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우. 변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란을 만난 후의 시간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에 끌렸고, 열정적인 춤사위에 반전 매력까지 더해졌다. 그녀를 향한 열정과 애정의 기운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그동안 몰랐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 듯 스스로에게 낯선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달라진 게 확실한데 도통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계획과 정돈이 무뎌지고, 혼돈과 무질서가 자꾸만 일상을 흔들었다. 급기야는 소란에게 거짓말까지 해버렸다. 두 장의 사진전 티켓을 들고 물어오는 그녀에게 차마 연연과 갔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십니까? 저랑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하셨다는 거죠?”
“저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저 요즘 진짜 이상하죠?”
“요즘 본부장님 모습이 평소랑 너무 달라서 좀 낯설긴 하죠.”
곁에서 오랜 시간 변수를 봐온 그의 견해는 신빙성이 있었다.
“준수 형, 나 진짜 왜 이러지?”
변수는 괴로운 마음을 견디기 힘들어 황급히 형제 모드로 전환했다.
“하얀 거짓말이란 게 있잖아. 너도 소란 씨 기분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그게 아니라…… 실은 강연연 씨랑…….”
머리를 감싸 쥔 변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강연연’이란 이름에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했다.
“너 설마…….”
“형, 나 최변수 맞아? 진짜 왜 이러지.”
연연과의 그 날을 떠올릴수록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란에 대한 마음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연연에게 마음이 흔들렸을까.
“전 평소 자원봉사나 기부에 관심이 많아요. 부잣집 외동딸 이미지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 놀라긴 하죠.”
전시회를 둘러본 후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변수는 그녀의 색다른 모습에 놀랐다. 4년 전 맞선 자리에서 느꼈던 당돌함은 그저 당당한 자아 표현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바라보니 연연의 눈과 코, 과하다 싶었던 손짓까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참 놀랍네요. 그동안 저도 연연 씨를 오해했던 거 같아요.”
“다들 그러는 걸요. 그래서 많이 외롭기도 하고요.”
술잔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망울이 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했다. 이 묘한 기분은 뭐람? 뭔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변수는 입을 앙다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본부장님이 영영 절 오해하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고의는 아녔지만 미안해요. 4년 전 일도 그렇고.”
“다 지난 일인데요 뭐. 이제부터가 중요하죠.”
‘이제부터’라는 미래지향적 단어에 그의 쳐진 눈매에 엷은 미소가 실렸다. 묘한 기분이 찝찝해 서둘러 술자리를 파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다.
『소란 씨, 우리 내일 볼까요? 보고 싶어요. 많이 보고 싶어요.』
그는 무언가에 쫓기듯 소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향해 용솟음치던 애정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보고 싶었다.
***
『바람둥이나 어장 관리 같은 개념도 루두스형의 범주 안에서 논의될 수 있겠죠.』
『루두스형 연애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냥 즐기고 마는 소모품 같은 게 아닐까요?』
뿔테 안경을 쓴 단발머리 여학생이 물었다. 언제나 사랑의 본질에 관해 묻던 학생이었다.
『사랑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학자마다 견해는 다르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루두스형 역시 ‘다른’ 사랑의 양식이 아닐까 합니다.』
에로스형 애정을 쏟아 붓던 변수에게 다른 상황이 생긴 걸까. 복잡하게 얽힌 소란의 머릿속은 쉽사리 정돈되지 않았다.
“정말이야? 그 사람 어디 좀 이상한 거 아냐?”
어렵게 털어놓은 그녀의 고민에 대해 다정이 보인 첫 반응은, 일단 그를 ‘비정상적’ 인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렇잖아. 어떻게 한 달 만에 사랑이 확 식어버리냔 거지.”
“식었다기보단 타입이 좀 바뀐 거 같다니까.”
“그게 그거지.”
“예전 같진 않지만 나에 대한 사랑은 느껴지거든.”
다정이 한심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애도 여러 인간관계 중 하나이기에 ‘관리’가 중요하다는 게 인맥왕 다정의 평소 지론이었다.
“사랑만 하면 다냐? 관계가 지속되려면 관리를 잘 해줘야지.”
“앞으론 내가 더 잘해주면 돼지. 그동안 너무 받기만 했잖아.”
“글쎄다. 그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두고두고 골치 아플 거 같은데. 이참에 확 때려치우면 어때?”
소란의 간절한 눈빛을 목도한 그녀도 더 이상은 헤어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저주가 걱정될 뿐이야. 아직 확신은 못하겠지만 뭔가 자꾸 불길하거든.”
“저주 키워드가 정말 바뀐 걸까? 에로스형인지 뭔지 꽤 괜찮않는데.”
다정은 ‘에로스형’을 강조하며 슬그머니 입맛을 다셨다.
“참 어렵네. 너희 집안 내력이야 진즉에 들어서 알지만.”
“키워드가 바뀐 역사는 한 번도 없었다나 봐.”
집안 내력을 떠올릴수록 소란의 갑갑함은 더해만 갔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기우이기를. 제발 이번만큼은 저주의 운명이 비껴가기를.
