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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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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화. 너무 사랑하고 있어
작성일 : 17-11-22     조회 : 334     추천 : 0     분량 : 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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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암실에 자주 가시네요?”

 “틈틈이 작업해 둘 게 있어서요.”

 

 송 실장이 사무실 한편의 필름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소란 씨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어서요.”

 “와우, 소란 씨가 참 좋아하겠네요. 그럼 이제 복잡한 마음 정리 다 되신 거죠?”

 

 소란을 만난 후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송 실장은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침묵을 가르며 송 실장이 슬그머니 휴가계를 내밀었다.

 

 “휴가요? 왜요?”

 “동생이 일본에서 결혼하거든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희뿌옇던 변수의 눈동자가 금세 또렷해졌다.

 

 “순수 누나가? 언제? 누구랑? 왜?”

 

 변수의 거듭되는 질문에 그의 눈이 멀뚱해졌다.

 

 “본부장님, 하나씩 질문하시죠.”

 “형! 정말이야? 누난 평생 독신으로 산댔는데.”

 

 스무 살 되던 해, 기다렸다는 듯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변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난 연극배우로 꼭 성공할 거야.”

 “그래, 누난 할 수 있어.”

 “그리고 평생 독신으로 당당하게 살 거야.”

 “그래, 누난 꼭 해낼 거야.”

 

 열네 살 소년에게서 첫사랑이 떠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녀를 배웅하고 김포공항을 빠져나오며 그는 내내 곱씹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녀는 평생 나만의 여신으로 남을 거야…….

 

 나만의 여신으로 남을 것 같던 그녀가 결혼을 한다니. 이건 사실이 아니야!

 

 “예비 신랑이 순수네 극단주래. 좀 민망하긴 하지만 속도위반까지 했다나 봐.”

 

 변수의 머릿속이 아득해져왔다. 결혼에 속도위반까지…… 그녀는 이미 여신으로서의 금기사항을 어긴 셈이었다.

 

 “너도 같이 가면 좋겠는데 최소한의 가족만 초대한 스몰 웨딩이라나 봐. 너희 부모님이랑 나랑 내일 출국하기로 했어.”

 

 변수는 그녀의 가족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긴, 가족이라 하기에도 남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이긴 할 터. 자신을 줄곧 짝사랑해온 오랜 ‘동거인’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누나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줘.”

 “너 괜찮지? 설마 첫사랑 결혼한다고 우울해지고 그런 건 아니겠지?”

 

 변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매제’ 자랑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변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

 

 “교수님! 혹시 잠깐 시간 되세요?”

 

 강의실을 나서는데 수수한 차림의 여학생이 소란에게 다가왔다. 평소 잘 눈에 띄지 않던 학생이었기에 무슨 일인지 사뭇 궁금했다.

 

 “개인적인 질문인가 봐요?”

 “네. 교수님께 꼭 상의 드리고 싶어서요.”

 

 두 사람은 후문 앞 한적한 카페에 나란히 앉았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녀에게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았다.

 

 “제가 듣는 교양 수업 강사님에 관한 건데요.”

 

 강사는 40대 유부남으로, 중년답지 않은 훤칠한 외모에 수려한 말솜씨를 자랑했다. 학기 초 폐강된 수업을 급히 대체한 수업이라 수강생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과목의 특성 상 수강생은 모두 여학생이었다.

 

 “수업이 금요일 오후라 끝나면 항상 뒤풀이를 했어요. 참석자는 대부분 저를 포함해서 열 명 안팎이었고요.”

 

 문제는 언제나 술인 걸까. 어느 금요일, 강사는 은밀히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왔다. 그 후 두 사람은 연인 아닌 연인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불륜’ 관계.

 

 “나한테 그걸 상의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요.”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며칠 전에 알았어요. 뒤풀이에 갔던 애들 대여섯 명한테도 비슷하게 행동했단 걸요.”

 

 그녀가 추궁하자 그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가관이었다.

 

 “나한텐 다 친구들이야. 너도, 다른 여자들도.”

 

 ‘친구’라는 말에 어이가 없던 그녀가 재차 따져 묻자 그의 반응은 점입가경.

 

 “일종의 스킨십 하는 친구라고 할까.”

 

 울먹이는 그녀에게 소란은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도 같았다.

 

 “교수님 수업 들으면서 그 사람도 루두스형이 아닐까 싶어요.”

 

 스킨십을 하는 이성 친구 관계. 그것도 여러 이성과? 그의 사랑은 정말 루두스형일까.

 

 여학생과의 만남이 소란의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연상 작용처럼 변수의 ‘고백’이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연연과 그도 혹시 스킨십을 하는 이성 친구는 아닐까.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그가 에로스형에서 루두스형으로 바뀌고 있는 걸까.

 

 카페 문을 나서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전을 울렸다.

 

 “근데 어쩌죠? 제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요.”

 

 ***

 

 “송 실장님은 어디 가셨나 봐요? 수업 때도 안 보이시던데.”

 “휴가 내셨어요.”

