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리듬을 느끼면서 움직여 주세요. 원, 투, 쓰리, 포!』
송 실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변수와 동고동락하는 사이여서일까. 그와 사귀고부터 소란은 송 실장에게도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평범한 40대 가장 같았는데 모태솔로 싱글남이란 말에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첫째 줄 가운데 여성 분, 골반을 좀 더 안으로 밀어주시고 가슴은 누르는 듯이 움직여 주세요! 원, 투, 쓰리!』
강당 문이 살포시 열렸다. 송 실장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들어섰다.
『웨이브를 할 때는 힘을 풀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맨 뒷줄 모자 쓰신 남성 분, 엉덩이가 너무 뒤로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등은 알파벳 C자 모양으로 부드럽게 말아주시면 됩니다.』
댄스 수업 4주 차. 수강생들의 얼굴이 갈수록 편해 보여 안심이었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직장인들의 비애가 느껴져 애잔한 기분도 들었다. 이런 부업이 없으면 생계 유지가 곤란한 소란의 삶 역시 애잔하기는 마찬가지.
“선생님!”
수업이 끝나면 으레 송 실장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대개는 변수의 말을 전하거나 그가 준비한 이벤트 장소를 안내하려는 목적이었다.
“잠깐 시간 되세요?”
“네, 그럼요.”
“오늘은 본부장님 말고 저랑 차 한 잔 하시죠. 방금 전에 대표님 호출 받고 을지로 본사 가셨거든요.”
“아, 네.”
송 실장이 안내한 곳은 사옥 꼭대기 층의 북카페.
“이런 곳이 있었네요. 전망이 참 좋아요.”
“아직 모르셔서 그렇지 사내에 숨은 명소들이 꽤 많답니다.”
“그러네요. 근데 저건 뭐예요?”
출입구 옆에 위치한 방문 앞에는 갖가지 흑백사진들이 멋스럽게 나붙어 있었다.
“필름 인화하는 암실이에요. 본부장님 방에서 필름 카메라들 보셨죠? 카메라 수집뿐 아니라 사진도 많이 찍으신답니다. 사진전도 벌써 두 번이나 열었는걸요. 일반 사원들에게도 개방된 곳이에요.”
완벽에 완벽을 더하는 멋스러운 취미랄까. 소란은 문득 ‘멋스러운’ 그가 보고팠다.
“변수 씨 다시 들어오나요? 요즘 일이 많아서 자주 못 보네요.”
“들어오실 거예요. 요즘 경영 평가 기간이라 일이 많거든요.”
경영 평가란 말에 실린 이 부정적인 기운은 뭐지? 며칠째 연락이 뜸하던 그였다.
“혹시 회사에 무슨 일 있나요?”
“정기적이 평가긴 한데 이번엔 예민한 사안들이 좀 많아요. 전년 대비 매출도 많이 줄어서 대표님과 회의도 잦으시고요.”
그간 소란에게 쏟아 붓던 열정을 감안하면 눈에 띄게 소원해졌지만 회사 상황 때문이었다면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두 분 참 보기 좋습니다.”
“아, 네. 그런가요?”
“본부장님한테 그런 모습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니까요.”
“어릴 때부터 쭉 같이 지내셨다면서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송 실장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님, 이 사진은 정말 아닌 거 같은데요.”
본부장님? 다른 본부장이 또 있었나? 소란은 제 귀를 의심하며 소리의 발원지로 눈을 돌렸다.
암실 문을 열고 다정스레 나오는 두 남녀. 변수와 긴 생머리 여자.
“엇! 본부장님이 왜 저기서…….”
놀라기는 송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소란을 의식하지 못한 듯 소곤소곤 대화중인 그들. 소란의 얼굴은 금세 핏기가 사라져갔다.
***
“소란아, 진짜 고마워. 수업 자꾸 빼먹으면 엄마들이 난리치거든. 네가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다정이 피곤한 기색으로 반색하며 들어섰다. 수년간 의절하다시피 지내던 모녀였지만, 홀로 계신 엄마의 병환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아직도 이십대 청춘인 줄 아나 봐. 나이 환갑에 웬 인라인 스케이트? 한쪽 다리만 다친 게 이상할 정도야.”
“나이 들었다고 하고 싶은 걸 못할 이유는 없잖아. 네가 발레 때려치우고 뒤늦게 댄스 가르치고 있는 걸 생각해 봐.”
“그거랑 그게 같니?”
며칠째 간병 중인 그녀를 대신해 소란이 서너 개의 댄스 수업을 맡고 있던 차였다. 오랜만에 강행군을 하니 소란 역시 온 몸이 쑤셔댔다.
“변수 씨 얘긴 뭐야? 암실은 또 뭐고?”
암실에서 다정히 걸어 나오는 남녀를 두고 야릇한 상상을 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될까. 더구나 정해진 알리바이에서 벗어난 연인을 목격했다면?
