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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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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화. 보이지 않는 사랑
작성일 : 17-11-17     조회 : 313     추천 : 0     분량 : 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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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이 꽤 진도 나갔나 보던데? 우리 학교 출판 담당자한테 듣고 깜짝 놀랐어.”

 

 변수의 저돌적인 사랑 탓에 최근 소란과 안일의 만남이 뜸하던 차였다. 사귀는 사이 아니냐는 오해를 줄기차게 받을 만큼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었다. 자신의 연애로 그와 소원해진 듯해 소란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번 나랑 있을 때 처음 봤던 거 맞지? 한 달 새 그렇게 가까워졌다는 게 안 믿긴다. 하긴 남녀란 게 다 그렇지만.”

 “네가 연애를 알아? 사랑이고 뭐고 다 귀찮단 사람은 할 말 없지.”

 “연애하느라 의리도 내팽개친 사람은 할 말 있고?”

 “…….”

 

 안일이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소란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성이지만 동성 친구 같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남자 특유의 냉랭함과 빈정댐을 견디는 소란의 무던함 덕분이었다. 그의 무사안일주의와 귀차니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소란의 아량도 한몫했다.

 

 “근데 말이야. 연애 스타일이 갑자기 바뀌는 남자들도 있나? 그것도 극과 극으로.”

 “엥? 그건 또 뭔 말이야? 무슨 카멜레온도 아니고. 자기만의 스타일이 그렇게 쉽게 바뀌진 않지.”

 “그, 그렇지?”

 “설마 최 본부장 말하는 거야? 소문난 범생이니 연애도 모범적일 거 같은데.”

 “으, 응. 모범적인 스타일 맞지.”

 

 안일의 의구심은 더 이상 길어지지 않았다. 소란은 머그컵에 담긴 수마트라 커피를 천천히 음미했다. 평소 즐겨하던 산미는 덜하지만 달달한 맛이 있어 묘한 매력을 지닌 원두였다.

 

 “그 사람 말이야. 나랑 처음 만난 날 내가 마시던 커피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그녀는 짧다면 짧았던 그와의 강렬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여지없이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생각만 해도 좋냐?”

 “그만큼 섬세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는데.”

 “왜 과거형이야? 지금은 아냐?”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녀 자신도 놀랐다. 열정 가득하던 연애가 스르르 현재형에서 과거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혹시 그 사람 다중인격 같은 건 아니겠지?”

 “야!”

 “네 낌새가 이상해서 그러지.”

 “아니야, 정말.”

 

 안일은 평소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나 결정적인 순간엔 누구보다 잽싼 촉을 지닌 녀석이었다. 하지만 고민을 털어놓으려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안 내력인 아홉수 입방정 저주부터?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오는 변수의 태도부터?

 

 소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 일도 아닐 거야, 정말!”

 

 ***

 

 “팀장님, 이거 본부장님께 보고드릴 사안인가요?”

 

 윤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연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영업팀 가는 길에 제가 본부장님께 들렀다 올게요.”

 “연연 씨가? 그래요, 그럼.”

 

 연연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지난번 암실에서의 대화 이후 그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관계의 진일보. 이건 분명 희망적인 징후였다.

 

 “강연연 씨가 웬일이에요?”

 “저희 팀 회의 결과랑 리뷰하실 신간 목록 가져왔습니다.”

 “아, 네. 고마워요.”

 

 그녀가 가져온 대여섯 권의 책들 사이에 무언가가 삐죽 꽂혀 있었다. 변수의 손이 그곳으로 향했다.

 

 “어, 이건 박노해 라오스 사진전?”

 “네. 특별히 관심 있으실 거 같아서요.”

 

 변수가 열었던 두 번의 사진전은 수익금 전액을 시민단체에 기부하는 이벤트였다. 그의 관심사를 재빨리 파악한 연연이 비슷한 맥락의 전시회를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화 나눔 활동과 연계된 사진전을 그가 외면할 리 만무하다는 게 그녀의 계산.

 

 “안 그래도 조만간 가보려고 했어요. 근데 연연 씨도 이런 일에 관심 있는 줄 몰랐네요.”

 “저에 대해 모르시는 거 많으시겠죠.”

 

 의기양양해진 연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속물근성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였지만,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일정 정도의 수고와 성가심을 감수해야 했다.

 

 “연연 씨 아녔으면 일 핑계로 계속 미뤘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언제 시간 되세요?”

 “네?”

 

 변수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시회 티켓 두 장을 선물하는 의미를 이 남자는 정녕 모르는 걸까.

 

 “언제 같이 가실 수 있냐고요?”

 “아, 그렇죠. 같이 가야죠.”

 

 연연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참에 좀 더 가속을 붙이기로 했다.

 

 “흑백 필름 인화하는 건 언제 가르쳐 주실 거예요?”

 “혹시 제가 약속했었나요?”

 “기억 안 나세요? 지난번 암실에서 약속하셨는데.”

 “아, 그랬구나.”

 

 변수는 요즘 들어 자신이 했던 언행들이 자꾸만 아득히 느껴졌다. 누구보다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하던 자신으로서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사귀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벌써 다들 알고 있나요? 아직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소문 참 빠르군요.”

 

 그녀가 귀 뒤로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한 달밖에’라는 표현에 새삼 안심이 되었다. 회심의 미소를 눈치 챈 듯 변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뭐죠?”

 “아, 아니에요. 그럼 조만간 연락 주세요.”

 

 가벼운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변수가 말했다.

 

 “오늘 저녁 어때요?”

 

 ***

 

 사일런스 서점은 상호명 그대로 ‘고요’ 그 자체일 때가 많았다. 상호명을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권유에도 굳건히 ‘사일런스’를 고수하는 미련의 착잡한 속내를 누가 알려나.

