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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애상>을 흥얼거리며 엑셀을 밟고 있었다. 드라이브는 그의 수 많은 취미 중 하나였다. 그는 PBK의 공동 사주이긴 했지만 편집장은 아니었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형편이었다. 그의 오래된 연인인 그녀는 어제도 밤 늦게까지 남아 마감을 서두르고 있었다. CD는 그녀의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준 뒤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엔 그녀의 차가 남아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웃으면서 자기 차를 타고 가겠다고 했지만 그가 오렌지 주스라며 내놓은 도수 높은 양주를 심한 피로가 축적된 탓에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벌컥 들이마셔버렸다. 뭔가 맛이 이상한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일은 다 끝마쳐 놨지만 이 상태로 차 운전은 커녕 버스 타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는 다리를 떨며 혼자 갈 수 있다고 CD에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가녀렸고 눈물은 그렁그렁했다. 그는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런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좋아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싸이코라거나, 사디스트 같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변태같은 것도 아니었다. 평소 강인함이라는 가면의 뒤에 숨어 직원들을 지휘하고, 잡지 발행을 서두르는 그녀의 모습이 그에겐 한 없이 당당하고, 사랑스러웠다. 일을 하는 도중에는 그도 그녀의 스타일을 존중해 선을 지켰지만, 종종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도 그녀는 가면을 벗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 무거운 가면이 떨어져나가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눈에 들어오는 그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눈물 흘리는 것은 매번 미안했다.
"너무해, 진짜, 너무해."
그녀가 훌쩍이며 말했다.
그가 그녀를 안아들고 대답했다.
"미안해. 집에 가면 뭐할래?"
그러면서 볼에 달콤한 키스를 날렸다. 살짝 술냄새가 스쳤다.
"지금은 모르겠어."
그녀도 그가 좋았다. 그냥 둘은 서로를 좋아했다. 돈이 많아서도, 잘생겨서도, 예뻐서도 아니었다. 그냥 좋았다. 그렇기에 마흔이 넘어서도 달콤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레 조수석에 눕혔다.
"토할 것 같아?"
"응."
그가 비닐 봉지를 꺼내 한 장 주었다. 그녀는 바로 토하지 않았고 5분 정도 애기를 하다가 토사물을 쏟아냈다.
"으악, 더러워."
"참 나, 네가 먹였잖아."
둘은 그러면서 크게 웃었다. 그의 CD를 밀어넣은 카 라디오에서는 <애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COOL의 애상이었다. 둘은 잠시 향수에 젖었다.
"그때 진짜 많이 들었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던 때였다. 그녀가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의 향기를, 감촉을, 분위기를 그는 결코 적응할 수가 없었다. 매번 새로웠다. 그녀는 매일매일 더 아름다워진다. 물론 그녀도 같은 기분이라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이제 일 애기는 하기 싫었다. 둘은 완벽한 둘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대개 타인과 만나면 남의 애기를 하며 시간을 때운다. A와 B가 만나면 C애기를 하는 식이다. 그런 애기가 재미는 있을 것이다. 굳이 진지해질 필요가 없는 남의 애기니까. 하지만 그딴 이야기만 반복이 된다면 둘의 관계엔 진전이 없다. A와 B가 만났다면, 둘은 자신들의 그리고 그들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관계 속으로 껍질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녀와 CD는 껍질을 뚫고 들어가 가장 깊숙한 곳까지 서로에게 허락을 해 주었다. 이 사람은 내게 단 한 사람 뿐이니까. 그녀는 애기를 하다 끝내 잠이 들었고, 눈 감은 귀여운 그녀를 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그녀를 업고 들어갔다.
아침이 밝았고 그는 그녀에게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 그는 딱히 정시출글 시간이 없다. 아니, 있지만 그가 지키지 않는다. 프리랜서 급이지만 PBK의 사원들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고 모두가 그를 존경했고 좋아했다.
하지만 편집장인 그녀는 달랐다. 적어도 아침 8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맙소사 눈을 뜨니 8시 반이 아닌가. 집에서 PBK 사옥까지는 차로 25분 정도가 걸렸다.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처음에 자기가 늦잠을 잔 걸 줄로만 알고 왜 알람이 안 켜졌는지 궁금해하며 세면을 시작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히 때우기로 했다. 그가 자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차키를 찾으려 했을 때 어젯밤의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 미친."
