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키워드가 다르다고?”
“응. 각자 저주 키워드가 다른 거지.”
미련은 갓 내린 커피를 소란의 머그컵에 천천히 따랐다. 들을수록 오묘하면서도 으스스한 내력이었다.
“내 키워드는 아무래도 ‘부도’나 ‘파산’ 같아. 아홉 살 땐 네 아빠 공장에다 대고 ‘부도’란 말을 입에 올렸다가 그 꼴이 났잖아. 어린 게 어디서 주워들은 걸 무심코 뱉었는데 그게 진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열아홉 살엔?”
“너 생각 안 나? 몇 년 동안 말도 못하고 짝사랑했던 교회 오빠 있었잖아. 부동산 임대업 하던 그 오빠네 집을 두고 누군가 ‘파산’이란 말을 입에 올렸는데 나도 모르게 그걸 옮겼지 뭐야. 결과는 진짜 비참했지. 그 오빠넨 완전히 파산하고 도망치듯 파라과이로 이민 가버렸잖아.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소란네 집안의 저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걸까. 상황은 이미 결정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던 걸까. 소란은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이 저주가 야속하기만 했다.
“다른 키워드는 또 뭐가 있는데?”
조선 개국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승승장구하던 소란네 선조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개국의 정당성에 대한 입방정으로 태종과 기득권 세력의 눈 밖에 나는 통에 평생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입방정 나이는 서른아홉.
또 다른 사례도 있었다. 고려 성종과 절친 관계였던 29세의 선조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결정적인 입방정 하나로 처형에까지 처해졌다.
“그러니까 선조들은 정치적 키워드였던 거네?”
“역사에 기록된 게 별로 없으니까 우리가 다 알 순 없겠지. 어쨌든 사람마다 키워드가 달랐던 건 확실해.”
“난 어떨까?”
‘전학’의 입방정으로 떠나간 아홉 살 첫사랑 규형, ‘지조’의 저주에 날아가 버린 열아홉의 사랑. 그렇다면 소란의 키워드는 설마……?
“설마 이별은 아니겠지?”
“아마 그쯤 되겠지. 이미 두 번의 데이터가 있잖아.”
“음.”
소란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스물아홉 싱글인 지금, 이별할 일이 없으니 이번만큼은 저주를 피해갈 수 있을까.
“꽃 배달 왔습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배송원이 프리지아를 한아름 안고 서점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다른 배송원이 새하얀 안개꽃 다발을 들고 환히 웃었다. 세 번째 배송원이 새하얀 백합을 안은 채 들어섰을 때 소란과 미련은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시츄에이션은 뭐지?
『안녕하세요. 북마켓 최변수입니다. 진소란 씨 주소를 몰라 사일런스 서점으로 보냅니다. 지난번 뵈었을 때 거의 매일 고모님 서점에 들르신다는 말씀이 생각나서요. 프리지아는 진소란 님께, 안개꽃은 진미련 대표님께, 백합은 서점 진열용으로 보내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무언가에 홀린 듯한 이 기분은 뭐람. 세 번의 우연한 만남과 설렘, 그게 고작이었는데 ‘최변수’란 인물이 훅 밀려들어왔다. 단 한 번의 입질도 없이 미끼를 물어버린 대어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는 그렇게 예고도 없이 내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
화면 속 커서가 쉴 새 없이 깜빡였다. 변수는 더 이상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6개월째 일간지에 기고 중인 북 칼럼이 이렇게 버겁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왜 연락이 없지? 갑자기 받아서 너무 황당했나? 그래, 그건 아니었어!’
우연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느냐가 운명이라 했던가. 변수는 지난 세 번의 우연에 대해 정면 대응을 결심했다. 책, 공부, 일로만 점철됐던 모범 답안 같은 자신의 삶이 후회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빛’에서 시작된 범상치 않은 기운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진소란, 살아 움직이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
“무슨 일이시죠?”
송 실장을 찾기 위해 강당 문을 열었을 때 변수는 자신이 꿈을 꾸는 거라고 확신했다. 핫 핑크의 운동복 차림으로 상체를 꿀렁이고 있는 그녀가 정녕 소란이 맞던가? 변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깊은 숨을 들이쉰 후 살포시 눈을 떴을 때 또다시 그녀의 눈빛과 마주쳤다. 저 눈빛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야!
“무슨 일이세요?”
“아, 죄송합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회의 스케줄 때문에 송 실장과 상의해야 했지만 변수는 황급히 강당 문을 닫아버렸다.
“본부장님, 저 찾으러 오셨어요?”
눈치 빠른 송 실장이 수트 상의를 걸치며 뒤따라 나왔다.
“아, 네.”
“말씀을 하시지.”
“이달부터 진행하는 강습인가 보죠?”
“네. 댄스 강좌예요. 근데 강사 분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
송 실장이 귓속말하듯 소곤거렸다.
“마음에 든다니요?”
“엄청 상냥하고 친절하세요.”
“그런가요? 그게 다예요?”
“히히, 거기다 예쁘시기까지. 본부장님도 시간 되시면 같이 배우시죠.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기분인데요.”
“저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으신가 봐요?”
송 실장이 변수의 말을 외면하며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정말입니까?”
“뭐가요?”
“강사분이 그렇게 예쁩니까?”
***
『에로스형으로 분류되는 로맨틱한 연애 양상엔 어떤 게 있을까요?』
소란이 던진 질문에 갖가지 답변들이 쏟아졌다. 연인을 향한 다양한 이벤트, 연인의 다정한 말투와 몸짓, 데이트에서 느끼는 소소하고 짜릿한 낭만의 행위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사랑은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인생의 목적 중 가장 장엄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랑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 거겠죠. 때론 무모한 상황에서도 말이죠.』
『결국 모든 사랑의 종착점은 에로스 아닌가요?』
뿔테 안경을 쓴 단발머리 여학생이 냉소적인 말투로 물었다. 필경 서너 번쯤의 이별을 겪은 듯한 냉소였다.
