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최종정리가 끝나고, 이제 과제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남은 것은 조장인 정수기가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고, 내가 발표일에 발표하는 것 뿐.
그렇기에, 나는 카페에서 다른 과제를 하다 가겠다는 정수기를 남겨두고 카페를 나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시간은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언제 두 시간이나 지난거지. 젠장, 아직도 더럽게 덥네. 해는 언제 떨어지는 거야?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갑자기 모 외국밴드의 불후의 명곡이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또 뭐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내 입에선 짜증 반, 지겨움 반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최근에 한정하면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몇 안된다.
정말 지겨운 패턴이란 것은 내가 잘 알지만, 어쩌겠는가. 김준환 이 미친놈은 자기 여자친구가 없으면 무조건 나를 찾아 헤메는 스토커스러운 자식인 것을.
“왜. 나 지금 집간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퉁명스런 한마디를 던지자 핸드폰에서 끔찍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웅~ 언제와아....... 나 배고파아......주놔니 햄버거 머꼬 싶......”
전화를 끊었다.
휴우, 다행이야. 조금 만 더 듣고 있었으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지 뭐야.
그렇게 안심하고 있으려니,
And so~~ sally can wait~~ she knows it’s too late~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젠장.
“여보세요?”
“아 왜 끊나~!!”
아니나다를까, 김준환이다. 제기랄.
“아 너 였구나 준환아. 난 또, 무슨 안 좋은 장사하는 곳에서 홍보전화 온줄 알았잖니....... 이 경상도 사나이 코스프레 하는 미친놈아.”
나긋나긋하게 욕설을 퍼붓지만 이 놈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디야 밥먹자 배고파 햄버거 먹자.”
자기 주장을 쉬지 않고 쏟아내며 칭얼대는 이 자식에게, 나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대답한다.
“싫어.”
“와?!”
“햄버거 어제 저녁으로 먹었으니까. 그리고 아직 3시 밖에 안됬거든?”
“난 배고파. 좀 일찍 먹지 뭐, 한 4시 쯤에.”
“꺼져. 난 아직 배 안고파.”
“아무튼 빨리 와! 씻고 기다리고 있을게!!”
“제발 꺼져!! 그리고 니네 집 가서 씻으라고!!”
“어라? 이광진씨? 무슨 근거로 내가 너네 집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제가 아직 당신 집에 있다는 말은 안했.......”
나름 나를 몰아붙일 기회를 잡아서 득의양양하신 것 같은데, 안통한다 망할 놈아.
“플스 소리나 좀 줄이고 그딴 소리 해라.”
“.......에헷. 빨리와!”
다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놈의 앙탈보다 더 짜증나는 것은, 나는 어차피 이놈이 생각한 대로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는 거다.
“아오......”
그렇게 가볍게 투덜대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통화를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나는 우리 집 앞 골목으로 이어지는 작은 사거리로 접어 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탁, 하고 쳤다.
“야이 이꽝!!!”
“으엑!?”
꽤 힘찬 타격이었다. 내가 살짝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였으니까.
그나저나, 이 목소리에, 날 이꽝인지 뭔지로 부를 정도의 인간이라.......
“아 민석이형. 오랜만이네.”
“새끼...... 요즘 왜 이렇게 안보여?”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헐렁한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 좋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방학이잖아. 어쩔 수 없지.”
“야, 너 종강 총회 때도 안 왔잖아. 안 그래도 요즘 과 행사 때 사람 없어서 죽겠구만. 너까지 안오면 되냐?”
이 인간의 이름은 이민석, 11학번이고 나보다 한 살이 많다. 학년은 똑같지만.
그리고 과 행사 운운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정외과 학생회, 그것도 과 학생회장이다.
물론 서브컬처 계에서 묘사되는 지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학생회장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실제로 이 양반은 유벤투X 유니폼 차림으로 동네를 활보하고 있고 평소 모습도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사실 대학교, 그것도 과 학생회장이라면 지적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 보단 많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고 사람들을 잘 부리며, 과 활동에도 적극적인 그런 사람이 많이 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다른 대학에도 해당되는 지는 잘 모른다.)
뭐, 쉽게 말해서 친구가 많고 인맥 빵빵하면 하기 쉬운 거다.
“아 종총? 그때 나 집내려가 있었다니깐. 미안하게 됬어. 하하.......”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말투인거, 나도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인간은 이런 종류의 후배를 좋아하는 것을.
“왜 그때 내려가는데? 아오....... 진짜 저번 종총 때 한 20명도 안왔을 걸? 교수님까지 왔는데 개 민망했다.”
“음, 형. 그래서 안온 게 아닐까?”
그런 잡담을 나누며 우리 둘은 우리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민석이 형네 집은 아마 우리 집에서 좀 더 올라가면 나왔지?
