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아... 하아... '
세이렌의 검은 머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떨어지는 식은땀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악몽을 꾸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세이렌은 한참을 숨을 고르다가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 후... 오늘따라 학교가기 더 싫어... '
그녀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듯하고 밝은 햇살과는 반대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베개에 한껏 얼굴을 파묻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곤 창문을 향했던 시선을 옆에 놓여있는 탁상시계로 옮겼다.
분명 평소보단 이른시간이었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봐도 더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 .... 그래도 안갈순 없으니까, 그냥 일찍 준비해야겠다... '
세이렌은 덮고 있던 이불을 세게 걷어내고 화장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헤어브러쉬를 들어 긴 검은머리를 빗어 올린 뒤 머리색과 반대되는 붉은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올리고 붕대를 들어 상처난 어깨에 감아올렸다. 그리곤 교복을 가지런히 입고, 등교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나가기 위해 방의 문고리를 꽈악 잡아 쥐었다.
' ..... 진짜 가기싫다.... '
그렇게 그녀는 가기싫다는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기숙사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렇게 어느정도를 걸었을까.. 한숨을 걸으며 걷고 있는 그녀의 어깨위로 큰 손이 올라왔다.
" 울보, 너 무슨일있냐? "
그녀는 갑자기 올려진 손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 ....카일..? 너 학교 이렇게 일찍가? "
울보라고 부르는 분홍머리를 가진 아이는 역시나 카일이었다. 그녀는 놀란표정을 감추지 못한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 아, 많이 놀랐냐? 놀래키려고 한 건 아닌데.. 어쨌든 왜이렇게 표정이 안좋냐 "
그는 한숨을 쉬며 어두운 표정으로 걷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 .... 그러니까.. 어제.. "
그녀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듯 눈시울을 붉히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기시작했다.
그렇게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를 본 카일은 당황한듯해 보였지만, 옆에서 군말없이 끝까지 들어주었다.
" 야 울보, 내가 그런거 있으면 말하라 했잖아. 하.. 진짜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냐. "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은 그는 눈시울이 붉어져 곧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그녀에게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둘러주었다.
" 또우냐 울보, 그런데 혼자가기 무서우면 나한테 와. 그래야 같이 가주던가 말던가 하지. "
그는 그녀에게 목도리를 다 둘러주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그의 웃음을 본 그녀는 감겨진 목도리를 조금 올리며 그녀 역시 카일을 보며 옅게나마 웃어보였다.
" 그래, 그렇게 웃으니까 덜 못생겼네 "
그는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 .... 그럼 많이 웃어야겠네? "
그제서야 기분이 좀 나아진걸까, 그녀도 어두운 표정에서 벗어나 어느새 둘은 사귀는 사이라 해도 믿을것만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기며 걷고 있었다.
" 흐음.. 역시 카일이랑 파트너였다면 더 좋았을지도 ... "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쓸려 세이렌은 그만 자신이 마음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던 말을 실수로 내뱉고 말았다. 놀란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갑자기 왜. 너 파트너가 어제 본 그.. "
그는 예상하지 못한 말인듯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뒤에서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 난데 왜 "
빛을 받아 빛나는 은발과 바다같이 푸르른 눈을 가진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저 아이는 아르가 틀림없었다.
어째서인지 평소 일찍 일어나는게 제일 힘들다던 그가 일찍 학교에 등교중이었다. 그런 그는 세이렌과 카일의 대화를 들은 것인지 세이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 ..... 걔랑 그렇게 파트너가 하고싶었냐. 나는 그렇게 싫었고? "
평소와 달리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그의 물음에 세이렌은 당황한 듯 카일과 아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묻잖아, 하고 싶었냐고. 대답해. "
세이렌은 그런 아르의 앞에서 말할 면목이 없었기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 어제는 랜디선배랑, 오늘은 저 자식이랑. 애초에 나랑 같이 하는거 싫다하지 그랬냐. 나혼자 시험 준비해도 나는 아무런 상관 없다니까? 아까는 잘 말하더니 왜 말을 못해. 대답해 보라고. "
꽤 공격적인 태도로 세이렌을 내몰고 있는 그의 앞으로 카일이 막아섰다.
