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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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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화. 마음에 비가 내리네
작성일 : 17-11-23     조회 : 323     추천 : 0     분량 : 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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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 오후의 자유로는 한적했다. 속도계는 120 킬로를 넘어가고 있었다. 모처럼 만의 질주에 변수의 가슴도 뻥 뚫리는 듯했다.

 

 “본부장님도 이런 드라이브 좋아하세요? 저도 그런데.”

 “드라이브가 아니고 외근 갔다 오는 길이죠.”

 

 그의 냉정한 한마디에 연연은 금세 풀이 죽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타인이 던진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되는 기분을 느끼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안하무인이라는 자신의 별명이 무색할 지경.

 

 “네, 그렇긴 하지만요.”

 

 연연의 입에서도 곱지 않은 어조가 튀어나왔다. 한 발 다가갈수록 한 발 더 물러서려는 저 남자의 속내는 대체 무얼까.

 

 『진소란. 대학 강사이자 댄스 강사. 최 본부장과 사귄 지 두 달째. 소탈하면서 밝은 성격이 장점이라고 함.』

 

 여직원들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진소란에 관한 정보였다. 별 사이 아닐 거라 무시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꽤 신경이 쓰였다. 여직원 대표 정보통인 총무팀 윤 대리에게 은밀히 찔러보자 그녀에 관한 정보가 우수수 쏟아졌다.

 

 그의 사무실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연연은 사뭇 놀라고 말았다. ‘소탈하다’는 사전 정보를 ‘수수하다’ 혹은 ‘평범하다’ 정도로 해석해 버린 탓이랄까. 키는 자신보다 작았지만 댄스 강사다운 탄탄한 몸매였다. 수려하진 않아도 오밀조밀 귀여운 이목구비에 긴 목선이 돋보이던 그녀. 특히 쌍꺼풀이 없는 맑은 눈망울이 시선을 끌었다.

 

 “진소란 씨요. 춤 전공하신 줄 알았더니 사회학 박사시더라라고요. 좀 의외였어요.”

 

 진소란. 연연에게 그녀는 여러 모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네. 그게 소란 씨 반전 매력 중 하나죠.”

 

 운전 중인 변수에게서 은은한 과일 향이 풍겼다. 그의 입에서 ‘매력’이란 단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연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7선 국회위원 외조부의 권력과 명예, 강남 요양병원장인 아빠의 재력, 미스코리아 출신 엄마의 미모, 주식이나 땅 부자 친지들의 잔머리와 사회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연연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없는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지성’. 대학교수였던 조부의 인맥에 기대어 수도권 4년제 대학에 겨우 입학했다. 졸업 후 대학원에 들어가 학벌 세탁에 매진하라는 집안의 권유도 단칼에 외면했다.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 때문이다.

 

 “연연 씨는 공부 더 할 생각 없어요? 퇴근 후에 대학원 다니는 직원들 꽤 되는데. 회사 복지 차원에서도 적극 권장하는 사안이고요.”

 “아, 네. 차차 생각해 볼게요.”

 

 연연은 전에 없이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반전 매력 하면 연연 씨도 만만치 않죠.”

 “제가요?”

 “교만에 가까운 당찬 모습만 있는 줄 알았는데 봉사나 자선에도 관심 있어서 놀랐어요. 윤 팀장 말 들으니까 신입사원치고 일도 꽤 빨리 익힌다던데. 그게 다 연연 씨 반전 매력 아니겠어요?”

 

 연연의 입꼬리가 상향선을 그렸다. 그렇지. 매력은 진소란에게만 있는 게 아니지. 그녀는 예의 활기를 되찾았다.

 

 “회사 들어가기 전에 잠깐 차 한 잔 하면 어때요? 망원동에서 친구가 북카페를 오픈했거든요.”

 

 그녀의 코맹맹이 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변수의 얼굴에 동의의 미소가 실렸다.

 

 “그럼 잠깐 들를까요?”

