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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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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짧고도 강렬한
작성일 : 17-11-06     조회 : 552     추천 : 0     분량 : 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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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연애』.

 

 누가 지었는지 그야말로 기막힌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박 선배의 소개로 겨우 얻게 된 강의였다. 강의 하나 맡기도 어려운 초보 강사이다 보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삶과 연애’라니.

 

 “대학에서 그런 것까지 가르쳐?”

 

 강좌 이름을 들은 막내 고모 미련의 첫 반응이었다. 이번 학기도 겨우 백수 신세는 면했다는 안도감에 가장 먼저 그녀에게 알린 터였다.

 

 “소란이 네 전공이 사회학인데 연애랑 무슨 상관이냔 말이지.”

 “갖다 붙이기 나름이야. 더군다나 세부 전공이 여성학이니까 영 상관없는 것도 아니고.”

 “여성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왜 연애 나부랭이를 가르치냔 거지. 그런 걸 강의랍시고 만들어 놓은 학교도 참 웃기네. 나 학교 다닐 땐 그런 거 없었는데.”

 “고모랑 나랑 4년밖에 차이 안 나거든? 요즘엔 별의별 강의가 다 있어. 나 같은 시간 강사한텐 잘 된 일이지 뭐.”

 

 처음에는 소란도 뜨악했었다. 대학가 이색 강의에 대해 신문 기사로 접한 적은 있었지만 대놓고 진행하는 ‘연애’ 수업을 맡게 될 줄이야.

 

 “이번 학기는 그게 다야?”

 “응. 요즘 강의 자리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야. 알바 몇 개 더 하면 되니까 걱정 마.”

 “그러게 학부 졸업하고 그냥 취직하면 좋았을 걸. 공부는 뭐 하려고 더 해서 그 고생을 하냐? 멀쩡한 박사님이 알바는 또 뭐고…….”

 “그 알바가 어때서…….”

 

 기껏해야 4살 위인 고모이지만 잔소리 수준으로 봐서는 여느 친척 어른 못지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미련의 타박에 딱히 틀린 구석도 없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 했던가. 선택의 기로에서 언제나 후회만을 남기는 것도 소란의 운명이란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소란한 20대’가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뿐이었다.

 

 “근데 너 연말까지 방심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응, 알아.”

 “그 놈의 아홉수, 후딱 지나가버려야 할 텐데.”

 

 미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아홉수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요란했던지라 소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 놈의 집안이 오죽 물려줄 게 없으면 그딴 걸…….”

 

 미련의 푸념에 새삼 공감하는 소란 역시 지난 아홉수의 시간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

 

 멋모르던 9살 초딩 시절, 소란은 풋풋한 첫사랑에 빠졌더랬다.

 

 “다들 조용! 내일은 대청소가 있어요. 1조는…….”

 

 갑자기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분위기도 모른 채 소란은 짝꿍 규형과 투닥투닥 장난 중이었다. 볼수록 잘 생기고 멋진 녀석.

 

 “진소란! 누가 조회 시간에 장난치랬지? 뒤로 가서 손들고 서 있어.”

 

 깜짝 놀란 소란의 속쌍꺼풀이 일순간 도드라졌다. 쭈뼛쭈뼛 교실 뒤로 향하는데 갑작스레 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규형이 오른손을 번쩍 들자 선생님도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반장, 무슨 일이지?”

 “소란이만 장난친 거 아닙니다. 저도 같이 장난쳤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소란이랑 같이 벌 받겠습니다!”

 

 학급 반장인데다 매사에 모범적인 규형의 말이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그, 그랬니? 그럼 너도 뒤로 가서 손들고 서있어!”

 “네, 선생님.”

 

 규형이 소란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모습을 무엇에 빗댈 수 있을까. 날개를 숨긴 초딩 천사? 장미를 위로하는 순박한 어린왕자?

 

 소란은 자신과 나란히 선 그의 옆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부터였다. 소란의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소용돌이쳐대던 것은.

 

 “그 애가 그렇게 좋아?”

 “고모가 몰라서 그래. 걘 다른 애들이랑은 달라. 진짜 어른스럽고 멋있거든.”

 “그런 애들은 꼭 멀리 가버리던데.”

 “뭐, 멀리 간다고? 전학 같은 거? 규형이가 전학이라도 간다는 거야? 전학이라니 말도 안 돼.”

 

 소란의 첫 번째 아홉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학’이라는 입방정은 말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아쉽지만 우리 반 반장 한규형이 갑자기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됐어요. 그동안 반장으로 수고가 많았던 규형이에게 박수 한번 쳐주고 보내줍시다.”

 

 처음이었다. 야속함과 원망과 서러움이 복합된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던 것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소란의 마음을 전혀 몰랐던 걸까. 단 한번도 ‘전학’에 대해 언급한 적 없던 규형이 야속하기만 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규형이 원망스러웠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란 서러움이 치밀었다.

 

 “수원에서 서울까진 별로 먼 거리가 아니니까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메일이나 전화로도 연락할 수 있으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맙시다.”

 

 규형을 좋아하던 여자애들이 제법 많았기에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은 죽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았다. 시답잖은 여자애들의 무리에 끼고 싶지 않다는 묘한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소란은 끝끝내 ‘시답잖은’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규형이 책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둔 쪽지를 읽고 나서였다.