『쇼펜하우어도 그걸 부정하진 않았죠. 고결한 정신적 사랑도 궁극엔 에로스를 향해 진행된다는 주장이었어요. 사랑은 인류의 종족 보존이란 화두와 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에로스형을 논할 때 늘 의견이 분분하곤 하죠.』
인류의 종족 보존 의지와 로맨틱한 사랑은 서로 병합될 수 있을까. 어쩌면 영원히 필연적인 평행 관계일까.
그가 보낸 노란 프리지아를 떠올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과 비음 섞인 중저음 보이스도 내 언저리를 맴돌았다.
“최 본부장?”
며칠 전 함께 수제 맥주집에 들른 안일은 변수에 대한 정보를 술술 풀어놓았다.
“전형적인 범생 스타일이지. 과학고 출신에다 서울대 수학과에 수석 입학하고 졸업 땐 전체 수석이었다지. 북마켓이랑 Q 포털사이트 창업주 차남이고. 장남이 망나니 과라 최 본부장이 착실히 경영 수업 중이래.”
무슨 스펙이 이리도 화려해? 소란은 갑자기 입 속이 헛헛해졌다. 비현실적인 사기 캐릭터를 눈으로 보는 건 소란 인생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거기다 섹시하면서도 선하게 쳐진 눈매와 매력적인 보이스는 그의 비현실성에 한몫을 더했다.
악착같이 노력해 이른 나이에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 출신이란 꼬리표는 여전했다.
“그렇게 조건 좋은 사람이면 여자관계도 복잡한 거 아닐까?”
“계획적으로 사는 게 인생철학이라 쓸데없는 일엔 시간이나 경제적 소모를 절대 안 한대. 너도 알다시피 연애란 게 좀 소모적인 일이냐?”
“그렇긴 하지.”
“근데 왜? 최 본부장이 갑자기 왜 궁금한 건데?”
안일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무언가를 캐내고 싶을 때 나오는 안일만의 의뭉스러운 눈빛.
“다정이 소개로 북마켓에서 댄스 수업 맡았거든. 궁금하길래 물어봤어.”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 왜 나한테 다정 씨 소개 안 해줘?”
“정말 그 이유를 몰라?”
“응, 몰라.”
안일은 대학 때부터 줄기차게 다정과의 소개팅을 채근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합만은 막아야 한다는 게 소란의 생각이었다.
“내가 우리 부모님 얘기했었지?”
“에너지 넘치는 액티브한 엄마와 집돌이 아빠?”
“응. 다정이랑 네가 사귀면 딱 그 그림이거든.”
“네 부모님이 어때서? 두 분 행복해 보이시던데”
불행하지 않다는 게 행복을 의미하는 걸까. 부모님의 모습은 소란이 이상적으로 그리는 결혼과 대척점에 위치해 있었다. 사랑하는 두 친구마저도 그 대척점에 놓고 싶지 않다는 게 소란의 생각이었다.
“안일아, 사랑하는 두 친구를 지켜주고 싶은 내 맘을 모르겠니?”
***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엔 지금까지 배운 웨이브 동작들을 합쳐서 음악과 함께 연습해보겠습니다.』
수강생들이 하나둘 강당을 빠져나갔다. 수트를 벗고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참석한 송 실장이 슬며시 소란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잠깐 시간 있으세요?”
“네?”
40대를 훌쩍 넘긴 중년 남자의 입에서 나온 ‘시간’이란 단어는 어쩐지 무게감이 달랐다.
“물어볼 거라도 있으세요?”
“아, 그게 아니고. 선생님을 잠깐 모셔오라는 분이 계셔서요.”
“저를요? 누가요?”
“가보시면 압니다.”
영문도 모른 채 소란은 쭈뼛거리며 송 실장을 따라갔다.
“안녕하세요, 진소란 씨.”
“아, 네.”
송 실장의 안내로 그녀가 들어선 곳은 변수의 사무실. ‘총괄 사업본부장 최 변수’라 쓰인 명패가 한눈에 들어왔다.
“연락이 없으셔서 제가 먼저 오시라고 부탁했습니다.”
꽃을 받고 난 후 소란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가 자신에게도 호감을 느낄 확률은 폭탄 맞을 확률만큼이나 작다지 않던가. 이 세상 숱한 사랑의 엇갈림도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안일을 통해 전해들은 변수에 관한 정보들은 소란에겐 비보나 다름없었다. 완벽한 조건을 가진 완벽주의 성향의 남자. 어쩐지 자신과는 맞지 않는 상대 같았다. 허당기 충만한데다 실수와 후회로 얼룩진 소란스런 자신을 삶을 돌아볼수록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래, 그 사람은 그냥 보기 좋은 ‘완벽한’ 남자일 뿐이야.
“보내주신 꽃은 감사히 받았어요. 제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마땅히 연락할 방법도 없고 해서…….”
연락할 방법은 지척에 널려있었다.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쳐진 눈매는 한껏 부드러움을 뽐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유난히 넓은 어깨 탓인지 훈훈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이 더욱 갸름해 보였다.
“보통 다른 남자였다면 이런 걸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죠?”
“네? 그렇다기보단…….”
‘거절’이란 단어를 듣자 소란은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다. 이 상황이 어서 지나가버리기를.
“하지만 전 아니에요. 저는 보통 남자가 아니거든요.”
《최대의 오만은 무엇인가? 자신만은 특별히 평가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믿는 차별주의자다– 프리드리히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