“야 그럼 너 농활은 안오냐?”
아 맞다. 그런 행사도 있었구나.
농활, 먼 옛날에는 뜻있는 행사였다고 들었던 것 같긴 하지만 지금에 와선 자연과 각종 신선한 농축산물을 안주삼아 술 먹으러 가는 원정음주가 주가 되어버린 비운의 행사다.
“에이, 내가 나이가 몇갠데 그런델 가?”
“야 임마, 나도 가거든?”
“아 형은 회장이고.”
역시나, 이 형은 과 행사에 민감한 회장 답게 내게도 농활참가를 자연스레 권하기 시작했다.
“아 같이 가자 좀. 너도 신입생 애들이랑 친해지고 그래야지.”
민석이 형이 툴툴댄다. 하지만 그렇다고 넘어갈 내가 아니지.
“아니 내가 15학번.......이 아니지 16학번 애들이랑 친해져서 뭐하게?”
“친해지면 좋지. 기회되면 여학우 한명 꼬실 수도 있고. 너 가서 적당히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럭저럭 분위기좀 살걸?”
“하하...... 그런 건 됐고. 애초에 입 다물고 있을거면 갈 이유가 없잖아.”
“넌 술 먹고 입 잘못 열면 안 되잖냐.”
“.......”
아 그랬지. 이 양반, 나 1학년 때 나랑 같이 학생회였지 참. 젠장. 1학년 때 이후론 실수 한 적도 별로 없는데 이미지라는 건 무섭구만 그래.
“아, 아무튼 그래. 난 학생회도 아닌데 거기 쫒아가서 무게 잡고 있으면 애들이 불편해 하겠지. 그 전에 한번도 본적도 없는데.”
“응? 너 아는 애들 있던데?”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올해 복학해서 14학번 이하의 어린이들과는 대화 한마디 해본 적 없는데? 그나마 13학번 후배들이나 다른 선배들도 군대가기 전부터 알던 애들이었고 난 올해 과 행사 같은 것에 거의 참가 한 적도 없다.
뭐지? 나도 모르게 안좋은 소문이 번질 거리를 만들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누가?”
이런 망상이 머리를 채우고 있던 탓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물음은 조금 다급함을 띄고 있었다.
“아, 민우랑 은별이. 몰라?”
민우? 은별?
아, 기억났다. 나랑 조별과제 같이하는 그 15, 16학번 어린 것들이구나.
학생회였나? 학생회 일은 제대로 하기나 하려나?
“아, 그 둘? 아하하....... 학생회였어?”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게 웃으며 넘겼다.
“어. 야 이 소심한 새끼야. 너 걔네한테 존댓말 쓴다며? 선배라는 놈이.......”
“아니, 뭐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사실 초면이었으니까 존댓말 쓰고 그게 굳어진 거지. 별로 가깝지도 않은 데 반말은 좀 그렇잖아.”
솔직히 그닥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야.
“에휴....... 복학생은 죄가 아냐 임마!! 응? 방에 처박혀서 준환이 놈이랑만 엉겨있지 말고 좀 여자좀 만나고! 응? 너 그러다 홀아비로 늙어 죽어!”
그렇게 외치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는 이준석 씨.
“아 그런 소리 하지 마쇼 좀. 엉겨 붙긴 뭘.......”
뭐, 말은 좀 함부로 하지만 이 양반은 아무래도 내게 더 농활을 권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이 형은 이래서 그럭저럭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럼없이 권하긴 해도,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거나 강제하진 않거든.
물론 말은 좀 X같게 하긴 하지만.
“그럼 난 들어 갈게.”
어느새 나와 민석이 형은 우리 집 앞에 다다랐다.
“어야. 들어가라.”
그렇게 가볍게 손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찰나, 내 머릿속에서 한가지 생각, 아니, 한 사람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아, 형!”
“응?”
우리 집을 지나쳐 올라가던 민석이 형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혹시 정수....... 아, 아니. 조지은이라고 알아? 나랑 동기인 여자인데.”
“조지......은?”
민석이 형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고개를 원위치 시키며 말했다.
“음, 잘 모르겠....... 아닌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음.......”
하긴 워낙 흔한 이름이니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지. 요컨대, 모른다는 거구나.
“음. 아냐. 됐어. 그냥 한번 물어봤어.”
그렇게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 민석이 형이 갑자기 소리쳤다.
“음? 여자? 야!”
“??”
생각 난 건가?
“너 혹시, 썸녀냐? 아니면 관심 있는 사람?”
“아니거든. 그냥 같이 과제하는 사람이거든.”
그럼 그렇지. 솔로 남자의 머릿속이 다 저렇지.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