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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난쟁이가 자신의 손에 칼을 쥐어 줬다가 다시 빼앗아 옆에 있는 어머니를 찌르는 꿈에 눈을 떴다. 온몸에 식은 땀이 가득했다. 끈적끈적한 느낌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더 맘에 안 들었던 건 꿈의 내용이었다.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기억이 났다. 자신은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 옆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웬 거인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거인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저기."
"거기는 너의 몸으로 가기는 어려울 텐데. 괜찮다면 내가 데려다줄까?"
"어, 고마워."
거인의 목소리는 낮은 중저음이었다. 꽤나 부드러우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호감을 느낄만한 목소리였다. 거인은 그를 손바닥에 태웠고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엄청난 거리를 단번에 주파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긴 왜 가려는 거야?"
거인이 물었다.
"칼을 찾아야 해."
"칼은 뭐 하려고?"
"그냥."
"꽤나 위험한 생각이야. 칼을 쥔다는 건. 넌 휘두를 생각이 전혀 없어도, 설령 죽여 마땅한 놈들을 죽여도 너는 위험 인물로 간주되거든. 예를 들자면 그런 거야. 네가 거리에서 수류탄을 들고 다니는 거지. 넌 안전핀도 뽑지 않았지만 네가 지나치는 사람마다 수군거릴 거야. 넌 전혀 뽑을 생각이 없지만. 그럼 어때? 너는 억울할 것 같아?"
"아니. 먼저 불쾌감을 준 건 내 쪽이니까."
"하하. 착한 사람이네."
거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웃는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렸다. 거인이 계속해서 웃자 그도 갑자기 재미있어서 웃어댔다. 거인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인이 다시 눈을 마주하면서 물었다. 앞을 보고 걸으면 참 좋을 텐데. 이러다가 부딪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그는 속으로 투덜댔다.
"근데 말이야. 내가 네가 칼을 쥐는 건 볼 수 없다면서 더 이상 가지 않으면 어떡할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혼자서라도 가는 수 밖에."
"흐음... 내가 그 길을 막아선다면?"
"그럼 어쩔 수 없지. 널 죽여서라도 가야지."
거인은 그의 눈빛에 오싹해졌다. 하지만 뇌에서 계속 울려대는 이 소리 때문에 그를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새끼를 죽여. 그 새끼를 죽여. 그 새끼가 가는 길을 막아. 막으라고! 거인은 그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을 죽이라고? 고작해야 내 손가락 하나만한 녀석을?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거인은 자신이 멍청하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머리가 나쁜 거인족 중에서도 그는 유달리 머리가 나빴다. 자신이 알 정도의 멍청함이라면 말은 다 한 거였다. 하지만 머리 나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계속 데려다주자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다하고 거인이 머리를 굴리던 도중 그냥 그가 알아서 가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더 이상은 못 데려다 줄 것 같아. 널 데리고 걸으니까 머리가 너무 아프거든. 여기서부턴 너 혼자 가야 될 것 같아."
"그래,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 만으로도 고마워."
"에이, 뭘."
거인은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나중에 뼈 저리게 후회하게 될 행동이었다. 거인은 한술 더 떠 그에게 무사히 그곳까지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곧 있으면 네 몸으로는 가기 어려운 구간이 나올 거야. 가시 덤불이 가득한 곳, 물에 잠겨 가득 차 있는 곳. 그곳에선 내 침을 발라. 몸이 커져서 물이 네 무릎까지도 오지 않을 거고, 가시 덤불은 긁히는 지도 모르게 바뀔 거야. 자, 여기."
거인이 그가 쥐기에 마땅한 병을 건네주고 자신의 손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손을 그의 앞에 내려 놓았다. 그가 병에 거인의 침을 담았다.
"고마워.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무슨. 거기에 무사히 왕복이나 해. 그게 은혜를 갚는 거니까."
"어, 알겠어. 나 꼭 무사히 거기까지 갈게."
"그래, 잘 가."
"너랑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우연이네? 나도 같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이미 된 거 아닐까?"
"우연이야.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하, 잘 있어."
"잘 가."
둘은 손을 흔들면서 헤어졌다. 그가 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거인의 심장이 쿵쿵 대면서 울렸다.
