하는데 약속시간에 맞추어서 하려는 그 방식이 잘못 된거야. 미리 나와서 미리 하고 있으려는 생각은 못하는 거니?”
“집에서 할 수도 있잖아?”
“카페가 더 집중 잘되거든.”
“난 집에서 더 집중이 잘되니까 집에서 하고 왔거든.”
“그건 보면 알겠지?”
짜증난다. 얼굴을 보자마자 깔보는 말투로 거들먹대는 이 여자가, 우리가 항상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수기녀.
그나저나 이 여자는 티셔츠와 청바지만 몇 벌씩 가지고 있는 건가? 항상 같은 차림인 것 같으면서도 티셔츠와 청바지는 항상 바뀐단 말이지.
참고로, 이건 내가 그냥 눈썰미가 좋을 뿐이다. 절대로 이 여자를 유심히 며칠에 걸쳐 관찰하거나 한 적은 없다. 결단코 없다.
일단, 이 여자의 앞에 앉아,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낸다.
“........”
사실, 방금 전 이 정수기와 틱틱 댔지만 서로간의 신경전의 우위는 미묘하게 저쪽이 우위에 있다.
물론, 단순히 내가 아주 조금 늦었기 때문 만은 아니다.
“........”
“........”
왠지 저 여자가 속으로 ‘거봐, 내가 뭐랬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환청이 들린다.
정수기녀의 예언대로였다. 이 둘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사실상, ‘이 자료는 여기에서 구할 수 있으니 보고 정리해 달라.’라는 뉘앙스로, 그냥 키보드만 몇 번 두들기면 되도록 해주었으나, 답이 없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답장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나. 이렇게 미친 것들은 모 대학생활 웹툰이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족속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때론 현실이 픽션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나는 이것들을 통해서 깨닫는 중이다. 하긴, 픽션은 현실에 기반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하려나.
탁탁탁탁
전형적인 카페음악만이 흐르는 사람 적은 카페 안에서 우리 둘의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
“.......”
그러나, 오히려 침묵이 편하다.
이 여자에 한해서는 그렇다. 서로 입을 열면 말로 하는 소모전이 벌어질 것이 뻔하니까.
그렇지만 정말로 아무 말도 안할 순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연대표 정리 한 거 보냈다. 발표할 때 이 표를 올리는 건 어때?”
“......어차피 보낼 자료 따로따로 하나씩 보내는 것보단, 지금은 그냥 노트북 돌려서 보여주면 되지 않아? 바로 앞인데?”
“싫어. 남자가 자기 컴퓨터를 보여주는 일은 여자로 치면........ 아니다.”
“성희롱하는 거야? 거기서 더 나갔으면 다음 학기 내 등록금은 네가 대 줄 수도 있었어.”
“왜 속단하지? 내가 뭔 말을 하려 한 줄 알고? 너야말로 의외로 머릿속에 그렇고 그런........”
“내 머릿속을 그렇게 상상했다고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네 속내를 다 까발린 거나 다름없지. 이건 진짜로 성희롱이야.”
“........”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뭘 봐?”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대화가 기분 나쁠 정도로 편하게 이루어진다.
이유는 간단하지. 말할 때 머리 굴릴 필요가 없거든. 이미 원만한 관계형성은 파탄 난 관계다. 그리고 앞으로도 포기상태일 테지.
그러니 귀찮고 피곤하게 상대를 배려할 필요도, 상대의 속내와 원하는 바를 헤아려 댈 필요도 없지.
이게 꼭 좋기만 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정수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야 정수기.”
“........”
“조지.......”
“왜.”
이름을 불려서 그렇게 짜증낼 거라면 처음에 대답하시지?
“어쩔거냐?”
“뭐가?”
“그 어린 것들 말야.”
지금 상황에선 그 건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이미 과제는 우리 둘 만으로도 어떻게든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어찌하면 좋을까?
물론, 내 평소 방침대로라면 이대로 묻어가게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되면 큰 분란 없이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상대가 유달리 짜증난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간들을 처음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기 때문인 걸까?
어찌되었건, 이들이 적어도 과제에서 만큼은, 우리와 같은 점수를 받는 것이 너무나 눈꼴시럽다.