" ...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닌건 알지만, 애초에 너가 얘한테 모질게 굴어서 그런거라곤 생각해본적 없는거야? 한번 생각해보긴 했어? "
자신을 막아서는 카일의 말을 들은 아르는 잠시 멈칫했다.
" .... "
역시 아직 생각해보지 않은걸까. 아르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 너도 한번 생각해보지 그래. 얘가 왜 그런말을 하는지, 그냥 그럴애는 아니라는거 너도 같이 지내봐서 알거 아니야. "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카일이 마음에 들지않는 아르였지만, 틀린말은 아니었기에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로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세이렌은 마치 카일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듯 카일의 뒤에서 카일의 옷 소매를 꼬옥 쥐고 있었다.
' ....나는 꼬맹이 너가 그렇게 다른 놈들이랑 붙어 있는게 마음에 안든다고...
아르는 차마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 하지못한채로 화가 난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아, 저.... "
세이렌은 뒤늦게 아르를 불러보았지만, 이미 문을 세게 닫고 반으로 들어간 뒤였다.
" 일단 너도 반으로 들어가보는게 어때. 서로 오해가 쌓인 모양인데. "
그런 카일의 말에 세이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교실문을 살며시 열었다.
아무말도 하기 싫다는 듯 엎드려 있는 아르, 그리고 꽁꽁 얼어버린것만 같은 교실 분위기 속에서 차마 말을 걸 수가 없던 그녀는 결국 조용히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문을 열어 잠시 복도로 나왔다.
" 사과해야하는데... "
그는 카일이 둘러준 목도리를 더욱 끌어올리고 복도 창문에 살며시 기대었다.
***
그렇게 한시간, 두시간.. 몇시간이나 지났을까.
지금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둘은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마치 한번도 마주친적 없는 남처럼 대하고 있었다.
" 야, 아르 밥 먹으러 가자. "
어떤 남자아이가 반 문앞에서서 책상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는 아르를 불렀다.
" ....응 "
아르는 한참 뜸을 들이다 기운없이 몸을 일으키며 남자아이와 함께 곧 세이렌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 ... 역시 기운이 없어보이네.. 나 때문이겠지.. '
세이렌 역시 힘없이 몸을 일으키며, 걸음을 급식실이 아닌 도서실로 향했다.
' 역시.. 밥 먹을 기분은 아니니까.. '
도서실에 도착한 그녀는 평소 즐겨 읽는 천문학책들을 몇권 골라 읽으며, 점심시간을 어영부영 보냈다.
그렇게 1시간의 점심시간이 금세 지나고 그녀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터덜터덜 교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 ...응? 쪽지..? "
잠시 도서실에 다녀온 사이에 그녀에 책상에는 세이렌에게라고 적힌 흰색의 가지런히 접혀있는 쪽지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쪽지를 집어들어 조심히 펼친 후, 작게 소리내어 읽었다.
" 세이렌에게.. 할 말이 있어. 학교 뒷편에서 만나. 길지 않을테니까 지금....? 지금 보자고..? 아르가...? "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쪽지를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았지만, 내용은 틀림 없었다. 오늘 하루종일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마치 남처럼 대하고 있던 그가 보낸 쪽지라고 생각하니 믿기지 않았지만..
' 그래도 부른건데 나가야지... 이번엔 진짜 사과해야겠어... '
그녀는 벗어둔 겉옷, 그리고 카일이 둘러준 목도리를 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상상도 못한채.... 그녀는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지 않은 학교 뒷편은 무슨 몬스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어두침침한 스산한 분위기였다.
' 아르가 이런곳으로 부를리 없는데... 그래도 쪽지를 보내고 자리에 없었으니까. 분명 여기 있겠지. "
그녀는 아르, 그를 찾기 위해 학교 뒷편으로 조금 더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그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르는 코빼기도 보이지않았다.
" 뭐지... 늦는건ㄱ... "
그렇게 학교 뒷편에 혼자 멈춰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그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차가운 손이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놀란 그녀는 자신의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떼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손을 떼어내기엔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 도와줘 아ㄹ... '
차가운 손에 의해 숨이 점점 막혀오던 그녀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