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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벨린의 노래
작가 : 아리움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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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첫 번째 레슨 (1)
작성일 : 17-11-22     조회 : 265     추천 : 0     분량 : 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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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첫 번째 레슨 (1)

 

 토마토 수프라. 진은 한 번도 토마토로 수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뜨거운 토마토라니. 뜨겁고 물컹한 식감을 상상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근데 유리나가 그걸 먹고 싶어 했단 말이지. 진은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올려둔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침 식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진이 의자에 앉기를 기다리고 있던 게른이 물었다.

 “뜨거운 토마토.”

 “아직도 토마토 생각입니까?”

 게른이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의 시선은 벽에 걸린 독수리 모형에 향해 있었다.

 “토마토 수프 먹어본 적 있어?”

 게른이 고개를 저었다. 리벨린에서 토마토는 보통 빵 사이에 끼워 먹거나 샐러드를 만들 때 넣었다.

 “다림에서 본 적은 있습니다. 커다란 솥에 다홍빛 액체가 끓고 있기에 물어보니 토마토라고 하더군요.”

 “그렇군.”

 유리나에게 수프를 끓여주기 위해 토마토가 필요하다던 제스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허락도 없이 밤에 와서 토마토를 따다니 그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제스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게른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 감옥에 가둬두나? 무슨 죄로?”

 “앞으로도 필요하면 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무 다 받아주지 마세요.”

 “설마 질투하는 거야? 괜찮으니까 자네도 맘대로 먹으라고.”

 게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됐습니다. 드세요. 다 식겠습니다.”

 게른의 말에 진이 벌떡 일어나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한입 크기로 썰어진 빵, 상큼한 향이 나는 샐러드와 얇게 썰어진 고기와 으깬 감자가 올라와 있었다. 진은 꼭 먹을 만큼만 식탁에 올리게 하는 편이었다. 궁 밖에는 빵 한 조각으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 많았다. 그마저도 없어서 굶는 사람도 있었다.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어디서나 굶어 죽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진은 접시 위에 음식이 남을 때마다 그들을 떠올렸다. 그가 파티 같은 걸 싫어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진이 음식을 입에 넣자 게른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이 아침을 다 먹지 않으면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남자다. 그는 진이 이렇게 잘 큰 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세끼를 잘 챙겨 먹였기 때문이라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기껏해야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어른처럼 구는 그가 가끔 못마땅했지만, 자신을 버리지 않고 곁에 있어준 그였기에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 5년 전만 해도 이렇게 편하게 아침을 맞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진은 식기에 정교하게 새겨진 독수리 문양을 뚫어져라 봤다. 이것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올라왔는지, 독수리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고마워. 게른.”

 게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진을 쳐다보았다.

 “뜬금없이 왜 그러십니까?”

 그런 게른의 반응에 진이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새 자신이 게른을 괴롭히고 있나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 고맙다는데.”

 “그런 말 잘 안 하시니까요.”

 “앞으로 자주 말해줘야겠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이 게른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제가 더 고마워할 게 많으니까요.”

 진이 씨익 웃으며 게른의 어깨를 툭 쳤다. 문득 오랜만에 맞는 편안한 아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레슨 날이었던가?”

 “용케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어쩐지 기분이 좋더라니.”

 진이 흥얼거리자 게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내년엔 노래할 수 있겠지?”

 “누가요?”

 게른이 진의 반짝거리는 눈을 모른 척 외면하며 말했다.

 “나 말이야.”

 진이 대답 없이 접시를 치우려는 게른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네는 날 믿어줘야지.”

 “제가 좀 현실적인 사람인지라.”

 “선생님한테도 물어봐야겠어.”

 “당연히 될 거라고 하시겠죠. 선생님은.”

 “그지? 좋은 사람이야.”

 유리나의 목소리가 진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다시 듣고 싶었다. 진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늦으면 다른 존재에게 뺏기고 만다. 친구도 동생도, 어머니도 그렇게 진의 곁을 떠났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으신 것 같네요.”

 “아, 그런가? 좀 쉬어볼까.”

 진을 쳐다보는 게른의 시선이 따가웠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무엇보다도 곧 진의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 준비를 본인이 해야 한다니, 몇 년째 해왔지만 이상한 일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주변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뭔가를 보내왔다. 생일이 뭐라고 파티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잘 보일 수 있을지 궁리를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런 일을 1년에 한 번씩 겪어야 하는 건 끔찍했다. 물론 황제의 생일에 노예사냥을 하는 다림보다는 나았지만 말이다.

 “생일파티 같은 건 좀 대충하면 안 돼?”

 “시종장이 반대할 겁니다.”

 “황제는 난데?”

 게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서 말해보세요.”

 진이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시종장이 유일했다. 그는 말보단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편이었고. 그를 보면 어머니가 떠올랐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진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생일도 아닌데 말이지.”

