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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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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화. 우연일까 인연일까
작성일 : 17-11-07     조회 : 340     추천 : 0     분량 : 5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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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해볼래?”

 “이번 학기엔 강의도 하나밖에 없어서 시간 많아. 이런 거라면 몇 개라도 더 할 수 있어.”

 

 1년 전 왕십리 인근에 댄스 학원을 연 다정은 소란에게 꾸준히 알바 자리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친구. 6살 때 시작한 발레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달은 건 그녀가 대학에 들어간 뒤였다. 녹록치 않은 살림에 열심히 뒷바라지해온 그녀의 엄마가 의절을 선언한 것도 어쩌면 예견된 반응이었다.

 

 “엄마랑은 아직도 연락 안 해?”

 “그렇지 뭐.”

 “수원 집에 가면 나라도 꼭 찾아뵐게.”

 “그러든지 말든지.”

 

 의절한 엄마를 제외하면 그녀의 인간관계망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다정이 지나쳐 오지랖의 끝판왕인 그녀는 무용계와 대중문화계, 교육계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학원이 지리적인 단점을 극복하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학교보단 기업체 쪽이 페이도 훨씬 세니까 할 만할 거야. 명색이 대학 강사인데 초딩들 방과 후 수업이나 봐주고 있으면 안 되지.”

 “아냐, 난 상관없어. 근데 요즘은 기업에서도 댄스를 배워?”

 “강사들 초빙해서 직원들 취미생활도 시켜주나 봐. 복지 차원에서 말이야.”

 “아무튼 나야 좋지 뭐.”

 

 해맑게 웃어 보이긴 했지만 가슴 한구석은 시큰했다. 단짝 친구 다정이 춤추는 모습이 좋아 보여 취미로 시작한 댄스였지만 어디까지나 ‘취미’로 놔두고 싶었다. 재능이 남다른 건 아니었지만 취미로만 삼는다면 꽤 수준급인 실력이었다.

 

 대학 때는 다정의 소개로 아이돌 안무 보조나 댄스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꽤 쏠쏠한 용돈 벌이가 돼주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알바 수준. 지금처럼 변변찮은 강사 월급을 보충해주는 주요 수입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취미는 그저 취미일 때만 순수할 수 있다. 그것이 수입과 연계되고 직업이 되면 그 ‘순수함’에 반드시 흠집이 나고야 만다. 소란은 그런 현실이 돼가는 게 가슴 아팠다.

 

 “나 따라 댄스 배우면서 재밌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네가 스물아홉까지 이걸로 먹고 살 줄은 몰랐네. 그러니까 얼른 학교에 자리 잡으란 말이야. 박사학위는 뒀다가 뭐 할래?”

 “그러게. 나도 바라는 바야.”

 

 다정은 대화중에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스트레칭을 하고 고개를 까딱거리기 일쑤였다.

 

 “근데 넌 금방 강남에 빌딩 사겠다. 처음 차릴 때만 해도 이렇게 잘 될 줄 몰랐는데.”

 “내 말이…… 큰 욕심 없이 근근이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케이팝이다 뭐다 해서 요즘 이쪽에 관심들이 많잖아. 운이 좋았지.”

 “이게 다 네 마당발 덕이지 뭐.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가 몇 개라고?”

 “3000개는 넘을 걸.”

 

 3000명이 넘는 인간관계망. 다정의 여왕다운 네트워크였다. 나의 휴대폰에는 몇 명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을까. 100명은 되려나?

 

 “주로 책을 다루는 회사니까 절대적으로 운동량이 부족하대. 재즈댄스 위주로 하면서 살짝 살짝 걸 그룹 댄스도 넣어주면 좋아할 거야. 안무 짤 때 참고해.”

 “그래, 알았어. 근데 회사 이름이 뭐라고?”

 

 갑자기 초등학교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재잘대는 아이들 소리에 다정의 대답이 파묻히고 말았다. 일단 회사 주소만 알아도 되겠지. 소란은 다정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총총히 학원을 나섰다.

