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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엔 별도 볕도 없다
작가 : 알트
작품등록일 : 20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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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종이엔 인연이 있다.
작성일 : 17-11-05     조회 : 363     추천 : 1     분량 : 6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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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인류는 패배했다.

  이야기의 시작으론 영 부끄러운 문장이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쓰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아무렴, 비유도 거짓도 농담도 아닌 진실인 것이다. 인류는 패배했다. 치부를 찌르는 아픈 말이다. 그러나 두 번째 찔리면 아픔도 무뎌진다. 세 번째에 이르면 되려 웃음이 나온다. 요컨대 역사책의 첫 페이지에 이런 익살스러운 문구를 적어놓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인류가 던전으로 쫒겨나기 전의 역사는 중요성이 떨어진다 판단하여 부득이하게 생략합니다.’

  나에게 권한이 있다면 고치고 싶은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쫒겨났다.’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쫒겨나는 중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게 정답이다. 던전의 상부와 지상은 이미 빼앗긴 땅이다.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 거주하는 층의 면적은 한정되어 있다. 계층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가득 메워지기 전에 던전 하부를 공략한다. 시원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물론 자네들도 알다시피 점령하지 않은 계층엔 마물과 함정이 우글거린다. 숙련된 모험가가 아니면 안된다. 이 학교는 그런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 것이다. 던전학 담당인 아렐 교수가 첫 수업에 말한 내용이다. 그녀는 모험의 베테랑이자, 던전의 위험성을 자신의 잘려나간 오른팔로 똑똑히 각인 시켜주는 참된 스승이다.

  이왕 선생 이야기가 나왔으니 학생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사 지망의 아무개는 던전 상부를 공략해, 최종적으론 지상을 되찾는걸 목표로 삼는다고 들었다. 마법사 지망 누구는 던전 최하층까지 파고 들겠다는 두더지 같은 꿈을 가졌다.

  그러나 내가 들은 가장 황당한 목표는 따로 있다. 딱 3명 존재하는 성녀 지망생 중 하나가, 하늘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구멍을 뚫고 싶다는 모양이다. 이유도 가관이다. 지상에 있는 별을 보고 싶다나.

  거참, 익살스럽지 못한 여자다.

 

 1.

 

  교수 연구실로 호출된 것은 점심이 끝날 무렵이었다. 문을 열어젖히면 살풍경스럽게 정돈된 방이 눈에 들어온다. 사적인 장소는 소유주를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집요할 정도로 실용적인 느낌은 확실히 주인과 판박이다. 나는 입구를 조심스럽게 닫으면서, 양모 재질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이판 루한.”

  “그렇습니다. 그게 제 이름입니다만.”

  “농담 하자는게 아니다. 얼간아.”

  싸늘한 목소리다. 칼날 같은 어조가 어줍잖은 장난은 싹둑 잘라버린다. 왼쪽만 남은 외팔이라고 해도 던전 공략의 최전선을 지켰던 카리스마는 그대로인 것이다. 부릅 뜬 눈이 무서워서, 나는 다소곳하게 자세를 고쳐앉는다.

  “이 학교에 들어온지 얼마나 지났지?”

  “3년인데요. 올해까지 합치면, 아마.”

  아렐은 거기서 입을 다문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려는 생각이라면, 당사자로써 말하건데 효과 만점의 방법이다. 학생을 성실한 그룹과 불량한 그룹으로 나눈다면 난 단언코 후자에 속한다. 갑자기 연구실에 불려와 어색한 침묵을 마주하면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끓는 물의 기포처럼 퐁퐁 샘솟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역량시험 성적이 어땠는지 말해봐. 이번 학기 말고, 저번에.”

  “서너 개 빼곤 전부 아슬아슬하게 합격했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그후에 있었던 교수진 종합평가는?”

  “만장일치로 C였죠.”

  “다들 1년이 지나기 전에 결정하는 지망 역할은 어떻게 되었지?”

  “…….”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문다. 물론,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교수님을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다. 커녕 더욱 더 불편해진 것은 이쪽이다. 아렐은 왼팔을 옮겨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지긋이 누르기 시작한다. 아마 다른 팔이 아직 붙어있었다면 그쪽으론 책상을 톡톡 두드렸을 것이다.

  “뭐, 압박을 줄 생각은 없어. 자기 재능은 각자 스스로 알고 있는거고, 자율적인 역할 선택이 생존률에 어쩌고 하는게 학자 나부랭이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니까.”

  물론 그딴 건 상관없이 내 기분은 상당히 언짢다만. 하는 표정을 그녀는 유감없이 나타낸다. 확실히 백전의 여걸답다. 얼굴 표정 만으로 상대방을 기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여기서 하하, 고맙습니다. 그럼 좀 더 생각해보지요. 하고 자리를 뜬다면 기가 죽는 걸론 끝나지 않을테지, 분명 몸도 같이 죽는다. 뭐, 자주 겪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할 변명 정도는 여럿 생각해뒀다.

