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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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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화. 오류는 시정 가능할까
작성일 : 17-11-24     조회 : 345     추천 : 0     분량 : 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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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중아, 이번 시합 정말 중요한 거 알지?”

 

 변 코치도 사뭇 긴장되는 눈치였다. 경기도 양궁 유망주인 명중은 국가대표 선발전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1년 뒤 열릴 LA 올림픽 출전은 물론이고 대학 진학까지 걸려있는 경기였다. 중요한 경기 때마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명중의 징크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평소처럼만 앵커링(활을 당긴 오른손을 턱이나 볼에 내고 정확하게 겨냥하는 것) 시작하면 끝까지 문제없을 거야. 잘 할 수 있지?”

 “이번엔 예감이 진짜 좋아요. 컨디션도 좋고요. 걱정 마세요, 코치님.”

 “네 이름값은 꼭 해야 한다. 이름이 괜히 명중이겠냐?”

 “다른 데로 명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헤헤.”

 

 열아홉 살 명중에게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열 살 때 양궁을 시작해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온 그였다. 지난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결국 잘 안 된 거지? 아홉수 저주 때문에?”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저주에 대해선 일절 언급한 적이 없었다. 소란과 미련이 번갈아 가며 채근해도 묵묵히 함구하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합 날 관중석에 누가 있었는지 아니?”

 “누구?”

 “네 엄마.”

 

 금시초문이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들어간 물류회사에서 엄마를 처음 만난 걸로만 알고 있었다.

 

 “관중석에 엄마가 있었다고?”

 “응. 앵커링 때 너희 엄마가 한눈에 들어온 거지. 그리고는…… 그 다음은 말 안 해도 알겠지?”

 

 명중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뼈다귀해장국을 훌훌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내 저주 키워드는 ‘명중 오류’야.”

 “명중 오류? 왜?”

 “내 활이 과녁으로 가지 않고 네 엄마한테로 갔으니까. 그거야말로 명백한 명중 오류 아니겠냐?”

 

 씁쓸한 유머 같은 그의 말이 소란의 귓전을 울렸다. 명중 오류.

 

 “그동안 내내 함구하더니 왜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야?”

 “비밀이라기보다 입이 잘 안 떨어졌다고 할까.”

 “엄마랑 결혼한 걸 후회한단 뜻은 아니지?”

 “내 인생에 많고 많은 명중 오류 중 하나일 뿐이지.”

 

 명중이 허탈하게 웃었다. 소란의 입에서 연거푸 기침이 터졌다. 뼈다귀찜의 매캐함 탓이기도 했고, 아빠의 저주 키워드가 짠하기도 해서였다.

 

 “그러니까 너도 항상 입조심하란 거야.”

 

 진 씨 집안사람들이 모이면 으레 ‘입조심’으로 시작해 ‘입조심’으로 끝나기 마련.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빠, 한번 오류가 영원한 오류는 아니잖아.”

 “왜?”

 “오류는 언제나 시정 가능하니까.”

 

 ***

 

 “사진 잘 봤어요. 순수 누나 진짜 예쁘던데요.”

 “그러게요. 저도 동생이 그렇게 예쁜 줄 몰랐답니다.”

 

 결혼식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송 실장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엄마한테 들으니까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린다던데. 잠시도 안 떨어지고 어찌나 서로 챙겨주는지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고.”

 “동생이 워낙 맑고 순수한 애라 사랑에 빠지면 단번에 물들어버리죠.”

 “물들어요?”

 “그런 말들 많이 하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한테 흠뻑 물드는 거라고.”

 

 물든다…… 어쩌면 그랬던 것도 같았다. 소란을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워갈 때 그 역시 흠뻑 ‘물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온전히 한 사람에게로 향하는 심신을 주체할 길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물들었다 다시 물이 빠지기도 할까요?”

 “네? 글쎄요. 저도 경험이 없다보니.”

 

 송 실장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비혼과 미혼 남녀가 득실대는 현대 사회에서 중년의 싱글남이 더 이상 어색할 일은 아니건만,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마저 전무하다는 게 자신을 한없이 머쓱하게 만들었다.

 

 “흠뻑 물들었다가 그게 찔끔찔끔 빠지기도 하냔 거죠.”

 “그러다가 결국은 얼룩만 남겠군요.”

 “얼룩?”

 

 얼룩. 그에게 소란은 점점 작아져가는 얼룩인 걸까. 아니면 새로운 얼룩이 난데없이 커져가고 있는 걸까.

 

 변수가 의자를 뒤로 밀어젖힌 채 벌떡 일어섰다.

 

 “본부장님, 어디 가시게요?”

 “머리 좀 식혀야겠어요.”

 “아, 암실 가시는구나.”

 

 변수는 장식장 한편에서 가장 아끼는 필름 카메라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비장한 것도, 처연한 것도 같았다.

 

 ***

 

 막 수업을 마친 다정이 연신 땀을 훔쳤다. 중 2병을 앓는 듯 냉소를 잔뜩 품은 여학생 서너 명이 구석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쟤네들은 왜 춤을 배워?”

 “아이돌이 좋아서 아이돌이 되고 싶대.”

 “저 나이 땐 그럴 수 있지.”

 

 저 나이 때만 그럴까. 커피가 좋아 바리스타가 되고 싶던 스무 살의 그녀도 있었다. 여행이 좋아 여행 작가가 되고 싶던 스물두 살의 그녀도 있었다.

