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범죄자를 증오한 살인마
작가 : 훈재
작품등록일 : 20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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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붉은 장미의 기억(2)
작성일 : 17-12-17     조회 : 298     추천 : 0     분량 : 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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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옆자리에 앉은 초면의 여자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며 대화를 꽃 피웠다. 그는 관계의 싹을 참 잘 틔웠다. 그렇게 한창 애기하던 중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찌르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익숙한 인사를 걸어왔다.

  "야! 와~. 너도 여기면 말을 했어야지. 너 나한테만 쌩 깐 거였구나? 딴 애들은 다 네가 여기라는데 나한테 한 마디도 안했으면서 설마설마했지. 응? 난 여기라고 했을 때 모르는 척 했잖아. 맞지, 맞지? 으음... 아무튼 반갑."

  뭔가 어색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서둘러 말을 마무리했다.

  "하하, 미안. 그때 숨겼던 건 그냥... 이유가 좀 있었어."

  대본을 읽는 듯 한 자신의 혀를 꼬아주고 싶었다. 이딴 말을 입력시킨 뇌 또한. 왜 그녀 앞에만 서면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그를 가볍게 쳤다.

  "야, 뭐래. 미안하긴 무슨. 이럼 내가 미안하잖아. 벌써 새 친구랑 놀고 있네. 애가 3년친구 쌩까는 애에요. 조심해요."

  그녀가 옆에 있는 여자애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3년 친구'라는 말이 그의 가스을 때렸다. 친구. 그는 여태껏 친구라는 말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그토록 잔인할 수가 없었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야, 뭐래."

  그녀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친한 친구들에게 가려나보다. 그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남자애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녀와 그 남자애의 사이는 더 친해진 것 같았다. 아니, 이건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 이건 분명...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1은 1이고, 2는 2다. 맞는 건 맞는 것이다. 둘은 팔짱을 끼며 그를 확실하게 죽여주었다.

  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번엔 왼손이었다. 자세히 보니 약지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지워낸 것 같았는데. 다시 마음속에서 벌레 한 마리가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씨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하나 봐?"

  그가 옆을 돌아보았다. 초면의 여자애였다.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언어의 형태가 잡혔기 때문이다.

  "뭐라고?"

  "방금 개, 좋아하냐고."

  "어."

  "그럼 개 남자친구를 이제 처음 본 거고?'

  "아니."

  "그럼 뭐야?"

  역한 감정이 몰려왔다. 옆에 앉아있는 여자애에 대한 혐오감, 그 남자애에 대한 증오, 그리고 이들을 미워하는 자신이 싫었다. 너무나도 찌질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가라앉았다. 뛰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 또한 가라앉았다. 차라리 심장이 뛰지 않았으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가라앉은 심장에 비해 감성은 끊임없이 솟구쳤다. 퍼내도 퍼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역한 감정과 함께 헛구역질이 몰려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이란 게 역겹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 또한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웠다.

  "닥쳐."

  "흐음, 뭐. 어쩔 수 없지. 알고 싶긴 하지만."

  그는 그날의 입학식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꽤나 폐쇄적이었다. 원래 고등학생 때 부턴 공부에 매진할 계획이긴 했지만 예상보다 깊게 자신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는 그 뒤로 그녀를 지웠다. 삶이라는 큰 덩어리 중 한 군데에 뻥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남녀의 사귐에 있어서 이별을 겪는다면 어느 정도 견딜 안식처가 있긴 하다. 바로 탓할 사람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개가 매일 약속 시간에 늦어서, 사랑이 식어서, 등등 따위의 이야기로 위안을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짝사랑을 끝낸다는 것은 탓할 사람도, 탓할 사건도 없다. 혼자 설레다가 혼자 끝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 위험하다. 오로지 자기 탓 밖에 할 수가 없다. 때론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그, 또는 그녀 탓을 하지만 결국엔 자기 탓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그렇게 자신 속에 갇혔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성적이 괜찮게 올라갔고 인간관계만 제외하면 모든 게 상승세였다. 오해하진 말자, 폐인처럼 살았다는 건 아니다. 가끔은 친구들도 만나고 관계는 끊기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유지해갔다. 다만 새 친구를 사귀는 일이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일엔 소홀했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잘한 일이었는지, 못한 일이었는지 잘 판단이 서진 않지만 그는 3년 내내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고 당당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고 경찰이 되었다.

  경찰이 되고 나서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참 많은 사건들을 겪었다. 흉악한 연쇄살인마, 집단 폭력, 부모살인, 가정 상해, 금품 갈취, 별별 시덥잖은 민원 등등...

  그 중에서도 그의 기억에 남은 몇몇 사건들이 있었다. 2년 전의 외국인 노동자 연쇄살인 사건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은 그의 신경세포 하나하나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5년 전쯤엔 아동 밀매 혐의가 있는 고아원으로 심문을 하러 가기도 했다. 그의 생각으론 100% 지하 세계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잡아넣진 못했다. 원장은 충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도통 웃는 얼굴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고, 목소리 톤은 온화했다. 경찰서로 데려갈 때도 불쾌한 기색이 전혀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그곳엔 20대의 젊은 여성 도우미도 있었다. 예뻤다. 그녀를 처음 보고 그가 한 생각이었다. 예쁘고 예의도 발랐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심문 대상에 사적인 감정은 배제시킬 줄 아는 그였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심문을 진행했고, 이성적으로든 정황상으로든 그녀에겐 전혀 혐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젊은 나이에 고아원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취조를 마치고 그녀를 툭툭 쳐 불러 세웠다.

