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사무실은 꽤 넓었다. 하지만 책들로 가득한 서가와 책장 탓에 여유 공간이 거의 없었다. 작은 도서관이라 할 만큼 책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방이 좀 정신없죠? 훑어봐야 할 책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니까 미처 정리할 틈이 없네요.”
“아니에요. 제가 꿈꾸는 사무실인데요.”
“어, 그래요?”
학위를 마치고 대학 강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건 책들이 그득한 교수 연구실. 소란은 교수 연구실을 지나칠 때마다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울에서 내 집을 장만하는 게 더 어려울까, 아니면 교수 연구실을 갖는 게 더 어려울까. 그녀에게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았다.
“수업 하느라 힘드셨죠? 이거 한잔 드세요. 과테말라 안티구아예요.”
커피향이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소란은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커피 애호가인 그녀가 얼마 전부터 푹 빠져있는 원두가 바로 과테말라 안티구아.
“이 커피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그런데.”
“연기가 타는 듯한 스모크 커피라서 묘한 매력을 주죠. 실은 지난번 무안일 주임이랑 같이 뵀을 때 이 커피 드시는 거 봤거든요.”
“네?”
소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짧은 만남에서 자신의 커피 취향을 파악했다는 얘긴가? 그녀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그걸……?”
“취미로 따둔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어요. 향만 스치면 원두 종류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랍니다.”
“아, 네. 대단하세요.”
완벽한 완벽주의자의 ‘완벽’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머그컵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소란은 연신 그를 흘낏거렸다.
“저것들은 뭐예요?”
“제 취미 중 하나예요. 필름 카메라를 수집하거든요.”
어지러운 서가 한편에 놓인 유리장에는 족히 스무 개는 돼 보이는 카메라들이 고이 진열되어 있었다. 고풍스럽고 육중한 느낌의 카메라들은 얼핏 보기에도 꽤 고가 같았다. 캐논, 니콘, 소니 등 익숙한 브랜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부와 책, 커피와 필름 카메라. 하나로 수렴되진 않지만 삶 자체가 지적이고 우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댄스 수업 재미있다고 다들 추천하더라고요. 근데 댄스 강사는 어떻게……?”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노력하고 애쓴 만큼 주어지는 소박한 자신의 삶이 부끄럽다고 여겨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소란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왜일까. 이 멋진 완벽남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시간 강사만으론 생계유지가 어렵거든요. 학위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강의도 별로 없고요. 댄스는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했었는데 이젠 꽤 든든한 수입원이 됐죠.”
“대단하시네요. 전 워낙 몸치라 춤 잘 추시는 분들이 항상 부러웠거든요.”
그의 눈은 선하게 웃고 있었다. 소란의 초라함 따위는 문제될 게 없다는 듯 한없이 다정한 미소.
“저랑 한번 만나 보실래요? 적어도 나쁜 남자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시구요.”
***
“정말? 그 남자가 사귀자고 했단 말이지?
“응. 근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어리벙벙해.”
“네 아홉수 저주가 이젠 기력이 쇠했나 보다. 걱정 말고 확 저질러.”
다정의 호들갑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 남자가 왜?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안다고? 어쩌면 그 남자의 등장 자체가 저주의 서막일 수 있었다. 걱정과 두려움이 설렘과 들뜸을 뛰어넘고 있었다.
“정말 만나 봐도 될까?”
“그게 고민할 일이야? 서로 호감 느낀데다 우연한 만남도 계속됐다며. 거기다 완벽한 매력남이기까지 한데 뭘 망설여?”
“그래도 아직 아홉수 안 지났잖아. 괜찮을까?”
“미리 걱정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마음을 고쳐먹어도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아홉수를 넘긴 때에 나타났다면 좋았을걸.
“정말 괜찮겠지?”
“괜찮고말고. 이 만남에 나도 한몫 했다는 거 알지? 그 회사 연결해준 게 나란 거 잊으면 안 된다.”
다정이 발레용 토슈즈를 신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오래 신었는지 여기저기가 너덜거렸다.
“발레 그만둔 지가 언젠데 왜 항상 토슈즈를 신어?”
“내 운명은 아녔지만 오래 해서 그런지 완전히 끈을 놓긴 싫더라고. 춤출 땐 토슈즈가 제일 편하기도 해.”
끝까지 함께할 운명은 아니어도 마지막 끈을 놓기 힘든 그 무엇,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주는 그 무엇. 그게 결국 운명이고 인연인 건 아닐까.
“이참에 너도 운명적인 사랑이라 생각해. 그렇게 만나기도 쉽지 않잖아. 운명이 뭐 별 거니?”
“나 그런 거 안 믿는 거 알잖아. 우리 집안 운명도 버겁다, 버거워.”
“조금만 더 버티면 스물아홉도 지나가잖아. 너희 집안 운명이란 것도 사실 별 거 아닌지도 몰라. 네가 그 저주의 맥을 끊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러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달려드는 저주를 피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괜찮을 거야. 그치?”