 게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빈 접시를 챙겨 방을 나갔다. 이 이야기를 피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진은 태어난 날짜를 몰랐다. 어머니는 출산 당시 혼자였고, 그를 낳자마자 혼절했기에 날짜를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며칠이 지나고 난 뒤였다. 그때 도와준 사람이 윗집에 살던 게른의 어머니였다.

 진의 가짜 생일은 그가 궁에 처음 오게 된 날 만들어졌다. 언제 태어났는지 묻는 황제에게 진은 오늘이라 답했다. 탐욕스럽게 늘어진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진이 황제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던 날이었다.

 

  *

 

 유리나는 부엌 안쪽에 놓인 토마토 바구니를 발견했다. 다림에서 나는 것보단 조금 길쭉했지만, 토마토가 맞았다. 냄비 앞에 선 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설마…….”

 “이거 우유를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 거야? 원래 무슨 맛인지 모르니 만들기가 어렵네.”

 솥 안에는 으깨진 토마토가 걸쭉하게 끓고 있었다. 유리나가 한입 맛보고는 옆에 있는 우유를 조금 부었다. 빨갛던 색이 조금 연해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국자로 몇 번 휘저은 뒤 다시 맛을 보았다. 유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띠어졌다. 이 맛을 그리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향수병 같은 게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스도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맛이구나. 아침에 가볍게 먹기 좋겠어.”

 “근데 왜 이렇게 많이 끓이셨어요.”

 “내가 손이 좀 커야 말이지. 뭐 오는 사람마다 나눠주지 뭐.”

 제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자신이 가진 건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었다. 유리나가 제스를 믿고 따르는 이유였다. 어떠한 의심 없이, 사람을 믿고 도왔다. 자신도 언젠가 그처럼 되기를 바랐다. 사람, 특히 귀족을 의심하는 습관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반응이 좋으면 고정메뉴로 밀어봐야겠어.”

 “토마토는 어디서 구하시게요?”

 “뭐 농장에서 따오면 되지.”

 제스는 본인의 농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뭐 어때. 어차피 쓸데도 없는 토마토인걸.”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스가 덧붙였다.

 “황제도 그냥 사람이야.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화를 내도 되고 부탁이 있으면 해도 돼.”

 유리나가 당황하며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무리 그래도…….”

 “둘이 나이도 같을걸? 그냥 친구라고 생각해.”

 우리와 같은 사람, 친구. 누구는 황제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누구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라는 사회에서 과연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유리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자 게른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믿어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해볼게요.”

 유리나의 말에 제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

 

 가방에 초급용 악보 몇 개와 노트, 제스가 전에 선물했던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펜을 넣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게른이 데리러 올까? 설마 황제가 직접 오는 건 아니겠지.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곤 그의 두 눈뿐이었다. 그렇게 선명하고 빛나는 눈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다. 아마도 그 눈에 홀린 것 같았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할 것 같은 그 눈에 말이다.

 발성 연습을 하려면 몸에 손을 대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불편했다. 홧김에 레슨을 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가 가르치더라도 그랬겠지 싶었지만 말이다. 리벨린 황제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나라가 망한다.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예언이었다. 황제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리벨린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라였다. 이곳이 멸망한다면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계속 한숨만 나오는 날들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 위에 놓인 프리지어를 보며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 궁 안에 정원이 있다면 그 곳을 구경하고 싶었다.

 저번에 타고 온 것과 비슷한 마차가 여관 앞에 섰다. 익숙한 모습의 게른이 마차에서 내렸다. 유리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음식을 서빙 하느라 바쁜 제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여관 밖으로 나갔다.

 “아침은 드셨나요?”

 밤을 새웠는지 게른의 눈이 퀭해 보였다.

 “네. 게른님은요?”

 게른이 고개를 젓자 유리나가 말했다.

 “아, 시간 괜찮으시면 안에 들어가서 드세요. 아저씨가 수프를 많이 끓여놔서요.”

 “그것 때문에 입맛이 없습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게른이 여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 자식이 문제죠. 저는 괜찮으니 출발합시다.”

 

  *

 

 진은 유리나를 기다리며 목을 풀고 있었다.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건 오랜만이었다. 5년 전 그날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날은 즐거웠다. 물론 제사가 끝난 뒤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진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궁전의 가장 안쪽, 아무도 오지 않는, 아니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한 공간이었다. 유리나가 이곳을 잘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혹시 몰라 마중을 나가려던 참에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게른과 유리나였다. 유리나는 조금 당황한 듯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서 와요.”

 진이 유리나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유리나도 어색하지만 미소로 화답했다. 게른이 들어오려 하자 진이 막아섰다.

 “자네도 들어오게?”

 “안됩니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해? 이 친구 굳이 있을 필요 없잖아?”

 “게른님이 있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요.”

 진은 괜스레 질투가 났다. 자신은 불편해하면서 게른은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게른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들여보냈다.

 유리나는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가방에서 악보를 꺼냈다. 진은 그 뒤에 섰다. 그녀의 잿빛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한 거 먼저 해보실래요?”

 유리나가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에게 말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유리나의 손이 건반 위에 올려지고, 진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게른이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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