 

 ***

 

 조선 신숙주의 아들 8명 중 넷째인 신정은 영의정을 8년이나 지낸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남부럽지 않은 귀공자로 성장했다. 그의 죽마고우인 진현묵은 조선 전기 명문가인 진 씨 집안의 서자.

 

 “나한테 너 같은 벗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째서?”

 “말은 않지만 명문가 자제들은 나 같은 서자 출신과 사귀기를 꺼려하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

 

 진현묵의 순수한 마음과 달리 신정에게 그는 한갓 ‘해결사’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현묵은 친구라는 미명 하에 신정의 철딱서니 없는 악행들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바빴기 때문. 가문의 배경과 지위를 이용해 각종 비리를 일삼는 신정에게 그는 그저 ‘필요’한 인물에 불과했다.

 

 “나는 정이 너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것이다.”

 

 39세의 진현묵도 진 씨 가문의 입방정 저주를 피해갈 수 없었다. 거듭되는 악행은 물론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 신정을 따라 그 역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럼 진현묵의 키워드는 뭐가 되는 거야?”

 

 소란은 들을수록 빠져드는 집안 내력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글쎄, 친구 따라 강남 가기?”

 

 미련의 말에 그녀가 까르르 웃어댔다.

 

 “그래, 그렇게 웃을 때가 좋지. 너 스물아홉 아직 안 끝났다는 거 명심해.”

 “하긴, 웃을 일은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들을 때마다 흥미진진한 걸 어째.”

 “흥미는 무슨. 이놈의 집안 저주, 난 아주 지긋지긋하다.”

 

 미련의 책상에는 ‘뉴요커 반훈남의 성공과 사랑’이 꽤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저 책을 왜 잔뜩 쌓아놨어?”

 “아는 사람들한테 선물하려고.”

 “굳이 왜?”

 

 첫사랑 훈남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미련이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실패한 연애는 바로 ‘그’ 때문이었음을. 자신의 사랑과 운명의 추는 오로지 ‘그’에게로 향해 있음을.

 

 미련의 ‘비장한’ 깨달음은 그녀를 엉뚱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일명 ‘반훈남 베스트셀러 작가 만들기’ 프로젝트.

 

 “뭐? 그 사람 한국으로 불러들이겠다고 책 사재기를 한단 거야? 내 고모지만 정말 어이가 없다.”

 “야, 그게 고모한테 할 소리야?”

 

 궁색한 변명 앞에 미련이 꼭 덧붙이곤 하는 멘트였다.

 

 “지인들한테 선물해봐야 몇 권이나 되겠어? 베스트셀러가 그 정도로 쉽게 되는 건 줄 알아?”

 “그래도 해보는 데까진 해 볼 거야. 나 말리지 마.”

 

 종국엔 지지부진한 미련의 끝을 달리는 그녀. 미련스런 고모를 지켜보는 조카의 마음은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소란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미련이 말끝을 흐리며 주저했다.

 

 “뭐 무슨 말인데?”

 “네 남친한테 도움 좀 청하면 안 될까? 그 사람 정도면 이런 것쯤 일도 아닐 텐데.”

 “고모!”

 

 소란의 새된 외침이 사일런스 서점을 가득 메웠다.

 

 “야, 뭐 그렇게까지 발끈해? 연인 사이에 그 정도도 부탁 못 해?”

 “그 사람한테 범법 행위를 하란 거야? 그게 말이 돼?”

 “그게 아니고, 그 사람 회사 직원이나 지인을 활용해 보잔 거지. 출판계 인맥만 해도 어마어마할 거 아냐.”

 “절대 안 돼. 다신 말도 꺼내지 마. 여기서 더 하면 고모도 아냐.”

 

 손사래까지 치는 그녀를 보니 미련도 더 이상은 매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하나밖에 없는 조카 덕 좀 보는 줄 알았더니. 조카고 뭐고 이 세상에 내 편은 하나 없네.”