쾅, 쾅, 쾅, 쾅.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이다. 거인은 바닥에 쓰러졌다. 엄청난 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큰 균열이 생겨 있었다. 한 번만 더 쓰러진다면 땅이 갈라져 버릴 것이다. 거인은 심장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숨 쉬는 것 조차 이렇게 힘들 때가 있을 줄은 몰랐다. 거인은 떠나가려는 맨정신을 붙잡으면서 간신히 기절을 면하고 있었다. 문득 여러 번 느꼈었던 녀석이 다시 한 번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건 기절이 아니었다. 한 번 눈을 감고 나서
푹 쉬고 나면 다시 번쩍 눈이 떠지는. 그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 더 근원적인 공포가 드리우는 그림자였다. 정말로,
죽는다. 그렇게 심장이 천 번 정도 뛰고 나자 이번에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뇌를 벌레가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평소에 거인은 자신의 뇌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자신은 돌머리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커다란 대가리에도 좁쌀만한 뇌가 있긴 하다는 것을.
심장이 한 번 울리고 뇌도 잇따라서 울렸다. 엇박자로 계속해서 울리는 것 같았다. 죽음. 모든 것의 끝.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 거인은 슬슬 차라리 죽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뇌의 울림이 멈추면서 소리로 바뀌었다. 그 새끼가 가는 길을 막아! 아직 늦지 않았어. 달려가란 말이다. 아직 막을 수 있어. 어서 가서 막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네가 죽을 거다.
"그 녀석이 가는 길을 왜 막아야 하는데?"
이유는 알 것도 없고. 우선 막으라니까.
"아니, 알아야겠어. 개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이런 돌대가리 자식. 머리에 든 게 없군.
"그래, 나 멍청해.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목소리의 주인은 당황한 듯 한동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신이 바보인 줄 알면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구제불능 바보라는 걸 인증하는 셈이지. 뭐. 어쩔 수 없지. 자의식은 주고 싶었는데.
"뭐? 무슨 소리야?"
목소리가 끊기고 나서 정확히 10초 뒤. 거인의 심장과 뇌가 미친 듯이 울렸다. 쿵쾅, 쿵쾅, 쿵쾅.
쾅! 쾅! 쾅! 쾅!
"우... 으어억..."
거인은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면의 무엇인가가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썩 유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눈은 뒤집어 질 듯이 충혈되었고 온 몸의 근육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안에서 눈을 뜬 그 녀석은 빠르게 자신을 지배하려 들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가서 뇌로 들어가 자신의 뇌를 갉아먹고 있었다. 거인은 머리를 벽에 박으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때. 거인은 자신을 잡아주던 무엇인가가 끊기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긴 잠에 빠져들었다. 거인은 죽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더 이상 거인이 아니었다. 지금 쓰러졌다가 다시 눈을 뜬 이것은 더 이상 거인이 아니었다.
그는 달려가던 중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늘에서 아파트가 떨어진다면 이런 소리일 것이다. 소리는 몇 번이고 울렸다. 그는 거인이 쓰러졌다는 것을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 달려가진 않았다. 그는 칼을 찾으러 가야 했다. 그에겐 거인보다 칼이 더 중요했다. 거인도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거라며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무언가 말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뭉개진 소리라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계속해서 뒤에선 뭉개진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켕기는 기분은 뭘까. 그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더러워지는 기분을 제지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큰 소리가 울려왔다.
쿵.
거인이 쓰러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의 쓰러짐은 일전의 쓰러진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일전의 쓰러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쓰러졌다는 느낌이었다. 즉 머리가 아파서 쓰러졌거나 어딘가에 걸려서 쓰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의 쓰러짐은 달랐다. 자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즉 기절이나, 죽음같은 것들.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렇게 물가에 다다랐다. 그는 병을 주머니에서 뒤적거려 꺼내들고 뚜껑을 땄다.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그러자 뇌와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드레날린이 몸의 구석구석까지 퍼져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더 이상 세계는 예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의 발 아래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는 놀라움에 주먹을 꽉 쥐고 물에 발을 디디려던 참이었다. 뒤에서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쿵, 쿵, 쿵, 쿵.
코끼리가 달려오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코끼리보다 더욱 커다랬다. 거인이었다. 어째 더 멍청해진 것 같았다. 눈은 붉게 물들었고 힘줄이 튀어나와서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뭘까. 그는 어리둥절해져서 말을 걸었다.
"야, 무슨 일이야? 끝까지 데려다 주러 온 거야?"
"너... 가지... 가, 가지 마."
말도 제대로 못하는 거인의 모습에 그는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 더 이상 거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거인은 죽었다. 적어도 이 녀석은 거인이 아니다.
"싫은데?"
"그, 그럼 어쩔 수 없지."
거인이 그의 앞을 지나 물 위에 섰다.
"모, 못 지나가."
"나와."
거인이 그와 눈빛을 마주했다. 섬뜩했다. 거인은 자신의 힘줄 사이로 솟아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더 이상 막아선다면 죽는다. 하지만 몸은 뇌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못 가."
쾅.
거인의 얼굴이 터져버렸다. 그는 뭉개져버린 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랑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을 한 번더 곱씹으면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