  "저기, 이건 정말 사적인 건데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녀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 부터 한 번도 웃음을 그친 적이 없었다. 남에게 베풀면 마음이 넓어진다더니. 정말인가? 그는 귀를 후벼팠다.

  "아, 근데. 이게 좀. 그, 불쾌할 수도 있거든요.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해 주셔도 되요."

  "네."

  목소리도 사랑스러운 그녀였다. 도무지 비호감이라고 할만한 부분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는 더욱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몇 살이라고 하셨죠?"

  "스물 다섯이요."

  "아, 저기. 이게 질문이 좀 이상한 걸 수도 있는데."

  그래, 충분히 이상한 것일 수 있었다. 봉사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하는 순수한 이타심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순수함. 그것은 곧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행위이다.그리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진짜 봉사자'들이 가끔 있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어쩌면 지금 그녀에게 '왜 숨을 쉬세요?'라고 물어볼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사위는 던져진 것을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꽤나 젊은 나이잖아요. 근데 왜 벌써부터 봉사자 일에 뛰어드신 거에요? 그것도 꽤나 오래하신 것 같던데."

  고아원애들 중에 그녀를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아, 벌써부터 애들을 돌보는 이유요?"

  "네."

  "먼저 봉사자보단 부원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래 봬도 승진 좀 했거든요, 저."

  그가 가벼운 농담에 웃음으로 답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고아에요. 저희 고아원에서 나고 자랐죠. 왜 이른 나이에 이런 곳에 있느냐 하신다면 갈 데가 없어서? 뭐, 예전엔 울기도 하고 화도 많이 냈어요. 근데 이젠 애들을 볼 때마다 행복해요. 애들이 웃으면 저도 웃음이 나고, 애들이 울면 힘을 주고 ㅅ피고요. 그 힘을 주면서 없던 힘도 생겨나요. 아, 너무 수도승같나?"

  그녀가 불쾌하지 않게 웃었다.

  "아무튼 좋아요. 이 고아원을 물려받는 게 꿈이에요. 거기서 25년 동안 먹고, 자고, 일어났어요. 이곳을 망하게 할 순 없어요. 절대로."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처럼 가슴 따뜻한 일이 있었던가 하면 말할 수 없이 기괴한 일들도 있었다. 자신이 외계인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왔다거나, 자살로 알려진 수많은 유명인들이 모여있는 곳을 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딴 건 기자에게나 찾아가세요. 그는 꼬박꼬박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하루는 한 아이가 경찰서에 직접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가 벌써 12년 전이다. 그가 캔커피라도 먹을까 해서 막 일어나던 참이었다. 옆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져 돌아봤더니 한 아이가 자신의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도와줘, 경찰 아저씨."

  애가 어떻게 이 안까지 들어왔나 싶었지만 그 당시 그는 말단이었다. 이런 애가 돌아다니다 걸리면 제 탓이 되는 것이다. 일단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자신은 커피를 뽑고 아이에겐 코코아 한 잔을 뽑아주었다. 아이가 코코아를 받을 때 아이의 손과 그의 손이 맞물렸다. 아이는 손이 부르터 있었고, 오랫동안 뛰어다닌 듯, 행색이 초라했다.

  "그래. 할 말이 뭐니?"

  "아저씨 이름이 뭐야?"

  "그건 알아서 뭐하게."

  날씨가 추웠다. 겨울이었고,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얼른 들어가야만 했다. 그는 이 아이가 얼른 떠나버렸으면 했고 빨리 엄마가 와서 데려갔으면 했다. 아이는 겨울에 맞지 않게 외투도 안 걸친 차림이었다. 많이 추울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자."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뭘 도와줄까?"

  "아저씨 이름이 뭐야?"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왜 다시 물어보고 그래?"

  "좋아, 아저씨. 한 가지 알려줄게. 지금부터 녹음을 할 거야."

  "녹음이고 뭐고. 꼬맹이는 얼른 집에 들어가."

  "녹음해도 돼?"

  "얼른 가라니까."

  "애기 끝나면 갈게. 녹음 안 해주면 애기도 안 해줄 거야."

  그는 어이가 없었다. 웬만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 이었다. 뜨거운 이념과 신념을 안고 경찰이 된 그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경찰이었다면 아이를 보자마자 쫓아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아이라면. 그는 아이를 얼른 집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래, 좋아. 녹음해도 되."

  "좋아."

  아이가 녹음기를 켰다.

  "아저씨 이름이 뭐야?"

  "박현. 32살."

  "엥? 이름이 두 글자야?"

  "그런 사람도 있어."

  "처음 알았어, 신기하네. 아무튼 신고를 하러 왔어. 선생님이 억울한 일이 생기면 경찰서로 가라고 했거든."

  "그래~. 누구를?"

  꼬맹이가 만화를 너무 많이 봤네. 그는 생각했다.

  "우리 아빠를."

  "너네 아버지? 뭘 하셨는데?"

  그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줄 생각이었다.

  "우리 엄마를 죽였어."

  그는 뭔가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아이가 할 만한 농담이 아니었다. 믿을 수가 없는 애기였다. 그렇기에 그는 믿지 않았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말했다.

  "그렇구만~. 정말 슬픈 일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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