 

 한숨 섞인 미련의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안 되는 일일까. 소란의 머릿속에서 사고의 흐름이 급선회하고 있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 목적으로 범법 행위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의 인맥을 빌리는 것뿐인데? 미련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이에 그 정도 부탁도 할 수 없을까.

 

 “한번 물어는 볼까?”

 

 소란은 문득 그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

 

 변수는 태블릿 PC로 송 실장이 보내온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순수의 결혼식 장면이었다. 초록이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 단출하지만 우아한 하객들, 그리고…… 그 속에서 환히 웃는 순수의 얼굴. 그 모습에 변수도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결혼은 변수에게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감정을 불러왔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사랑임에 분명하지만, 언제까지나 자기만의 여신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아쉬움.

 

 변수의 마음을 알면서도 내내 ‘꼬맹이’ 취급만 하던 그녀. 첫사랑은 변수에게 일종의 강박과 트라우마를 남겼다. 사랑을 얻으려면 ‘꼬맹이’를 넘어서야 한다…… 아니, ‘꼬맹이’ 그 이상이어야 한다…….

 

 “공부도 좋지만 좀 쉬엄쉬엄 해라.”

 “계획이나 시간 관리에 너무 연연하지 마. 인생이 어디 뜻대로만 된다니?”

 

 주변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변수의 학창시절과 젊은 날은 오로지 ‘꼬맹이’를 넘어설 그 무엇을 성취하는 데 바쳐졌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일궈 가면 언젠가 그녀의 남자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의 남자가 되고자 ‘꼬맹이’를 넘어선 그에게 이제 더 이상 첫사랑의 감정은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그에게 하나의 ‘눈빛’이 보였다. ‘꼬맹이’를 보는 순수의 눈빛이 아닌 ‘남자’를 보는 소란의 눈빛을. 그래서였을까. 마약과도 같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그 눈빛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굳건한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그 강렬한 눈빛을 벌써 잊은 것일까. 아니면 마음의 방이 둘로 나뉘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소란이 있는데 왜 자꾸 연연에게 눈길이 갈까.

 

 “어머! 드디어 만나 뵙네요. 연연이가 학교 때부터 어찌나 변수 씨 얘길 많이 하던지.”

 

 연연과 함께 북카페에 들어서자 그녀의 지인이 반색하며 달려왔다. 스릴러 소설 전문 카페답게 내부는 침침하고 으스스했다.

 

 “연연이 얘가 누굴 오래 마음에 두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근데 변수 씨랑 맞선 보고 온 날부터 줄기차게 얘길 하더라고요. 보통 남자는 아닌가 보다 했죠.”

 “아, 네. 연연 씨가 그랬나요?”

 “대학 때 대시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그런데도 다 마다하고 공부만 하더라고요.”

 

 공부만 했다고 보기에는 입사 성적이 안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변수는 엄마의 끈질긴 부탁 때문에 그녀를 우격다짐으로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임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너도 알잖니. 네가 맞선 첫 날 퇴짜 놓은 거 때문에 그동안 연연이 엄마랑 얼마나 서먹했나 몰라. 네가 워낙 깔끔하고 정확한 성격인 건 알지만, 빚 갚는 셈 치고 엄마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될까?”

 

 입사 성적이 마음에 걸려 그녀를 특별 채용으로 돌리고 나서도 좀처럼 찝찝함이 풀리지 않았었다. 가급적 사내에서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지금 그녀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게다가 그녀에게 묘한 매력까지 느끼고 있었다.

 

 ‘빚은 특별 채용으로 이미 갚았잖아.’

 ‘왜 자꾸 저 여잘 보는 거야? 제발 정신 차려, 최변수!’

 ‘너한텐 소란 씨가 있다고! 그녀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창 너머로 후두둑 비가 쏟아져 내렸다. 변수는 멍하니 비를 바라보았다.

 

 

 《내 가슴에 조용히 비가 내리네. 이유를 모르는 건 가장 나쁜 고통. 사랑도 증오도 없지만 내 가슴은 고통투성이네 – 폴 베를렌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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