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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벨린의 노래
작가 : 아리움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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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예언
작성일 : 17-11-06     조회 : 450     추천 : 0     분량 : 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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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예언

 

 연일 태평성대가 이어지고 있는 리벨린 왕국.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 이상한 예언이 퍼지기 시작했다.

 

 ‘리벨린 황제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나라가 망한다.’

 

 리벨린의 황제는 1년에 한 번,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노래를 바쳐야 했다. 하지만 리벨린 백성 모두가 그 예언을 시답잖게 생각했다. 황제가 음치였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는 노래라고 할 수 없었고, 신도 노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매년 노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보좌관이자 그의 오랜 친구인 게른은 그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노래 선생을 구해줘.”

 

 게른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워있던 진이 말했다. 잠이 덜 깼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얇고 긴 속눈썹이 하얀 피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가 덮고 있는 이불만큼이나 하얗다. 분명 같이 땡볕에서 뒹굴곤 했는데 왜 진만 저렇게 피부가 하얀 건지, 게른은 알 수 없었다. 역시 타고난 게 분명했다.

 

 “뭘 구해 달라구요?”

 

 게른은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를 올리며 되물었다.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노래 선생이라니 제정신인가?

 

 “노래 선생 말이야. 구해오라구.”

 “왜요?”

 

 게른의 물음에 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일을 마친 게른이 그의 침대로 다가갔다. 진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게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노래를 잘 부르고 싶으니까.”

 “나라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까?”

 “그건 아닌데.”

 “저번에 말씀드린 예언 벌써 잊으신 게군요.”

 “아니 잘 기억하고 있어. 맨날 그 예언을 생각하니까 노래가 하고 싶어지는 거야.”

 

 게른의 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일이 너무 많아서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부탁하면 제가 해드릴 거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하지.”

 

 진이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눈썹을 살짝 넘긴 검은 머리가 찰랑였다. 게른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진의 눈을 피했다. 선명하고 맑은 그의 눈을 보면 부탁을 들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진도 그걸 알고 있는지 자주 그렇게 눈을 마주쳐오곤 했다.

 

 “안됩니다.”

 “왜?”

 “몇 번을 부탁하셔도 안 됩니다.”

 “그럼 내가 나가서 구해와야겠다.”

 

 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다. 조금 말랐지만 오랜 훈련 탓인지 근육이 탄탄하게 잡혀있었다. 맨몸이건 말건 금방이라도 방을 뛰쳐나갈 것 같아 게른이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제정신이십니까?”

 “내가 제정신인 적이 있었던가?”

 

 장난기 가득했던 진의 눈빛이 순간 뒤바뀌었다. 위험하다. 게른은 자신의 목이 잘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라의 멸망이냐, 자신의 목숨이냐. 무엇이 중요한가를 따지고 보면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가 중요한 게 분명하지만. 게른은 지금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집에 있는 메릴과 유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래. 노래 선생을 구해주고 옆 나라로 도망가는 거야. 물론 진이 놔줄 것 같지는 않지만, 곧 그의 생일이었고 옆 나라의 조공을 받느라 자신 따위는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을 게 분명했다.

 

 “게른?”

 

 낮게 가라앉은 진의 목소리가 그를 재촉하는 듯하다. 게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죽느냐 망하는 나라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느냐. 게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해 오겠습니다.”

 

 진의 표정은 그제야 풀어졌다. 언제 정색했는지 싶을 정도로 웃음 가득한 얼굴이다. 저 얼굴에 홀려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지. 게른은 그때로 다시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다시 홀릴 것 같지만 말이다.

 

 “언제까지?”

 

 다시 침대에 앉은 진이 말했다. 다리를 꼬고는 한쪽 발을 까딱거렸다. 신이난 모양이다. 저런 철부지가 황제가 되다니 게른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진도 원하지 않았지만.

 

 “일주일만 주신다면…….”

 “일주일? 너무 긴데? 게른, 능력이 이 정도였어?”

 

 진이 게른의 턱을 붙잡았다. 힘이 없어 보이는 얇고 긴 손가락이지만 악력이 꽤 셌다. 매번 그에게 팔씨름을 졌던 게 떠올랐다.

 

 “3일. 그 이상은 안 돼. 그럼 내가 구하러 나갈 거야.”

 

 게른은 당신이 이 나라 지리를 알기나 해?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황제라는 위치는 더 이상 진에게 화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턱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가자 게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태산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죽을 수 없어. 유스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유스, 아빠가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고 있단다. 진은 만족스럽다는 듯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

 

 게른은 해야 할 일을 미뤄두고 마을에서 제일 큰 중앙여관으로 향했다. 진이 3일을 주었지만 최대한 빨리 구해야 했다. 구하기 전까지 게른을 매일 괴롭힐 게 뻔했다. 여관주인 제스가 게른을 반갑게 맞았다. 거대한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게른은 이 나라에 멀쩡한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게른은 맥주를 주문하고는 제스에게 말했다.