 

 “이러다 진짜 문 닫아야 하는 거 아냐?”

 “동네 서점이 다 그렇지. 그래도 매체나 책에 많이 소개돼서 요즘엔 차차 나아지고 있어.”

 

 말과 달리 미련의 자신감은 점점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왜 꼭 ‘사일런스’여야 해? 이름 바꾸면 안 돼?”

 “이름이 뭔 상관이라고.”

 “뭐든 이름 따라 간단 말도 있잖아.”

 “입방정 때문에 일도 사랑도 다 잃은 사람한테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

 

 또다시 잊고 있었다. 미련과 소란을 옭아매는 저주의 유전자.

 

 “지난번 초밥 도시락 진짜 맛있었는데. 요즘은 왜 이리 소식이 뜸해?”

 “많이 바쁜가 봐.”

 “포털 사이트랑 온라인 서점 창업주 집안이면 재벌까진 아녀도 준재벌 정도는 되니까. 그래, 바쁠 수 있어. 우리 조카님이 이해하자.”

 

 소란이 철 지난 잡지를 뒤적이며 긴 한숨을 내뿜었다.

 

 “남자 바쁜 거에 서운한 티내고 그러지 마. 남자들이 그런 거 딱 싫어하거든.”

 “그렇게 잘 알면서 고모는 왜 맨날 연애가 틀어지는데?”

 “그거야 뭐. 다 그 놈의 미련 때문이지.”

 “설마 교회 오빠?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고모도 참 미련해, 쯧.”

 

 미련이 서가에 꽂힌 책 한 권을 불쑥 내밀었다.

 

 “어, 이거?”

 “응. 이 책 나오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지.”

 

 미련이 내민 책 띠지에는 ‘뉴요커 반훈남 변호사의 성공과 사랑 스토리!’란 광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참 잘 자랐더라. 내 입방정 때문에 쫓기듯 떠났는데…….”

 

 미련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10년도 넘은 철 지난 사랑에 저리도 미련이 깊다니. 오랜 시간 그녀를 봐온 소란으로서도 그 미련의 끝을 알 길이 없었다.

 

 “나처럼 징글맞게 미련 안 남기려면 있을 때 잘 해야 해. 지금 옆에 있는 사람한테 감사하란 얘기야. 해줄 수 있을 때 맘껏 잘해주고.”

 “나도 그러고 싶지.”

 

 변수가 에로스형 사랑을 퍼붓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곱씹어 보았다. 그래, 상황이 달라졌을 뿐 그는 여전히 ‘그’일 것이다. 의구심을 떨치고 이젠 그에게 받았던 사랑을 기쁘게 돌려주자.

 

 소란은 꽉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사랑을 지킬 이는 바로 자기 자신 뿐이라 읊조리며.

 

 ***

 

 “본부장님 계시죠?”

 “어, 연락 안 하셨어요?”

 

 댄스 수업을 마치고 송 실장에게 물으니 오히려 그가 반문했다.

 

 “수업 끝나고 사무실에서 잠깐 보기로 했어요. 어젯밤 메시지로 주고받아서 오늘은 따로 확인 안 했는데.”

 “아, 본부장님 요즘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네.”

 

 일그러진 송 실장의 얼굴을 보니 소란의 불길함이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변수에게서 온종일 연락 한 번 없던 터라 내내 찝찝했었다.

 

 “제가 연락드려 볼게요.”

 “아니에요, 실장님. 사무실에서 좀 기다리면 오겠죠.”

 

 그의 책상 한편에는 여전히 책들이 수북했다. 노트북의 전원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였다. 아직 퇴근 전임에 틀림없었다.

 

 책들 사이에 ‘라오스의 아침’이라 쓰인 리플릿이 눈에 띄었다. 어느 해 여름, 일상처럼 이별의 아픔에 허덕이던 미련과 함께 루앙프라방으로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리플릿을 펼쳐드니 티켓 두 장이 후두둑 떨어졌다. 한쪽이 떨어져나간 걸 보니 이미 사용한 티켓 같았다. 두 장이라 함은 누군가와 동행했다는 뜻?

 

 “소란 씨, 웬일이에요?”

 “댄스 수업 끝나고 잠깐 보기로 했었잖아요.”

 “아, 그랬구나. 제가 요즘 자꾸 깜빡깜빡하네요.”

 

 그가 무심한 듯 소란을 스쳐갔다. 닿기만 해도 불꽃이 일던 지난 한 달이 10년도 더 된 일처럼 아득했다.

 

 “사진전 갔었나 봐요.”

 “아, 네.”

 “누구랑 갔었어요? 저도 가고 싶던 전시회였는데.”

 “그랬어요? 소란 씨한테 먼저 물어볼 걸 그랬네. 관심 없을 거 같아서 그냥 송 실장이랑 갔었죠.”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틀림없이 사실이어야 했다. 하지만 소란의 촉은 자꾸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 데이트한 지 일주일도 넘은 거 알아요?”

 “벌써 그렇게 됐어요? 소란 씨도 알잖아요. 요즘 일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네요.”

 

 가슴 밑바닥이 시큰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데이트할 시간은 없어도 송 실장과 전시회 갈 시간은 있다? 그가 날 사랑하긴 하는 걸까. 느껴지지 않는 사랑도 사랑일까. 보이지 않는 사랑만큼 인간을 괴롭히는 건 없었다.

 

 “우리 내일은 꼭 만나요.”

 

 소란은 애써 미소 지으며 그의 훈훈한 눈매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그래요, 내일은 어떻게든 시간 낼게요.”

 

 

 《우리는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 사랑 또한 볼 수 없고 단지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사랑 ‘덕분에’ 살려지고 있으니 - 박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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