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거절과 설득(2)
마차 안은 정적이 흘렀다. 말이 달리는 소리와 풀을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게른은 마부가 말을 채찍질 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리나의 맞은편에 앉은 게른은 자리선택을 잘 못한 것 같아 후회하고 있었다. 차라리 옆자리가 나았을 것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제 와서 자리를 옮기는 것도 이상했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려야지. 하고 생각할 때 유리나가 말을 걸어왔다. 놀란 게른이 눈을 번쩍 뜨자 유리나가 흠칫했다.
“게른님.”
“네.”
미안한 마음에 게른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유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네?”
“제가 거절한다면 말이에요.”
거절이라, 진의 머릿속에 거절은 없을 텐데 어떻게 하죠? 게른은 그 말을 꾹 참고 유리아를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거절하면 유리아와 자신 모두 불행해질 것이다.
“진을 가르칠 생각이 아예 없으신가요?”
진이라는 이름이 어색했는지, 유리아가 그의 질문에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불안한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무래도 황제시잖아요. 저는 이민족에, 지금은 아니지만 노예였죠. 제가 어떻게 감히…….”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시는 분이에요.”
“모르는 일이죠.”
유리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의 태도에 그녀도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귀족에 대한 불신이 큰 듯했다. 게른은 이해했다. 그녀가 온 다림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그녀가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나가 아닌 그 누구더라도 그랬을 게 분명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유리나를 보던 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돌아가서 그를 만날 생각을 하니 몸서리쳐졌다. 그 귀엽던 꼬마가 언제 이렇게 자라버린 걸까.
“리벨린은 다림과 다릅니다.”
“게른님은 그렇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느낀 건 달라요.”
게른이 놀란 눈으로 유리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유리나의 큰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게른은 자신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귀족들은 제가 노예였던걸 어떻게 아는지, 시선이 달라요.”
게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나는 말을 잇기가 힘들어 보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울음을 참아서인지 목소리가 메어있었다.
“차갑죠. 아주 차가워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저를 보는 황제께서도 나중에 그렇게 바뀔까 두려워요.”
유리나의 진심 어린 말이 게른의 심장에 쿡쿡 박혀 들어왔다. 그는 노예였던 적이 없었지만, 서열이 한참 뒤인 진을 보살피고 있을 때 비슷한 시선을 많이 받아보았다. 게른은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는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저를 믿어주셨으면 해요.”
유리나가 대답하지 않자 게른이 달래듯 말했다.
“내일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고민해보도록 해요. 늦었지만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데려간 건 사과하겠습니다.”
게른이 고개를 숙이자 유리아가 손사래 쳤다. 이렇게 고개를 많이 숙인 날은 처음이다. 유리나도 아마 이런 귀족은 처음 봤겠지. 게른은 뻐근한 뒷목을 세게 주물렀다.
“아니에요. 게른님.”
유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행히 아까보단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그녀에게는 믿음이 필요했다. 내일 아침 일찍 여관에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도착했는지 마차가 덜컹하고 멈췄다.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이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가 들려오니 유리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여기가 자신이 있을 곳이었다. 유리나를 여관 앞까지 데려다준 게른은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마차를 타고 떠났다. 유리나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관에 들어가자 분홍색 앞치마를 한 제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몇 달을 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유리나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제스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그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알았더라면 자신을 보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왜 혼자와? 게른은?”
“바로 떠나셨어요.”
“어때? 학생은 잘 만나고 왔어?”
제스가 물을 내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유리나는 물 한 컵을 빠르게 비워내고는 테이블에 내려놨다.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이 그녀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아마 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기서 물도 안주더냐?”
제스는 빈 잔에 물을 따르고는 걸걸한 목소리로 버럭 화를 냈다. 그의 얼굴이 앞치마보다 더 붉어졌다. 유리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물을 달라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는걸요. 아저씨. 자신의 턱을 들어 올리던 그의 차가운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유리나가 몸서리치자 제스는 여관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럼 무슨 일이야! 게른 이 자식이…….”
그가 소리를 지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다행히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스는 조금 다혈질인 편이었다.
“그분은 잘못한 거 없어요.”
“나한테 안 오고 바로 떠난 거 보면 분명 찔리는 구석이 있는 거야.”