설마, 설마하며 핸드폰을 켰다. 알람은 정상적으로 작동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끈 기억이 전혀 없었다. 문자가 와 있었다. 그에게서 온 문자였다. 문자를 클릭해보았다. 그 뒤의 수두룩한 직원들의 문자는 애써 무시했다.
자고 있길래 너무 귀여워서 깨울 수가 없었어. 오늘은 푹 자. 알람은 내가 끌게. 이거 보고 있을 땐 내가 자고 있겠지? 사진 한 장 찍어서 나 깼을 때 볼 수 있게 좀 보내줘. 사랑해. 아침 거르지 말고. 잘 챙겨먹고 가.
결국 눈 앞의 이 무책임한 남자는 그녀를 위해 사랑에 눈이 멀어 6시 반의 알람을 듣고 일어나 자신의 핸드폰을 손수 찾고 알람을 꺼 준 뒤에 문자까지 보내주고 다시 잠을 자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9시였다. 그래, 지금 화를 내 봤자 뭐하겠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신발을 신었다. 주머니를 더듬어 차키를 꺼냈다. 그녀의 차키는 항상 어제 입은 바지에 들어 있었다. 그녀는 차키를 돌리면서 가는 게 취미였다. 하지만 세 바퀴 째 차키를 돌렸을 때 그녀는 자신을 잡아준던 무언가가 툭, 하고 끊기는 것을 느꼈다.
차는 지금 PBK건물 지하 주차장에 잠들어 있었다.
"야 이 신성훈 미친 새끼야아아!!"
그녀가 신발로 그의 등짝과 얼굴을 수십대 가격하였다. 그가 화들짝 놀라 도망치면서 이불로 몸을 감쌌다.
"뭐, 뭐, 뭐, 뭐야, 오, 우, 으으, 아, 왜, 아니, 왜 그래?"
평소 말을 조리있게 하기로 유명한 그였다.
"뭐, 이 새끼야? 아침 거르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알람은 네가 껐으니까 푹 자라고? 자랑이라고 적어놨다. 이 웬수야!"
평소 품격있는 언변의 소유자로 명성이 자자한 그녀였다.
"그렇게 문자까지 쓰고 다시 퍼 자는 정신은 챙겼는데 네가 어제 나 술 먹이고 납치한 건 기억이 안 났나 보다? 난 뭐 타고 가라고 그딴 짓을 벌였어. 이 새끼야아아!"
그는 이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맞다."
"뭐가 아, 맞다야. 아, 맞다가! 맞지, 맞지. 아주 뒤지게 맞지?"
그녀가 그를 후들겨 팼다. 평소 구준한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한 그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때리는 매는 한 없이 아플 뿐이었다.
"어? 문자 쓸 정신은 있었는데 네 차키 어디 있는지 말해줄 생각은 못했어?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미친놈아!"
"아, 아! 미안해. 미안해. 아! 미안해요. 데려다 줄게. 데려다 주면 되잖아요. 아, 그만 때려. 아파."
"뭐? 그만 때려? 데려다 주면 되잖아요? 우리 회사 출입 해제키를 내가 가지고 있는데 애들 출근시간은 한참 지났짢아요. 네? 이제 어쩌실 거예요? 이제 어쩌실 거냐고요."
"....미안."
그녀는 늦는 직원에 관해선 칼 같았다. PBK는 끈끈한 우정과 신뢰로 결속이 되 굴러가는 단체였다. 하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할 줄 알았다. 일할 땐 일하고, 놀 땐 놀자는 게 그들의 절대적 규칙이었다. 직원들은 벌써 문 앞에서 만났는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 문자들을 각각 한 통씩 보내왔다.
지켜야 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 거야. 이건 모두와의 약속이잖아. 그렇지?-???
그녀가 지각을 할 때마다 하는 이야기였다. 막내 기자 중 한명이 걱정이 됐는지 뒤이어 한 통을 더 보내왔다.