***
변수와의 데이트는 철두철미했다. 계획적인 삶을 선호한다는 그는 데이트 스케줄을 매번 엑셀 파일로 정리해 보내주곤 했다.
『수요일: 소란 씨 강의 끝난 후 상수동 북카페에서 휴식. 오후 5시 광화문 S 갤러리로 이동해 에셔 특별전 관람. 오후 7시 부암동 K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안 정식 저녁식사.』
그의 ‘계획’적인 데이트가 싫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꽤 매력적이었다. 자신과의 데이트를 위해 미리 숙고한 후 차분히 계획을 실행해가는 방식이 신선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그의 진정성과 성의에 매번 감격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한 사진을 봤어요. 어떤 야구선수가 경기를 막 끝낸 후 관중석에 있던 여자친구에게 키스하는 장면이죠. 그물을 사이에 두고 말이죠.”
“와, 정말 로맨틱하네요. 제가 알던 로맨틱 키스 그 이상인데요?”
“어떤 건데요?”
“영화 ‘위대한 유산’ 속 분수대 키스요. 물보라 속에서 풋풋하게 키스하는 모습에 엄청 설렜었죠.”
소란의 집 앞. 그의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벌써 한 시간째 대화중이었다.
“키스해도 될까요?”
“네? 그게…….”
질문은 있으되 대답은 필요 없었다. 변수의 다정함에는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그의 입술은 소란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소란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던 그 모습 그대로, 그의 입술은 순식간에 소란의 입술과 혀를 장악하고 말았다. 양 볼을 감싸 쥔 그의 다정한 손길은 소란에게 한없는 전율을 선사했다.
“그물 키스나 분수대 키스만큼 로맨틱한가요?”
소란의 귀에 대고 그가 소곤거렸다. 매력적인 비성의 중저음 보이스는 소란의 흥분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백만 배는 더 로맨틱해요.”
소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연거푸 키스를 퍼부었다. 소란의 입술이 그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 갈수록 그녀의 심장과 머리는 맥없이 혼미해졌다.
“당신이랑 자고 싶어요.”
***
송 실장이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었다.
“얼굴이 영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젯밤에 회사 다시 들어오셨어요?”
“아, 아니에요.”
송 실장은 변수의 컨디션을 파악하는 데 남다른 촉을 가진 사람이었다. 비서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 건 변수가 본부장으로 취임한 1년 전. 하지만 그와 알고 지낸 세월은 무려 20년을 훌쩍 넘었다.
“데이트는 잘 하셨어요?”
“뭐 그럭저럭.”
“본부장님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네요. 연애하는 모습도 처음 보지만 이렇게 열정 넘치는 분이셨다니.”
“저도 제 자신한테 놀라는 중이에요. 소란 씨한텐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자꾸 보여주게 되니까요. 수수께끼처럼 아리송하답니다.”
“운명인가 봅니다.”
운명? 변수는 길지 않은 그녀와의 시간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운명이기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던 걸까.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후부터 그것을 갖고 싶은 욕망이 이상하리만치 강렬했다. 이 욕망이 정녕 운명인 걸까.
“본부장님, 잠깐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긴 생머리를 날리며 연연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회식 때 들었던 ‘두 마리 토끼’ 발언 이후 변수는 가급적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해 왔었다.
“강연연 씨가 본부장님께 직접 보고할 일이 있나요? 윤 팀장 통해 올리면 될 텐데요.”
“직접 말씀드릴 사안이라서요.”
송 실장은 그의 난감한 기색을 읽었는지 어떻게든 연연을 내보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
“4년 전 일이라서요.”
4년 전 두 사람의 맞선에 대해 말하려는 걸까. 변수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겠다 싶었다.
“10분 뒤에 파주 회의 출발할게요.”
“네? 아, 네. 준비하겠습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콩떡같이 알아듣는다고 했던가. 갑작스런 변수의 발언에도 송 실장은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본부장님. 저 피하시는 건가요?”
“제가 왜 강연연 씨를 피한다고 생각해요?”
“글쎄요. 전 왜 그렇게 느껴지죠?”
“잘못 느낀 겁니다.”
연연의 입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간간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정면으로 변수를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입이었다.
“어머님들끼리 모임 하는 거 아시죠?”
“네, 얘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맞선도 그 모임에서 추진된 거란 사실은 변수도 익히 알던 터였다.
“본부장님한테 한방에 거절당한 거 때문에 저희 엄만 모임도 제대로 못 나가셨어요.”
“4년 전 일인데다 지금은 별 문제 없으신 걸로 아는데요.”
“그, 그렇기야 하지만 아직도 많이 창피해 하세요.”
어쩌란 말인가. 4년 전 맞선에서 거절한 죗값을 지금이라도 치르란 말인가?
“기회를 드리려고요.”
“무슨 기회요?”
“저에 대해 천천히 알아보실 기회요.”
그녀의 당돌함은 여전했다. 존재에 대한 자신감의 근원은 대체 무엇일까. 그녀의 한결같은 당돌함이 변수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다가왔다.
“단번에 거절당하기엔 제가 너무 아깝거든요.”
《나는 언제나 수수께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 M. C. 에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