  “아무래도 저는 특출난 재능 같은게…”

  “대인 전투 실기시험에서.”

  준비해뒀던 플랜A를 끝마치기도 전에 말을 싹둑 자르고 들어온다. 손은 여전히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다. 죄수를 심문하는 교도관같은 태도로 느긋하게, 빙글빙글.

  “대인 전투 실기시험에서 정확히 합격점인 70점 언저리를 따낸 뒤에 곧바로 검을 놓쳤었지. 기억하나?”

  “예에, 손에 힘이 풀려버려서.”

  “마나감응 시험에선 평균치를 받은 직후에 현기증으로 중도포기했고.”

  “집중력이 부족하거든요.”

  “계층탐사 시험에서 성공 직전에 귀환한 이유도 집중력 때문인가.”

  아차 싶은 기분이 든다. 시험 전용으로 만들어진 인공던전 얘기다. 조금 눈에 띄는 행동이었나. 같은 조의 다른 3명이 전원 함구해줄 것이라는 생각부터 안일했을지도 모른다. 관자놀이에 대고 있던 주먹은 이제 아래로 옮겨가 턱을 괴고 있다. 눈은 무표정하고 입가는 손가락이 가리고 있어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실력을 숨기고 있다… 뭐 그런 얘기라도 하실 생각인가요.”

  “아니야.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자의식 과잉이 너무 심한거 아닌가?”

  “어….”

  영락없이 그런 줄 알았는데.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면 아렐은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 드러난 입가는 영 못마땅한 형상으로 일그러져있다.

  “네가 정말로 특출난 천재였다면 무슨 헛짓을 해도 교수 중 한 명은 간파했을거야. 그걸 숨길만한 머리가 있었다면 이딴 식으로 ‘눈에 띄는 평균치’를 받지는 않았을테고.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분수에 안맞는 자신감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거든.”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조금 마음이 아픈걸요.”

  “내 생각일 뿐이다만,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데. 최선을 다 하지 못 하는 걸 수도 있고. 목표나 역할 같은 짐덩이를 어깨에 달면 그대로 고꾸라지는 놈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확실히, 경험에서 나오는 통찰력이란건 우습게 볼게 아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돌연.

  ”아무튼 이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라고 말하면서 책상 아래의 서랍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뭉치에서 한 장을 뽑아든다. 외관상 비교적 새 것으로 보인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뭉치 사이에서 어쨌든 흰색이다. 하는 느낌을 주고 있으니까.

  “널 오라고 한 건 다른 이유거든.”

  “제 수상쩍은 성적을 지적하려고 부른 줄 알았습니다만.”

  “그딴 일로 귀찮게 할 만큼 좁아터진 인간은 아니야. 게다가, 원론적으로 말하면 합격점을 넘은 이상 시시콜콜 관여할 이유도 없고.”

  즉,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뜻인가. 서론에서 꽤 사납게 데인 느낌이 들지만 그녀 기준으론 가벼운 잡담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렐은 꺼낸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둔 뒤에 다시금 손을 내려 서랍을 닫는다. 팔이 하나 밖에 없는 건 꽤 번거로운 생활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 그 수상쩍은 성적이 아예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다만.”

  종이 위에 적힌 글자는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랫쪽에 새겨진 인장 뿐이다. 기억에 남아있는 문양이다. 어느 기억에 남아있는가 하면 학교 퇴출 명령서에서 본 적이 있다. 성적 미달로 쫒겨난 놈들이라면 꿈에서도 잊지 못할 인장이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든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무슨 소릴 하는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어중간한 놈을 던전에 내보내서 사상자를 늘리고 싶진 않겠죠. 아무리 그래도 쫒아내는건 조금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지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쳐다보면, 아렐은 그야말로 농담하는 얼간이를 보는 표정이다.

  “쓸데없는 비약이 심한 놈이군. 눈알이 뒤틀린 게 아니라면 똑바로 다시 봐라.”

  그렇게 말하며 퇴출 명령서(추정)을 들어올려 내 얼굴 앞으로 바짝 들이댄다. 개미처럼 작게 보이던 글자를 알아보기엔 충분한 거리다.

  “퇴출위기학생 특별구제반… 뭔가요, 이게.”

  건조한 필체로 적힌 글자는 확실히 그렇게 읽힌다. 그러나 퇴출위기학생 특별구제반… 같은 부르기도 힘든 이름의 단체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렐은 설명을 요구하는 나에게 손바닥만한 크기의 깃펜을 내민다.

  “안정계층 최상층에서 교수가 한명 새로 내려왔어. 성적 미달로 쫒겨나기 직전인 놈들을 모아서 가르치고 싶다더군.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만.”