 

 ***

 

 변수는 책상 서랍에서 두터운 명함집을 꺼내들었다. B대학 무안일 주임의 명함이 어디 있더라.

 

 무안일의 절친이라던 진소란. 잠깐이었지만 변수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최 본부장님, 2시 편집회의요.”

 

 송 실장의 등장에 깜짝 놀란 변수는 무언가를 들킨 듯 더듬대며 말했다.

 

 “과, 과학 쪽 신간 리뷰 아직 안 올라왔던데. 담당 MD가 누구였죠?”

 “아, 과학 쪽이면 강연연 씨요.”

 “음, 하필이면…….”

 

 변수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연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송 실장이 곧장 말을 이었다.

 

 “연락해서 바로 올리라고 할까요?”

 “아니에요, 됐어요.”

 

 연연을 처음 만난 건 그녀가 대학 1학년 때. 이른 결혼이 집안 내력인지라 등 떠밀려 나간 맞선 자리에서 변수는 그녀의 당돌함에 몹시도 당황했던 기억이 났다.

 

 “변수 씨 마음에 들어요. 우리 사귀면 어때요?”

 “그래도 첫 만남인데 그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는 게 정확히 뭐죠? 어차피 맞선이란 게 목적 지향적이잖아요. 아시다시피 목적은 딱 한 가지뿐이고.”

 

 첫 만남에 사귀자는 말을, 그것도 여자에게 먼저 듣고 보니 기분이 묘했다. 더구나 스물을 갓 넘긴 연연의 입에서 나오는 세속적인 언사가 곱게 다가오진 않았다.

 

 ‘목적 불일치’로 우리는 더 이상 얼굴 볼 일이 없었다. 적어도 지난 연말까지는 그랬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그녀를 보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국문학도였던 그녀로서는 온라인서점 회사가 몇몇 선택지 중 하나였겠다 싶었다.

 

 “강연연 씨는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오게 됐어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서요.”

 

 회식 자리에서 입사 동기를 묻는 최 팀장의 질문에 그녀는 아리송한 답을 내놓았다.

 

 “두 마리 토끼라뇨?”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요.”

 

 신입사원의 당돌함에 모두들 키득거렸다. 단 한 사람, 변수만 빼고 말이다. 그녀의 두 마리 토끼에 자신이 포함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 변수는 그때부터 그녀의 동정을 살피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회사에 다니나 봐요?”

 “네.”

 “어머머. 연연 씨, 그거 정말이야? 혹시 연연 씨가 채인 거야? 그 남자한테 복수라도 하려고?”

 

 사람들의 궁금증은 날개를 단 듯 추측과 망상을 오르내렸다.

 

 “글쎄요. 그 사람 하는 거 봐서요.”

 “와, 연연 씨 정말 대단해!”

 “역시 요즘 여자들은 무섭다니까.”

 “강연연 씨의 일과 사랑을 위하여!”

 

 변수는 첫 만남에서 느꼈던 난감한 기운이 또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감지했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에 스트레스 하나를 더하는 것뿐이야. 변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해 보았다.

 

 ***

 

 『이번 시간에는 에로스형, 즉 미적 사랑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미적 사랑이란 명칭에 걸맞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생각하는 유형이죠.』

 

 아홉수마다 사랑이 엇나갔던 경험은 소란의 뇌로부터 사랑에 대한 현실감을 앗아갔다. 사랑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에로스형은 현재의 소란에게도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었다.

 

 『상대방에게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몰입을 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기도 합니다. 순식간에 온몸을 불사르며 타오르다 보니 쉽게 꺼지기도 하죠.』

 『육체관계를 쉽게 맺는다는 것도 에로스형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예리하고도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남학생에게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까.

 

 『남녀 간의 사랑에서 육체관계란 양날의 검이 수 있겠죠. 그 부분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장점이냐 단점이냐 하는 이분법적 판단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녀석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예상했던 진부한 답변이라는 반응.

 

 『이런 연애도 에로스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 수줍게 말을 꺼냈다.