편집장님, 무슨 일 있어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 그저 말 없는 그를 바라볼 뿐 이었다.
"뭐 해, 빨리 씻고 옷 입어. 가야 될 거 아냐!"
"네!"
그는 5분 만에 준비를 마쳤고 그녀를 조수석에 태웠다.
"속은 좀 괜찮아?"
"부글부글 끊어. 너 땜에."
"에이, 미안해~."
그녀는 어느새 밝게 웃었다. 둘은 어제의 퇴근길과 오늘의 출근길을 함께했다. 이것만으로도 어제와 오늘을 최고의 하루로 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내릴 때에 달콤한 키스를 기습적으로 감행해왔다. 헤어짐은 언제나 아쉬웠다. 하지만 언제든 다시 만날 걸 알기에. 둘은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애상>을 틀고 드라이브를 즐겼다. 조수석엔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왠지 오늘 하루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웬 여자가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기자는 모든 전화에 부드럽게 반응해야 하는 법.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신수아 형사라고 합니다."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늘 하루는 꽤나 갑갑한 하루가 될 것이다. 그는 경찰을 싫어했다.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물론 공권력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기자라면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 놈들은 항상 실망스러웠다. 그의 기사는 전부 예찬을 받았으며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신뢰를 받아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옥죄이는 칼이자, 밧줄이었다. 즉 3자의 입장을 취하지 않고 열렬한 비판의 입장만을 고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놈들은 그만큼 실망스러웠다. 단 한번도 기대를 성취시켜준 적이 없었다.
"네, 그런데요?"
"어제 은마 아파트 살인 사건의 첫 목격자시잖아요?"
"네."
"그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잠시 만났으면 하는데요..."
그냥 전화로 하시죠. 는 목구멍 속으로 다시 밀어넣었다. 항상 이런다. 이놈들은 같은 것을 또 물어본다. 이건 정말이지. 미치도록 쓸모없는 시간 때우기다. 수사라는 이름의 사생활 침해요, 강제 연행이다. 이래서 그는 경찰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경촬들과 괜히 사이를 나브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좀 바쁘거든요. 나중에 하도록 하죠. 나중에."
"드라이브가 그렇게 급하신가요?"
그는 흠칫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행 같은 낌새는 전혀 없었는데, 내가 둔해진 건가?
"민간인 무단 감시나 미행은 범죄행위 아닌가요?"
"큭큭, 안심하세요. 혹시 지금 주위를 둘러보고 계신다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편집장님께 신성훈 기자님 조사를 위해 직접 전화드렸습니다. 흔쾌히 대답해 주시던데요. 지금쯤 차타고 어딜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이런."
신수아가 전화기 너머로 밝게 웃었다. 웃음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오케이, 어디서 만날까요?"
"오."
"왜요?"
"아뇨, 솔직히 좀 놀랐네요. 헤헤, 진짜 응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거절당한다 해도 뭐라 할 말은 없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전 여자가 좋거든요."
신수아가 크게 웃었다.
"편집장 님께서 화내실텐데요."
"헐, 그런 것까지 말해줬어요?"
"아뇨, 목소리에서 다 묻어나오더군요. 신성훈 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간드러지시던데요. 두 분 사이가 참 부러웠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녀를 제쳐두고 신수아와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여자를 좋아했다. 순수하게 여자를 남자보다 좋아했다. 그냥 그는 여자가 좋다는 말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다가 흠칫했다. 이 여자, 너무 예리하다. 자칫 더 들어갔다가는 잡아먹힐 것이다. 그는 조심하기로 했다.
"부럽죠? 얼굴도 심각하게 예쁘다고요."
"크크, 네. 지금 어디신가요? 제가 그 쪽으로 가도록 하죠."
둘은 3분 정도 통화를 더 한 뒤에 끊었다. 약속 장소는 한 카페로 정해졌다. 그가 도착해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뒤 기다리고 있을 때 신수아가 들어왔다. 물론 그는 신수아를 몰랐지만 기자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직감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는가. 그것이 그녀에게 강하게 반응했다. 형사에게도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물론 본질은 좀 다른 것이지만. 신수아 또한 그를 알아보았다. 우선 그는 커피를 받아왔고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