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형의 특징 중 하나는 관계에 대한 몰입입니다. 모든 걸 다 쏟아 붓기 때문에 그만큼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맹점도 있죠.”
소란은 매번 강의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이벤트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양각색의 데이트, 폭포수처럼 퍼붓는 키스 세례와 짜릿한 스킨십까지…… 그의 연애 타입은 의심할 바 없는 ‘에로스형’.
“에로스형의 경우 몰입을 가능케 하는 요인은 뭘까요? 연구자들이 첫 번째로 꼽는 것은 바로 이성에 대한 선호도입니다. 예쁘거나 섹시한 여자? 능력 있거나 다정한 남자? 선호도는 개인마다 다르겠죠. 어쨌든 선호하는 이성, 즉 이상형을 만났을 때 인간은 빛의 속도로 사랑에 몰입하게 된다는 거죠.”
“자기한테 부족한 부분을 이성이 채워줄 때도 그렇지 않나요?”
평소 노골적인 발언에 능하던 트레이닝복 차림의 복학생이 모처럼 핵심적인 질문을 했다.
“맞습니다. 몰입의 두 번째 요인이 바로 결핍을 채우려는 본능이죠. 자신과 정반대되는 이성에게 끌리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요. 그것이 상대방의 치명적인 결함이라 해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꺼이 매혹에 빠져든답니다.”
변수가 그녀에게 몰입하는 이유는 뭘까. 소란은 그와의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자신의 존재론적 매력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자신이 그가 선호하는 이성상에 부합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남모를 결핍을 소란이 채워주고 있는 걸까.
“에로스적 환상도 몰입을 가중시키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신이 만든 프로그램 중 인간의 에로스적 환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는 아직까지 전무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마약이나 마취처럼 강력한 효과를 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런 환상에 빠지는 순간이 바로 엄청난 몰입이자 사랑의 순간이란 겁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 소란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당신과 자고 싶어요!’
그날 밤 들었던 변수의 마지막 말이 다시 한번 강력하게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곱씹어도 매번 소름이 돋는 짜릿한 달콤함. 그의 음색과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지만 정신은 혼미하기만 했다. 에로스적 사랑아, 조금만 천천히 오면 안 되겠니?
‘자고 싶다’던 변수의 한마디가 그 밤의 마지막 말이 된 건, 그 시간 이후 두 사람에게 더 이상의 언어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
그와 함께 맞는 새벽빛은 더할 나위 없이 영롱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스치는 그의 손길은 찌릿한 전율과 함께 초콜릿처럼 녹아드는 달콤함을 선사했다. 아…… 이것이 정녕 아홉수 소란에게 불어닥친 사랑이 맞단 말인가. 입방정만 조심한다면 이 행운을 영원토록 맛보아도 되는 것일까.
“교수님!”
“아, 네. 질문 있나요?”
자꾸만 정신줄을 놓게 되는 그녀였다.
“에로스형 연애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쉽게 육체관계를 맺기 때문인가요?”
“성적 판타지와 사랑을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죠. 플라톤은 ‘성적 쾌락이야말로 최대의 속임수’란 말을 했어요.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성’과 관련된 논의가 이어지면 학생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뭉스런 눈초리의 신입생,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쭈뼛거리는 수줍은 남학생, 애써 초연한 척 하는 해사한 얼굴의 여학생, 결론이 뻔하다는 듯 무료한 표정을 짓는 복학생까지.
“말이 좀 어려운가요? 플라톤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모든 개체가 성욕을 통해 얻는 만족감은 종족 유지라는 생물학적 의도에 이바지한 대가일 뿐이라는 거죠. 즉, 인간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성적 판타지는 그저 생물학적 본능에 불과하단 의미예요.”
그 밤, 지칠 줄 모르고 그녀를 향해 돌진하던 변수 역시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했던 것일까.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저릿해오던 소란도 그저 허울뿐인 성적 판타지를 경험한 것일까.
***
“그게 조카가 고모한테 할 소리냐?”
신간 도서를 정리하던 미련이 짐짓 민망한 눈길을 던졌다.
“우리가 일반적인 고모, 조카 사이는 아니지.”
“그건 그렇지만.”
소란에게 그녀는 고모라기보다 큰 언니와도 같은 존재. 일찍 여읜 부모를 대신해 소란의 집에서 함께 자란 그녀였기에 더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잤다는 거지? 난 요즘 애들 연애 방식을 통 이해 못하겠다.”
“자꾸 잊어버리나 본데, 고모도 그 ‘요즘 애들’이거든?”
“그렇다 치고. 둘이 너무 빨리 가까워지는 게 고민이란 거야?”
“그렇다기보다 그게 뭐랄까…….”