  안정계층이라 함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전체의 8할 이상인 계층을 일컫는 단어다. 그 중에서도 최상층이다. 비유하면 국경지대의 최전선. 그런 곳에서 구르던 사람이면 어지간한 실력자라는 뜻이지만, 당연하게도 그게 이 기묘한 집단 탄생비화의 근거가 되어주진 않는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하면 열등생들 모아놓겠다는 소리로 밖엔 안들리는데요.”

  “정확하게 봤군. 동감이다.”

  “모집 기준은 뭐죠?”

  “1차적으론 시험성적, 그리고 교수들의 평가. 모르는 모양인데, 넌 생각보다 위태로운 위치에 걸려있거든. 절벽에 한쪽 팔로 매달려있는 꼴이라고 할까.”

  “교수님이 말하니까 농담처럼 들리네요.”

  내가 반쯤 낙제생 취급 받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말이 좋아서 아슬아슬한 합격점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열등생이라는 단어에 딱 맞는 모습이니까.

  “그 아래 모집대상 명단에 서명하고 대충 기입하면 된다. 용건은 그걸로 끝이야.”

  “내키진 않지만… 학교 방침이라면 어쩔 수 없죠. 미리 말하지만 활동은 제대로 안할겁니다.”

  “어차피 서명만 받아내면 내 관할도 아니야. 그쪽이 알아서 맡는다고 들었다.”

  그쪽이란 건 새로 온다는 교수를 말하는 거겠지. 다짜고짜 이런 일을 진행하다니, 무서울 정도로 유능하거나 상상도 못할 괴짜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건 엮여서 즐거울 일은 없다. 적당히 끝내고 빠져나갈 생각으로 깃펜을 움직이던 나는 어떤 항목에서 손을 멈칫한다.

  “지망하는 역할은 뭐라고 쓸까요. 공백으로 두는 건 안될 것 같은데.”

  “말하길, 혹시 지망 역할이 없는 놈이 있거든, 용사 지망으로 기입하라고 전해주십시오. 라더군.”

  “용사?”

  “실전에서 쓰는 속어다. 제대로 할줄 아는 것 없이 의욕만 가득한 주제에 쓸데없이 객기 부리는 놈들을 용사라고 부르지.”

  “딱히 긍정적인 속어는 아닌 것 같네요.”

  “반쯤 조롱이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지망이다. 하지만 별 수 없이 그대로 적어넣는다. 용사라고. 방금 걸로 확정이다. 새로 오는 교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괴짜다. 뭐, 어차피 의욕을 가지고 할 일도 아니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런데, 그 깃펜 말이다만.”

  아렐은 내가 마지막 항목을 작성하는 것을 확인하는 듯 하더니, 슬며시 입을 연다.

  “ C등급 마도구거든.”

  “겉으론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뭐, 마도구라는 것들이 뭔들 안 그렇겠습니까만.”

  마도구라는 건 던전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물건들의 총칭이다. 원리를 이해할 수 없고, 조금이라도 특별한 기능이 있다 싶으면 뭉뚱그려서 마도구라고 부른다. 그 힘은 가히 위력적이다. C등급이라고 하면 일견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어지간한 마법보다 의지가 되는 수준이다.

  “이름이, 그렇지. 인연의 깃펜이라고 하는데.”

  그 즈음, 나는 작은 이변을 눈치챈다. 아주 사소한 변화지만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불려온 이후 처음으로, 아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으니까. 인연의 깃펜이라고. 이름부터가 불안감을 증폭시키는데.

  “그걸로 같은 종이에 이름을 적은 놈들은 인연인지 뭔지로 묶여버린다고 하더군. 자세힌 모르겠지만.”

  “무슨, 그걸 왜 이제….”

  나는 순식간에 펜을 놓아버린다. 물론 이미 늦었다. 내동댕이 친다고 쓴 글자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서명은 기입된 후다. 아렐은 종이를 낚아채더니 확인이라도 하듯 꼼꼼히 읽어본다.

  “그래, 확실히 서명해놨군. 미리 말해두면 무슨 핑계를 대서건 거절할 게 뻔했거든.”

  아, 사실 그거 검은 잉크가 아니라 파란 잉크야. 라고 말하듯이 별 것 아니라는 말투다. 별 것 아닐 리가 없다. 무려 C등급의 마도구다. 강력한 저주에 걸린 것에 비견되는 사태라는 말이다. 묶인다고? 누구랑? 내 위로 주르륵 적혀있는 얼굴도 모르는 낙제생들과?

  “이판 루한.”

  속았다! 라는 표정으로 멍한 내 모습은 아랑곳 않고, 필기체로 기입되었을 이름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읽혀진다.

  “이번 학기엔 친구가 아주 많이 생기겠군.”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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