 

 지금, 스물아홉의 그녀는 어떤가? 변수를 사랑하게 된 후로 그녀는 줄곧 그의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그의 동료이자 친구, 가족이 되고 싶고, 처음 만난 그때처럼 그가 정열을 불사르는 에로스의 대상이고도 싶었다.

 

 “어른이 된다고 달라지는 건 아닌가 봐.”

 “뭐가?”

 “쟤네들이나 나나 다를 게 뭔가 싶어서.”

 “뭔 소린지.”

 

 다정이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그나저나 요즘 변수 씨랑은 어때?”

 “열렬히 키스하면서도 딴 생각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같이 자면서도 깊은 속내는 통 모르겠고.”

 “야, 그냥 확 헤어지라니까.”

 “그게 어디 쉽니? 우리 힘으론 안 되는 뭔가가 있는 것도 같고.”

 “그 키워드 얘기야?”

 

 그녀는 명중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류는 언제든 시정 가능할 거라는 희망. 저주의 키워드가 바뀌는 전례 없는 오류 역시 충분히 시정 가능할 것이다. 소란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엄마 다리는 좀 괜찮으셔?”

 “응. 나았다 싶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인라인장으로 달려가더라. 시니어 동호회원 중에 사귀는 분이 있는 거 같아.”

 “정말? 축하드릴 일이네.”

 “아빠 돌아가시고 수절하듯 지냈으니까. 근데 인라인스케이트가 좋다는 건지 연애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 나이에도 사랑 앞에선 똑같아지나 봐.”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싹틔운 노년의 사랑이라. 어딘지 멋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시답잖은 고민 따윈 없는 성숙한 모습일 것만 같았다.

 

 “엄마 메시지를 좀 훔쳐봤거든. 인라인장에서 다른 여자 팔 잡아준 거 때문에 툴툴대는 내용이더라고.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사랑 앞에 ‘성숙’이란 단어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사랑은 성숙함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영원한 벌이자 과제인 걸까.

 

 ***

 

 그가 머그컵 두 잔을 들고 소란에게 다가왔다. 사내 북카페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이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담소를 즐기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본부장님, 아직 퇴근 전이세요?”

 “어머, 이 분이 그 분인가 봐요.”

 “최 본부장, 내일 회의 때 보자고.”

 

 두 사람만의 조용한 대화는 애당초 불가능한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변수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각인된다는 묘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소란 씨 불편하면 다른 데로 옮길까요?”

 “아니에요. 전 이런 분위기 좋아요.”

 

 그녀는 미련의 제안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고심 중이었다.

 

 “저기, 변수 씨. 뭐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요?”

 “그게 좀 곤란할 수도 있는 거라 말 꺼내기가…….”

 “우리 사이에 그럴 게 뭐 있어요. 편하게 얘기해요.”

 

 부드럽게 쳐진 그의 눈매가 소란에게 용기를 북돋고 있었다.

 

 “혹시 ‘뉴요커 반훈남의 성공과 사랑’이란 책 보셨어요?”

 “그럼요. 요즘 꽤 반응 좋은 신간인데요.”

 

 ‘러브스토리’랄 것도 없는 미련과 훈남의 인연을 전하자 그도 제법 흥미를 보였다.

 

 “와, 두 분이 그런 사이셨구나.”

 “고모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그 분 얼굴을 꼭 한번 보고 싶은가 봐요.”

 

 미련의 끈질긴 ‘미련’에 의외로 그가 반색하며 말했다.

 

 “굳이 사재기 같은 거 할 필요 없어요. 출판사 측에서 저자 사인회나 강연회를 열면 되니까요. 반응 좋은 책이고 요즘 명사 특강이 유행이니까 그 정도 추진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정말요? 그래도 그게 쉽게 될까요?”

 “물론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이 있어야죠. 이 출판사 대표랑 호형호제하는 사이니까 금방 추진될 거예요.”

 

 소란의 마음은 흡족했다. 애당초 자신의 부탁에 대한 그의 반응이 궁금했던 차였다.

 

 “변수 씨, 이렇게까지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그런 말은 할 필요 없어요. 제가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일이잖아요.”

 

 소란은 오랜만에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사랑에 흠뻑 취하는 이 기분, 너무도 아늑했다. 그래, 저 남자는 변하지 않았어.

 

 “본부장님!”

 

 순식간에 행복을 깨부수는 낯익은 음성.

 

 “강연연 씨, 오늘 야근인가 봐요?”

 “네. 본부장님도요?”

 

 그녀가 소란을 흘낏거렸다. 얄밉게도 먼저 알은 체는 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연연 씨.”

 “아, 네. 댄스 선생님이시구나.”

 

 분명 자신의 존재를 모르지 않을 터. 그럼에도 그녀는 시종일관 자신을 ‘댄스 선생’으로 부르고 있었다.

 

 “지난번 갔던 북카페 말예요. 친구가 책 구입 건으로 상의드릴 일이 있다던데 조만간 시간 내주실래요?”

 

 소란의 눈망울이 그에게로 향했다. 일을 핑계로 번번이 데이트를 제안하는 그녀를 왜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는 걸까. 행복으로 충만했던 소란의 가슴 한편이 또다시 저릿하게 아려왔다.

 

 “조만간 시간 잡아봅시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 야고보서 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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