 

 “노래 선생 한 명만 구해줘.”

 “갑자기 왠 노래야? 다음 제사 때 자네가 노래하나?”

 

 제스가 게른에게 맥주를 내어주며 말했다. 험악한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무서우니 다음부터 그런 얼굴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게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배우는 게 아니야.”

 “그럼 누가?”

 

 게른은 진의 얼굴이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목을 비틀 것 같던 그 눈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시민들은 그를 가볍게 생각했지만, 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목표한 건 꼭 이루는 맹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네.”

 

 게른이 심각한 표정으로 답하자 제스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위층에 애들 가르치는 선생 하나가 머무르고 있긴 한데…….”

 “지금 물어봐 줄 수 있나?”

 “그렇게 급한가?”

 

 어느새 맥주를 한 잔 다 비운 게른이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일세.”

 

 제스는 앞치마를 푸르고 2층으로 올라갔다. 게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아무나 노래 선생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를 데려가도 진의 성에 차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게른은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하고는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

 

 “유리나라고 부르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게른은 노래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가 가르치는 거라면 몇백을 주더라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넋을 놓고 유리나를 바라보고 있자 제스가 게른을 툭 쳤다. 뭐하고 있냐는 눈이었다. 정신이 든 게른이 말했다.

 

 “아 유리나, 게른이라고 합니다.”

 

 게른이 답지 않게 공손히 인사했다. 제스는 킥킥대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진 게른은 유리나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혹시 어린아이 말고 성인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게른 님께요?”

 

 게른을 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유리나가 말을 높였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그녀가 부담스럽게 생각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 저 말고 다른 분입니다.”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쇄골까지 오는 잿빛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제발 그러겠다고 말해. 게른이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그녀가 거절한다면 3일보다 길어질게 뻔했다. 진이 날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유리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이 정도 액수를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나랏돈을 이렇게 쓰다니 게른은 진의 사치품 비용을 확 줄여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가르쳐야 하나요? 제가 한 달 뒤에는 돌아가야 해서요.”

 

 유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게른은 진에게 중요한 걸 묻지 않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저 노래 선생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진이라면 일주일도 안 돼서 질려버릴 거야.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게른이 말했다.

 

 “한 달이면 괜찮을 것 같네요.”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미리 준비를 해야 해서요.”

 

 게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나가 마음 준비를 할 시간을 줘야 할까, 아니면 알려주지 말고 데려가야 할까. 그녀가 가르쳐야 할 사람이 황제라는 사실을 지금 알게 되면 결정을 번복할지도 모른다. 게른은 눈물을 머금고 유리나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미안해요. 유리나. 보너스를 더 챙겨드릴게요.

 

 “제가 모시고 있는 분으로 조금 높은 분의 자제입니다.”

 

 조금 높은 건 아니었지만, 높은 분의 자제는 맞지 뭐. 게르는 마음속으로 유리나에게 사과했다. 유리나는 자신이 가르쳐야할 사람이 귀족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놀랐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리벨린은 계급 차별이 조금 심한 편이었다.

 

 “그리고 조금 변덕이 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

 

 게른의 머릿속에는 진의 노랫소리가 자동 재생되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자 제스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거절할까 마음이 급해진 게른이 덧붙였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민족이나 계급이 낮은 사람도 존중해주시는 분입니다.”

 

 존중이라,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진은 사람의 급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노예 해방에도 힘쓰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리나는 아름다웠다. 진은 언제나 아름다운 걸 아꼈기에, 그녀의 출신을 문제 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유리나가 잠시 고민하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지금 당장, 저와 가주실 수 있나요?”

 “당장이요?”

 

 유리나의 눈이 커졌다.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럴 만했다. 유리나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게른은 그래 하루만 진의 잔소리를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말했다.

 

 “힘드시면 내일부터 시작하셔도 됩니다.”

 

 그 말도 유리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 여전히 고민하는 표정이다. 게른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 잔소리를 20년 넘게 들었는데 며칠 정도야 참을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할 때 유리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떤 분인지 만나보기만 해도 될까요?”

 

 게른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했다. 진이 유리나를 맘에 들어 한다면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게른의 역할은 노래 선생을 구해오는 것뿐이므로. 그 이후는 온전히 진에게 맡겨야했다. 내 월급을 다 털어줄게요. 유리나. 잘 버텨줘요.

 

  *

 

 “유리나라고 합니다.”

 

 유리나가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 진은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름이 뭐라구요?”

 “유리나입니다.”

 

 진의 물음에 유리나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진이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가 내려오는 소리가 유리나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유리나의 앞에 그늘이 졌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마 진에게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요. 유리나.”

 

 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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