“어, 소란 씨! 여긴 웬일이에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던가? 어쩌면 당황스러운 눈빛이었는지 모른다. 소란과 송 실장을 번갈아 보던 그의 오묘한 시선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본부장님, 본사 가셨던 거 아니에요?”
“대표님이 갑자기 해외 일정 잡히셔서 미팅 가던 길에 취소 연락 받았어요. 송 실장님 퇴근하신 줄 알고 따로 얘기 안 했는데.”
“그래도 연락 주시지.”
송 실장이 힐끗 소란의 눈치를 살폈다. 어정쩡한 난국을 타개하려는 그 특유의 의지가 불끈거렸다.
“본부장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연연 씨. 내일 편집회의 때 봅시다.”
그가 연연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또각또각 멀어져가는 그녀의 긴 생머리에 소란의 시선이 고정됐다.
“과학서적 팀 MD 강연연 씨에요. 올해 입사한 신입사원이죠.”
송 실장이 소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의 신상 정보를 짧게 읊조렸다.
“소란 씨, 어쩌죠? 잠깐 차 마실 시간도 없겠네요. 할 일이 태산이거든요.”
“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암실에서 여직원과 빈둥거릴 시간은 있고 자신과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없다? 복부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릴렉스, 릴렉스…….
“그래서? 그렇다 할 변명도 없이 그냥 가버렸단 말이야?”
“응.”
“이 경우는 둘 중 하나야. 정말로 별 거 없거나 너에 대해 변심했거나.”
“변심? 에이, 설마.”
소란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오던 그가 변심을? 그것도 느닷없이 갑자기? 소란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별 거 없었겠지. 의심이나 오해 같은 건 딱 질색이야.”
긴 생머리 여인. 가슴을 활짝 펴고 꼿꼿이 걸어 나가던 장신의 그녀를 떠올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심과 오해의 기운을 외면해도 되는 것일까. 소란은 어쩐지 불길했다.
“그래도 안심하진 마. 연애학 강의까지 하니까 너도 잘 알 거 아냐. 쉽게 타오른 불길은 쉽게 꺼지는 법!”
그의 연애 타입이 에로스형이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초고속 몰입도를 자랑하지만 총알같이 시들해지는…….
***
『이번 시간부터는 루두스형, 즉 유희적 사랑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몰입과는 거리가 먼 루두스형 사랑. 강의 준비를 하면서 소란은 내내 마음이 찝찝했다.
『유희적 사랑이란 말 그대로 루두스형은 연애를 일종의 놀이로 여기죠. 놀이란 게 원래 일회성이 짙잖아요? 연애를 놀이로 본다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는 데 만족하게 되죠. 따라서 상대적으로 관계를 정리하기도 쉽습니다.』
『에로스형과는 정반대라고 봐도 되나요?』
『몰입이나 열정의 정도가 낮다는 점에서는 그렇겠지만,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측면에선 두 유형이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죠.』
이번 아홉수의 키워드가 ‘에로스’나 ‘사랑’일 거라던 미련의 말이 맴돌았다. 머리가 아득해왔다. 입방정 저주가 끝난 게 아니라면 소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유형의 사랑이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소란의 몸에 으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이 불길한 예감은 그저 기우일 거야.
『루두스형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로 인해 진지하고 깊은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겠죠.』
『바람둥이도 루두스형에 속하겠네요?』
한 여학생의 질문이 소란의 뇌리를 강타했다.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다정하게 웃던 변수와 긴 생머리 여자가 아른거렸다. 그는 바람둥이? 설마…… 아닐 거야.
『상대방에 대한 사랑은 있지만 독점욕은 희박하기 때문에 두 명 이상의 상대와 만날 가능성이 크고…….』
소란은 끝내 말끝을 흐렸다. 정말…… 아니겠지? 아홉수 키워드가 제멋대로 바뀔 순 없을 거야.
***
휴우. 신문사 칼럼을 마무리하고 내일 회의 준비까지 마쳤다. 변수는 그제야 크게 기지개를 폈다.
“송 실장님, 대표님 귀국이 언제였죠?”
“모레 들어오십니다.”
“아, 그럼 미팅 준비를 좀 더 해야겠네요. 아버지가 요즘 너무 예민하셔서.”
송 실장이 그 자리에 선 채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무슨 보고 사항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뭔데요? 말씀 안 하셔도 다 보이니까 빨리 하세요.”
송 실장의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스쳤다.
“소란 씨랑 뭐가 잘 안 되세요?”
“네? 잘 안 되다니요?”
“그렇잖아요. 한 달 내내 소란 씨 타령만 하시더니 요 며칠 새 워커홀릭 모드로 돌변하셨으니 드리는 말씀이죠.”
“제가요? 글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송 실장이 찬찬히 그의 눈빛을 살폈다.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내공으로도 가늠이 안 되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혹시 그날 암실에서 강연연 씨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은요. 제가 강연연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실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미심쩍은 표정을 남긴 채 그가 슬그머니 퇴장했다. 변수는 노트북 자판 위에 놓인 양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뭔가 달라진 거 같긴 한데…… 뭐가 달라진 거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