 

 댄스 수업을 마친 후 소란은 습관처럼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휴가요? 어디 아프세요?”

 “동생이 결혼한대요.”

 “그랬구나. 송 실장님 동생이면 변수 씨 집에서 같이 자랐다는 여동생 말이죠?”

 “네.”

 

 그의 눈길은 한없이 다정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긴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듯 단답형의 반응만 이어졌다.

 

 “세 사람 어린 시절은 어땠을지 너무 궁금해요. 송 실장님 여동생은 더 궁금하고요.”

 “…….”

 “그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냥 평범한 누나예요.”

 

 소란은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함께 자란 이들과의 추억도 궁금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변수 씨에 대해 물어보는 게 혹시 불편해요?”

 “불편하긴요. 전혀요.”

 

 해사한 얼굴의 그를 보니 소란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오늘 같이 있을래요?”

 “네?”

 

 느닷없는 그의 달콤한 제안에 소란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얄궂은 사람 같으니.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저 남자의 정체는 과연 뭘까.

 

 똑똑. 짧은 노크 소리 후 곧바로 문이 열렸다. 연연이었다.

 

 “본부장님! 어머, 손님 계셨네.”

 

 저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어놓고 싶은 이 기분은 뭘까.

 

 “괜찮아요. 들어와요.”

 

 소란에게 양해의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그녀가 성큼성큼 들어섰다.

 

 “내일 윤 팀장님이랑 파주 출판단지 가시는 날이죠?”

 “네.”

 “팀장님 일이 너무 많으셔서 저한테 대신 가라셨어요. 몇 시에 출발하실 거예요?”

 “아침 일찍 인문 팀이랑 편집회의 있거든요. 그거 끝나면 한 10시쯤 되겠네요.”

 

 연연은 짙은 버건디 컬러의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얼핏 봐도 170 센티는 돼 보이는 장신인데다, 말랐지만 볼륨감 넘치는 몸매 덕에 매력미가 한껏 발산되는 차림이었다. 소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회색 정장 바지를 만지작거렸다.

 

 “파주 간 김에 헤이리 들렀다 오면 어때요? 신인 작가들 흑백 사진전 열리던데.”

 

 소란은 재빨리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잠깐이었지만 고심의 표정이 스쳤다. 저 남자 뭐야? 누가 봐도 외근을 가장한 데이트 신청이건만, 어째서 저걸 고민한단 말이지?

 

 “그럴 시간은 안 될 거예요. 파주에서 회의도 길어질 거 같고…….”

 

 소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시간 안 되면 할 수 없고요.”

 

 연연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혹시 댄스 수업 선생님 아니세요?”

 “아, 네.”

 “수업은 신청 안 했지만 지나다 몇 번 뵀어요.”

 

 분위기 상 이쯤에서 그가 나서 소란을 소개시켜줘야 할 타이밍. 하지만 그의 입은 줄기찬 묵언수행 중이었다.

 

 “왜 신청 안 하셨어요? 하긴 굳이 안 배우셔도 춤 잘 추실 것 같긴 하세요.”

 

 어떻게든 대화를 길게 끌고 싶었다. 자꾸만 거슬리는 그녀 앞에서 ‘연인’으로서의 존재감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 물론 변수의 입을 통해서.

 

 “그거 칭찬 맞죠? 제 몸매 보고 다들 그러시긴 하더라고요.”

 

 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가 어찌도 얄미운지. 어서 말을 하라고! 자기 여자친구라고 왜 말을 못해!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강연연 씨, 그럼 내일 봅시다.”

 

 ***

 

 “너 오늘 무리한다.”

 

 소주 한 병이 주량인 소란은 벌써 두 병째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안일은 연신 안주를 구겨 넣으며 TV 속 야구 경기를 힐끔거렸다.

 

 “그니까 최 본부장이 널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아서 화가 난다는 거야?”

 “화난다기보다 그 사람 속이 궁금한 거지.”

 “이런 경우엔 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너에 대한 감정이 확실치 않거나 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거나.”

 

 하루가 무탈하기만을 바라며 사는 그에게 소란은 가끔씩 감탄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무심한 듯하나 은근히 예리한 사태 파악력.

 

 “그렇겠지? 내 생각도 그래.”

 “둘 중 어느 것이든 제일 괴로운 사람은 너겠지.”

 “그렇겠지? 내 생각도 그래.”

 “로봇 된 거 보니까 너 취했나 보다. 이제 그만 좀 마셔, 인마.”

 “그렇겠지? 내 생각도 그래.”

 

 안일이 참다못해 소주병을 홱 낚아챘다. 소란의 양 팔은 미친 사람처럼 허공을 헤맸다. 기어코 빼앗은 소주병에 그녀가 냅다 입을 댔다. 속절없이 식도를 파고드는 알코올. 쓰고 쓰리고 씁쓸했다.

 

 “안일아, 나 어쩌지?”

 “뭘?”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

 

 

 《현재 사랑을 모르는 인간은 사랑이 없는 자이다 –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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