 

 『첫눈에 반해 서너 번 만남을 가져요. 만날 때마다 득달같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지요.』

 

 ‘득달같이’라는 적나라한 표현에 강의실이 술렁였다. 피식피식 웃는 이들도 있었고, 질문하는 여학생을 힐끔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예요. 그렇게 몇 번 만나고 나면 금방 시들해져요. 공유하는 거라곤 육체밖에 없는데도 서로에게 모든 것을 몰입하는 에로스형에 해당할까요?』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돼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서로에게 끌렸다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죠. 제 생각엔 그것도 몰입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복학생 같아 보이는 뒷자리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섹스 중독자도 에로스형인가요?』

 

 강의실이 또 한번 술렁였다. 아…… 애당초 이 강의를 맡는 게 아니었다.

 

 『본 강의에서 연애를 유형별로 살펴보는 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이들의 삶 속 사랑을 알기 쉽게 공부해 보기 위함입니다. 병리적인 형태는 논외로 치도록 하죠.』

 

 모든 게 애매했다. 소란이 공부한 사회회적 시각도, 여성학적 시각도 ‘연애’라는 오묘한 인간 행위에 녹여내기 어려웠다. 자신 같은 초짜가 이런 강의를 맡기에는 역부족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에도 결국엔 후회로 얼룩지는 선택을 하고 만 걸까.

 

 ***

 

 “저번에 부탁한 책이야.”

 “역시 우리 고모밖에 없어.”

 

 미련의 서점에서는 웬만한 희귀한 책들도 구해볼 수 있었다. 성수동 뒷길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네서점은 소란에게 보물 창고나 매한가지였다. 물론 서점주인 미련에게도 그런지는 미지수.

 

 “자리 잡기가 쉽지만은 않네. 여차하면 때려치우고 다시 스피치 강사나 할까?”

 “아홉수가 스물아홉으로 끝나진 않잖아. 서른아홉, 마흔아홉…….”

 “그래, 그래. 말 안 해도 알아. 그래도 난 입을 놀려서 먹고 살아야 신나는데.”

 

 미련은 지난 아홉수를 호되게 치르고 난 뒤 힘들게 쌓아온 스피치 강사로서의 커리어를 과감히 포기했다. 당시 미련의 큰오빠이자 소란의 아빠인 명중은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집안에서 태어난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야. 애당초 말로 먹고 사는 일은 시작조차 하면 안 되는 거였어.”

 

 미련과 명중의 나이차는 무려 21년. 늦둥이 미련을 낳고 나란히 저 세상으로 떠난 부모를 대신해 미련을 키우다시피 한 아빠 같은 오빠였다. 미련은 ‘미련 없이’ 커리어를 포기하고 동네서점 주인으로서의 고요한 삶에 안착했다.

 

 “스물아홉 살 때 남친 사업에 입방정만 안 떨었어도…… 그랬으면 지금쯤 결혼도 하고 일도 잘 풀렸을 텐데.”

 “됐어. 후회해봐야 뭐 해? 고모 이름처럼 미련만 남을 뿐이지.”

 “우리 조카님이 위로를 다 해주네.”

 “고모가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은데, 우리 네 살밖에 차이 안 나거든?”

 

 띠리링. 출입문에 달아놓은 종이 누군가의 등장을 알리며 울렸다.

 

 “어머, 최 본부장님이랑 김 대리님이시네. 오늘 오시기로 했었나요?”

 “아니에요, 그냥 들른 거예요. 저도 여기 단골이잖아요.”

 

 어디선가 들었던 낯익은 음성. 등지고 앉아있던 소란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비음 섞인 중저음 보이스, 부드럽게 쳐진 눈매에 감싸인 강렬한 눈빛. 아…… 저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무 주임님 친구분 아니세요?”

 

 그와의 두 번째 우연. 이것은 우연일까, 인연일까.

 

 《인간은 인연으로 엮어 만든 하나의 매듭, 망, 그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인연들뿐이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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