정신을 쏙 빼놓는 에로스형 방식이 처음이라 그럴까. 저주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기 때문일까.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극단을 달리는 마음을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요즘 강의 주제가 에로스형 연애거든. 그 사람 생각 때문에 강의 때마다 어찌나 집중이 안 되는지.”
“음, 에로스형이라…… 이번 아홉수 키워드가 에로스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눈이 또렷이 마주쳤다. 불길함과 호기심이 스치는 눈빛.
“그, 그거였나? 아홉수 키워드?”
“뭐 그렇대도 상관없지. 유배나 처형, 부도, 파산, 이별 같은 키워드가 아닌 게 어디야.”
“…….”
서점 통유리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섰다. 곧이어 두 사람의 손에는 ‘궁 초밥’이라 찍힌 고급스러운 쇼핑백 두 개가 놓였다. 그가 보내온 도시락이었다.
『어제 보고 헤어졌는데 벌써 당신이 그립네요. 오전 내내 당신이 보고 싶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고모님이랑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이따 데리러 갈게요. 최변수 드림.』
미소가 절로 나오는 다정한 메모까지 함께였다.
“거 봐. 이런 사람을 또 어디서 만나겠니? 이번엔 에로스나 사랑, 뭐 그런 긍정적인 키워드인 게 틀림없어.”
초밥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그가 고민하고 계획하고 실행했을 이 모든 낭만적 행위들이 무척이나 달콤했다. 입 속으로 스르르 녹아드는 초밥과도 같이 자신은 그저 받아먹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불안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맘껏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
“근데 네 강의 주제 말이야. 에로스형 다음엔 뭐야?”
***
“본부장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변수가 송 실장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준수 형! 잠깐 형제 모드로 얘기하면 안 될까?”
“어, 그래. 무슨 일 있어?”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었는지 그가 황급히 소파에 앉았다.
“형, 나 무슨 병 걸린 사람 같아.”
“병이라니?”
“시도 때도 없이 멍하고 가슴이 꿀렁대. 종일 소란 씨 생각만 나고 자꾸 소름이 돋아. 나 왜 이래? 연애한다고 다 이래?”
“상대방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지.”
옆에서 지켜보는 송 실장도 의외라 여기던 참이었다. 변수가 자신의 여동생 순수를 짝사랑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기 때문.
“하긴 네가 순수 짝사랑하던 때랑은 많이 다르긴 해. 한 집에 살면서 말도 제대로 못 붙였던 게 너였으니까.”
변수의 아버지 최정의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절친했던 고향 선배가 있었다. 송 실장 남매는 그가 남기고간 자식들. 최정의는 송 실장 남매를 데려다 제 자식처럼 키웠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배의 영혼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게 그의 변이었다.
변수는 송 실장의 여동생 순수를 일찍부터 짝사랑했더랬다. 그의 나이 여덟 살, 순수가 막 중학교에 입학하던 때였다.
“누나.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입학 선물 해주고 싶어서.”
“초딩 꼬맹이가 무슨 돈으로 선물을 해? 난 코 묻은 돈 뺏는 나쁜 누나 아니거든?”
순수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부스스 흩어 놓았다. 지금도 생생했다. 그때 느꼈던 뭔지 모를 울컥함. 나이는 정녕 사랑의 방해물이란 말인가?
“순수가 자기한테 왜 연락 안 하냐던데? 우리가 그런 사이냐며 많이 삐친 거 같더라.”
“그래? 누난 잘 지내지?”
순수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변수네 집에 더 이상 폐가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독립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연극배우가 꿈이던 그녀는 도쿄의 한 극단에서 차근차근 꿈을 일궈가는 중이었다.
“내 생각엔 넌 지금 지극히 정상이야. 사랑에 풍덩 빠진 것뿐이지. 순수 말곤 누구 좋단 말도 한 적 없던 게 너였어. 네 지금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그런가? 자꾸 이런 내가 낯설어서 말이지. 내가 사랑에 이렇게 저돌적이었나 싶기도 하고.”
“나랑 처남 매부 될 뻔했는데 좀 아쉽긴 하다. 하긴 순수한테 뭔 고백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말이지.”
그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던졌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변수도 딱히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게. 떨려서 좋아한단 말도 못했던 게 나였는데. 소란 씨만 보면 어디서 그런 야수가 튀어나오는지.”
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야말로 ‘풍덩’ 사랑에 빠져버린 걸까. 마약과도 같이 정신과 몸을 뒤흔드는 이 사랑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
“근데 소란 씨 어디가 그렇게 좋아?”
《우리들의 인간 행위에서 사랑보다 신비롭고 진지한 행위는 없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