발표가 끝나고 이 커플이 우리에게 ‘수고하셨습니다!’같은 말을 한다면, 아마 나는 그 앞에선 사람 좋은 웃음이나 지으며 ‘수고하셨어요.......’같은 반응을 하곤 나중에 분을 삼키겠지.
항상 그래왔으니 뻔하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래왔으면서 이제 와서 왜 이들을 걸고 넘어지려는 걸까.
왜 정수기에게 그 판단을 맡기는 걸까?
“넌 어쨌으면 좋겠는데?”
“네가 조장이잖아.”
“떠넘기기?”
“........”
말문이 막힌다.
“농담이야.”
“농담도 할 줄 아냐?”
“넌 나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있는 거야?”
“성격파탄난 정수기.”
“진짜로, 착한 척을 그만두니까 진짜로 짜증나네.”
“넌 처음부터........아니, 이건 그만두고 어쩌려고?”
대답을 독촉하는 나를, 정수기는 잠시 째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예 이름을 빼는 건 조금 그렇지?”
“왠 일이래?”
“그렇게 하나하나 걸고 넘어지지 말아줄래? 그렇게 사람의 성격을 멋대로 판단하고 ‘다 내 예상 범위 내, 혹은 어라? 예상과는 다르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진짜로 기분 나쁘거든.”
“알았다. 미안.”
“어쨌든....... 그래 굳이 이름을 빼지 않더라도 조장이 교수님에게 보내는 메일에는 ‘기여도 평가’ 라는 것도 있거든.”
알고 있다. 나도 해본 적 있으니까.
“그건 정말로, 비민주적이고 개인적 감정이 들어가기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 교수님은 개인 보고서도 받고 판단하잖아?”
“그래 그렇지.”
이것이야 말로 그 교수님 과제의 난이도를 올리는 요소인 동시에, 무임승차자를 걸러내는 효율적인 장치지.
그러나, 그렇다면 나와 정수기의 논의에는 한 가지 모순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말야.”
“응?”
음, 이렇게 갑자기 순수하게 다음 말이 궁금하다는 듯이 반응하면....... 솔직히 말하면 조금 설레긴 한다. 예쁘긴 정말로 예쁘니까.
정신 차려라 이광진. 껍데기일 뿐이다. 저 예쁜 입에서 쏟아내는 말이 끊어버렸던 내 이성의 끈들을 떠올리자.
“개인 보고서가 있다면 굳이 기여도 평가를 나쁘게 할 이유는 없지 않아? 그냥 저냥 넘어가는 것도.......”
“난 싫어. 넌 어때?”
심플하네. 정말 지면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있어.
“왜?”
나 역시, 심플하게 되묻는다.
“싫어. 내가 무시당하는 것 같거든. 그렇게 순순하게 넘어가 주기 싫어.”
“........”
정수기의 차갑고, 한편으론 당당한 한마디. 그것이 무언가, 내 마음을 찌르는 것 같다.
“그래서, 넌 어떤데?”
물론 나도 싫다. 우리를 무시한다고 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그 멍청함과 뻔뻔함이 싫다.
하지만, 이렇게 교수님이 알아서 기여도를 판단해 주시는 과제는........ 관행상으로도 굳이 그렇게 깐깐하게 할 이유는 없다. 그냥저냥 넘어가도 어차피 점수는 차이 날테지. 애초에 그 녀석들은 결석도 했고.
“나도 싫긴 한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나는 심정적으로 이 여자에게 동의하고 있다.
그 놈들이 과제를 끝낸 우리 앞에서 희희낙락하는 꼴이 싫다.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싫다.
어떻게든, 내 손으로 엿 먹이고 싶다.
“싫긴 한데, 뭐?”
그러나, 대놓고 내가 이들을 엿먹였다가 돌아올 불이익이 걱정된다. 정확히는, 그로 인해 일어날 분란 그 자체가 무섭다.
한심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의 한심함은 나를 최악의 선택으로 이끈다.
“........네 맘대로 해.”
그렇게, 나는 정말로 비겁한 행동. 언젠가 뒤돌아보면 자괴감에 고개를 들지 못할 선택을 했다.
혹은, 선택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