“근데 무슨 타입으로 바뀐 거 같다고?”
다정이 무언가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루두스형. 유희적 사랑.”
“유희? 그냥 즐기는 거? 오 마이 갓!”
***
“딸! 말조심하고 있는 거지?”
미련의 서점을 찾은 명중이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물은 첫 번째 안부였다.
“그럼. 항상 조심하고 있지.”
소란의 안색을 살피던 명중이 슬쩍 말을 이었다.
“미련이한테 들으니까 너 요즘 연애한다며?”
“응.”
“쓸 만한 녀석이겠지?”
그의 말에 소란과 미련이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오빠. 쓸 만한 녀석의 기준이 대체 뭐야?”
“그야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딸 마음 안 아프게 하는 녀석이지.”
“그런 거라면 이미…….”
미련의 말을 자르며 소란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빠, 조상 중에 저주 키워드가 바뀐 사람은 없었어? 기록만 없을 뿐 그런 케이스가 있을 수도 있잖아.”
“글쎄, 그런 얘긴 전혀 못 들었는데.”
금세 풀이 죽은 소란에게 그가 덧붙였다.
“파란만장한 연애가 키워드였던 선조는 있었지.”
“파란만장?”
소란의 귀가 솔깃해졌다. 파란만장한 걸로 치면 자신의 연애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알다시피 조선 태종의 자손이 12남 17녀로 무려 29명이나 되잖냐. 공주 12명 중 무려 네 명이랑 사랑을 나눈 자가 있었대. 바로 진몽휘라는 우리 선조였다지. 딴에는 진지하게 사랑했다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냐? 내명부에 소문이 자자해져서 결국엔 멸문지화를 당했다는구나. 게다가 죽기 전까지 부랑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나 봐.”
명중은 한기가 돋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람둥이가 온 집안에 화를 불렀네.”
“꼭 바람둥이라고 할 순 없지. ‘사람은 얽혔으되 사랑은 심히 진중하였도다’라는 기록도 있더라고.”
“와, 진짜 웃기다.”
미련이 콧방귀를 뀌었다.
“근대 이후엔 우리 집안에 그런 키워드의 인물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파란만장한 연애사 때문에 온 집안 망하는 꼴을 어찌 보겠냐?”
명중은 노파심 가득한 얼굴로 자꾸만 소란의 안색을 살폈다. 딸의 연애가 내심 걱정스러울 터. 무사히 넘기는 듯하던 딸의 아홉수 인생에 설혹 누가 될까 두려운 아빠의 심정이리라.
“아빠, 걱정 마. 변수 씨 정말 좋은 사람이야. 오히려 내가 문제지.”
“너야 입조심만 하면 돼. 좋은 사람이면 그걸로 됐어. 다른 별 일이야 있겠냐?”
명중의 걱정스런 눈길이 마음에 걸렸는지 미련도 거들었다.
“내가 옆에서 잘 지켜볼게,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
진 씨 집안 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영혼 없는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사일런스’ 서점을 가득 메우는 침묵. 그들의 머릿속은 꼬인 전기회로처럼 복잡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
“소란 씨!”
“왔어요?”
“얼굴 보니까 참 좋다.”
변수의 말에 그녀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지금부터 내가 두 가지 고백을 할 거예요.”
고백이라고? 그것도 두 개씩이나? 그렇지, 저게 바로 그의 원래 모습인 거야!
“내가 소란 씨 많이 사랑하는 거 알죠?”
“그럼요.”
소란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아, 이런 황홀한 순간이 얼마만이던가.
“소란 씨.”
“네.”
“소란 씨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네?”
그녀가 강박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심장이 얄궂게도 쿵쾅거렸다.
“전시회 누구랑 다녀왔냐고 물었었죠?”
“송 실장님이랑 갔었다면서요.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이 순간마저도 그의 쳐진 눈매가 저토록 사랑스러울 줄이야. 이런 불길함 속에서도 그의 비음 섞인 중저음이 이토록 귓가를 간지럽힐 줄이야.
“실은 다른 사람이랑 갔었어요.”
“누구요?”
“강연연 씨라고.”
“혹시 그 때 암실에서 같이 나오던 분?”
“맞아요.”
소란은 연거푸 심호흡을 했다. 별 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누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변수 씨네 회사 MD라면서요. 같이 갈 순 있지만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러게요. 그냥 동료로서 같이 간 것뿐인데. 티켓을 선물 받고 모른 척 할 수가 있어야죠.”
그녀는 연연의 긴 생머리를, 장신의 자태를 뽐내던 구두 굽 소리를 떠올렸다. 유치하고 잔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변수는 거짓말을 변명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죄책감을 덜고자 시도한 고백이었지만 또 다른 죄책감이 가중되었다. 그럼에도 변수의 입은 구차하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소란 씨! 나한텐 소란 씨뿐인 거 알죠?”
《될 수 있으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될 수 있으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때뿐이다. 될 수 있으면 그럴 기회가 없을 때가 아니다 – 프란츠 카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