제스가 문밖을 쳐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내일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게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그를 걱정할 때가 아니지.
“뭐가 문제야 이 아가씨야. 말을 해야 알지. 또 생각에 빠져있구먼.”
유리나가 입을 열지 않자, 제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말을 하면 뭐가 달라질까.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유리나는 다시 물 한잔을 비우고는 일어났다.
“오늘 레슨 내일로 미뤄도 될까요?”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뒤 한 번도 레슨을 미룬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중얼거리며 게른을 욕하고 있던 제스가 놀란 눈으로 유리나를 봤다.
“죄송해요. 아저씨.”
“아냐. 애들이야 뭐 나가서 놀라고 하지.”
제스는 평소와 다른 유리나가 걱정되었는지 앞치마를 벗고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저녁 먹을 때쯤 깨워줄까?”
“아뇨. 생각 없어요.”
“안 돼. 이렇게 힘이 없어야. 오늘 저녁은 보양식이다.”
제스가 거절할 게 뻔한 유리나의 대답을 듣기 싫다는 듯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게 웃음이 터졌다.
304호, 이곳이 유리나의 공간이었다. 몸을 겨우 누일 수 있을 정도인 작은 나무 침대, 조금 시든 프리지어 화병이 놓인 낡은 작은 탁자. 한쪽 다리가 짧은 의자와 악보가 쌓여있는 책상.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물먹은 나무 냄새가 올라왔다. 긴장이 서서히 풀리고 마음이 편해졌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갔다. 삐걱, 하고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얇은 커튼이 햇빛을 막아주지 못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했다. 자고 일어나면 그를 만났던 게 꿈이기를 빌었다. 만약 그게 꿈이었다면, 아마 흔쾌히 수락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바라보던 진의 눈이 아른거렸다.
*
궁으로 돌아간 게른은 빠르게 집무실로 향했다. 지나가던 귀족들이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게른의 고개는 더 이상 숙여지지 않았다. 자기 전에 마사지라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게른이 노크하자 안에서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났다. 진은 항상 문을 잠가두고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왕궁의 공간과는 다르게 집무실은 평범한 편이었다. 4인용 테이블과 브라운 소파. 독수리가 수놓아진 양탄자.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책장. 조금 오래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가치 있어 보이는 책상이 전부였다. 방 안의 가구는 대부분 진의 취향이었으나 양탄자만은 달랐다. 진은 독수리를 진절머리나게 싫어했다. 하지만 최소 한 가지는 왕실의 상징이 있는 물건을 두어야 한다는 게른의 잔소리에 겨우 놓은 게 저 양탄자였다.
“어떻게 됐어?”
진이 서류에 사인 하며 물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생각해보겠답니다.”
“협박이라도 한 건 아니지?”
진이 새삼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한건 협박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게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협박 같은 걸 할 리가 있습니까?”
“흐음.”
진이 의심스럽다는 듯 한쪽 눈썹 올렸다.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눈썹이 평소보다 더 얄미워 보였다.
“다림이라고 했던가?”
진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네. 몇 달 전 다림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다림, 노예사냥 하는 나라 아닌가?”
진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게른도 덩달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 날 리벨린으로 도망쳐 온 듯합니다.”
그날, 1년에 한 번씩 다림에서는 끔찍한 행사가 열렸다. 게른은 끔찍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림의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행사였다. 노예들을 숲에 풀어두고 동물을 사냥하듯, 그들을 쫓는다. 더 많이 죽이는 사람이 승리하는. 같은 인간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추악한 행위였다. 다림에는 그만큼 노예가 많았다. 노예가 부족하면 다른 나라를 약탈해 노예를 끌고 올 만큼 강한 나라였다. 리벨린의 국민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진은 유리나가 다림에서 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게른은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다림은 아직도 굳건하지?”
“리벨린 보다는 약하지만,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진이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림은 보통 작고 약한 나라를 공격했지만, 힘을 키워 리벨린을 공격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어디서 묵고 있지?”
“중앙여관입니다.”
“제스는 잘 있지? 그 분홍 앞치마는 여전한가?”
게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스를 떠올리고 있는지, 심각했던 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더니 펜을 내려놓고 게른을 보며, 결심했다는 듯 내뱉었다.
“아무래도 선생님을 만나러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