 

 『소란아, 안녕. 나 규형이야.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되었어.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나도 너 좋아해. 많이많이.』

 

 ***

 

 『이번 강의에서는 연애의 6가지 유형을 이론과 사례 중심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특히 우리 삶 속의 연애 문제를 사회학적, 심리학적, 여성학적 시각에서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유형별 사례는 조별 발표를 통해 함께 논의하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혹시 질문 있나요?』

 

 출석부를 훑어보니 교양 과목답게 각 학년 학생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남학생보다는 여학생의 비중이 좀 더 많아보였다.

 

 『다른 학교 강의안 보니까 구체적인 연애스킬에 대해서도 다룬다던데요. 이 수업에선 그런 게 없나요?』

 

 강의안을 준비하면서 타 학교의 유사 강좌를 살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스킨십이나 데이트 스킬, 심지어는 성생활 체위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커리큘럼도 꽤 포함되어 있었다.

 

 소란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상아탑 안에서 다루는 ‘연애학’이니만큼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논제를 갖춰야 한다는 게 소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정량의 수강생 확보와 강의 평가라는 실리적인 측면도 외면할 수 없었다. 아…… 이상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는 어디서나 피해가기 힘들구나.

 

 『네. 저희 강의에서도 사례 연구 시간에 구체적인 스킬을 다룰 예정입니다. 그에 앞서 이론적인 측면을 다룰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보다 심층적으로 삶 속의 연애를 살펴볼 수 있겠지요.』

 

 시간강사 2학기차. 지난 학기 강의 평가 점수가 생각보다 낮게 나와 학과장실에 불려갔던 기억이 스쳤다.

 

 “요즘 대학에선 학생들이 갑이에요. 걔네들이 강의 평가 점수를 낮게 주면 강사가 아웃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수 연봉까지 좌지우지한다니까요. 진 선생도 좀 더 분발하셔야 될 겁니다.”

 

 대학 강사나 교수가 되면 적어도 숫자에 목을 매는 ‘을’의 신세는 면할 줄 알았다.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때만 해도 나름의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가진 건 없어도 성실함을 통해 메울 수 있는 ‘을’의 삶도 분명 존재할 거라는 청사진.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추레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 감시 카메라를 겨누고, 그 속의 ‘을’들은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다.

 

 『학점은 어떤 기준으로 주시나요?』

 

 실리적인 고민은 학생들도 피해가지 않았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와 조별 사례 발표 점수로 채점하겠습니다.』

 『가상 연애나 사례의 진정성에 따른 가산점도 있나요?』

 

 가상 연애? 사례의 진정성? 대체 저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걸까.

 

 『한번 고려해보겠습니다.』

 

 고려는 무슨 고려. 학과장의 마지막 말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

 

 “한마디로 학생들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는 겁니다. 강사로서 책잡힐 만한 언사는 가급적 피하시는 게 좋고요.”

 

 소란은 시간 강사였다. 학생들에게도 교수들에게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항상 애매한 ‘을’이란 존재.

 

 ***

 

 “난 에로스형이 제일 맘에 든다.”

 

 소란이 강의를 맡은 P대학은 안일이 근무하는 B대학과 지척이었다.

 

 “에로스형? 너하곤 영 안 어울리는데.”

 “네가 날 친구로만 봐서 잘 모르는 거야. 귀찮아서 연애를 안 한다 뿐이지 했다 하면 얼마나 정열적인데.”

 

 무안일. 소란과 대학 동기이자 어쩌다 절친이 돼버린 녀석이었다. 요즘 말로 남사친 정도랄까.

 

 안일은 외조부가 설립한 경기도의 한 사립대학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그의 인생관은 ‘무사안일’. 하루하루가 무탈하면 그걸로 족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면에서 대학 행정직은 그의 인생관에 안성맞춤인 직업임에 틀림없었다.

 

 “귀차니즘인 네가 정열적이라고? 정열도 부지런해야 가능한 거거든? 에로스형은 첫눈에 반한 사람한테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는 타입이야. 근데 네가?”

 “정열,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에로스형의 맹점이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한다는 거야. 너무 활활 타오르니까 쉽게 꺼지는 거지. 그러고 보니 너랑 맞는 거 하나는 있네. 연애 기간이 짧다는 거 말이야.”

 

 소란이 연속타를 날리며 깐죽거리자 안일도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그때 누군가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는 이내 안일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 주임님, 안녕하세요.”

 “어, 북마켓 최 본부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출판부 회의가 있어서요. 얼마 전에 부서 옮기셨다면서요. 계속 얼굴 볼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소란은 코와 입을 머그컵으로 가린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중이었다. 그녀의 귀와 눈은 온통 비음 섞인 매력적인 중저음 보이스로 쏠렸다.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안일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 여긴 제 대학 동기 진소란 씨에요. 저랑은 둘도 없는 절친이고 직업은 대학 강사.”

 “반갑습니다. 최변수라고 합니다. 여기 명함…….”

 

 명함을 건네던 그의 손이 소란의 손끝을 살짝 스쳐갔다. 두 사람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이 느낌은 뭐지? 이 강렬한 눈빛은?

 

 

 《사랑은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계속 주시하려는 눈을 갖고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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