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가 스승을 칭송하여 만든 당이 정국을 심히 어지럽히는구나.”
당파 싸움이 난무하던 조선 중종 14년, 강경한 기호학파 진중환은 거침없는 입담의 소유자였다. 영남학파에 대한 비리 폭로의 선봉에 선 그였기에 사방에는 적수들 천지였다.
“인조반정 후 산림의 도학자들을 존중하자는 허울 좋은 미명을 내걸고 권세에 급급한 이들이 많구나.”
“중상모략을 멈추지 않는 한 진중환도, 진중환의 가문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네.”
그에 대한 반격이 가중될수록 그의 입도 더욱 거칠어만 갔다. 영남학파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인신공격부터 당에 대한 비리 폭로까지, 그의 입을 거치지 않는 비난이란 없었다. 결국 그는 영남학파의 모략과 누명을 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향년 마흔아홉.
“쯧쯧, 그러니까 진중환의 저주 키워드는 ‘비리 폭로’였나 보네.”
“아마도.”
미련의 긴 한숨이 사일런스 서점의 정적을 깼다.
“우리 집안 저주 스토리는 들을 땐 흥미진진한데 마지막엔 항상 씁쓸해져. 고모도 그래?”
“동감이다.”
“참, 반훈남 씨 건은 잘 해결될 거 같아.”
“정말이야?”
“응, 변수 씨가 알아봐 주기로 했어.”
미련의 눈이 일시에 반달을 그렸다.
“내가 뭐랬니? 최 본부장 입장에선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니까.”
“그러게. 생각보다 일이 쉽네.”
소란은 창 너머 골목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너한테 마음 많이 써주는 거 확인도 한 셈이잖아.”
“응, 그렇지. 나도 기뻐.”
그녀의 영혼 없는 대꾸에 미련이 연거푸 추궁했다.
“뭔데? 왜 그래? 이 고모한테 다 말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자꾸 거슬리는 여자가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변수 씨랑 썸 타는 걸로 보일 정도야.”
“뭐? 엄연히 여친 있는 남자한테 추파를 던진다 이거지?”
“추파도 추파지만 변수 씨도 냉정하게 자르질 못 하는 거 같아.”
연연의 얄궂은 미소를 보던 그의 갈등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네가 예민한 건 아니고? 너한테 여전히 잘 해주잖아.”
“모르겠어. 처음이랑은 달라져서 좀 헷갈려.”
그의 변화가 어느 시점부터 시작된 건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자신의 입에서 ‘에로스’가 아닌 ‘루두스’가 나오던 때부터였나?
“사랑받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조금 기다려줄 필요도 있어. 사람은 로봇이 아니잖아. 때론 말도 안 되는 감정이나 어리석은 행동에 휘말리게 돼.”
기다림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걸까. 격정으로 타오르는 사랑은 어쩌면 오랜 기다림을 예견하는 걸까.
***
“올해의 책 선정 이벤트는 어떻게 돼가요?”
“호응은 꽤 좋아요. 올해 소설 쪽 약진 덕에 20대부터 40대 여성 참가율이 어마어마합니다. 연령이나 성별 편중이 심한 게 문제긴 하지만요.”
“그러네요. 앞으로 추이를 좀 더 지켜봅시다.”
아침 일찍 소집된 편집회의가 끝나자 송 실장이 부리나케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벤트 준비는 다 되셨고요?”
“무슨 이벤트요?”
“소란 씨 생일 이벤트요. 그거 때문에 내일 오후 스케줄 다 정리하셨잖아요.”
“앗!”
변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놀랐다. 지난 주 내내 고민하던 이벤트였음에도 주말을 넘기면서 새카맣게 잊고 말았다.
“어쩌죠?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오늘 왕창 준비해야겠네요. 뭐부터 시작해야 되죠?”
송 실장의 표정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 그도 그럴 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엑셀 화면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의견을 묻던 게 고작 며칠 전이었기 때문이다.
“본부장님, 요즘 정말 왜 그러세요?”
“그러게요. 저도 제가 이해 안 가네요. 파일을 어디다 저장했는지 찾지도 못하겠어요.”
변수가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주말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는 연연과 함께 보낸 주말을 떠올렸다. 이상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의도치 않은 일들이 생기곤 했다.
“연연 씨랑 같이 있었거든요.”
“네? 아니, 왜요?”
“그게 어쩌다 보니…….”
그녀의 지인이 운영하는 북카페에서 의도치 않게 그녀의 가족들을 만났다.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식사까지 함께 했다. 어쩌다 보니 와인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두 분이 사귀는 사인 줄 알겠네요. 거기다 연연 씨 부모님까지 만났으면 말 다 했죠.”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그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훑어 내렸다.
“그게 다 우연일까요?”
“네?”
“연연 씨 말이에요. 석연치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거 같아서.”
“설령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해도 연연 씨만 탓할 순 없어요. 내 태도도 문제였겠죠.”
그는 나사가 풀린 듯 비틀대는 자신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란 씨 생일 이벤트로 만회하세요. 그 죄책감이랑 괴로움 말이죠.”
***
『저희 조에서 준비한 루두스형의 사례를 발표하겠습니다.』
화면에는 ‘소개팅만 50번째인 신입생 킹카남 A의 사례’란 제목이 떠있었다.
『이 사례는 저희 조원의 같은 과 동기생이 겪은 경험에 근거했습니다. A는 나쁜 남자도, 바람둥이도 아닙니다. 그는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으며, 준수한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지인들의 평판도 아주 좋다고 합니다. 그의 특이점은 오직 연애 방식에 관한 것뿐이죠. 그는 마치 일상과도 같이 소개팅을 합니다. 킹카남답게 상대 여자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라고 합니다.』
실제 사례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A의 연애 방식은 독특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A를 연구해보고 싶은 생각이 소란에게 들 정도였다.
『그의 연애 방식은 이렇습니다. 소개팅 후 서너 번 정도 짧고도 강렬한 만남을 가집니다. 그리고는 다음 소개팅을 하면서 자연스레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입니다. 놀라운 것은 대학 입학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런 식의 만남을 50회에 가깝게 이어갔다는 사실입니다.』
『A가 루두스형이라는 근거는 뭐죠?』
소란이 묻자 발표자인 남학생이 다음 화면을 띄우며 말했다.
『첫째, A의 반복되는 소개팅은 루두스형이 추구하는 놀이 방식의 연애에 해당합니다. 둘째, 낯선 상대와 서너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정리한다는 점에서 얕은 관계를 선호하는 루두스형과 일치합니다. 셋째, 다른 소개팅과 동시에 이전 관계를 정리하기 때문에 연인을 독점하지 않으려는 성향도 보여줍니다. 넷째, 때로 만남이 중첩된다는 점에서 문어발식 연애를 즐기는 루두스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탄성도 흘러나왔다.
『A한테 우리 수업 특강이라도 요청하고 싶군요.』
진심이었다. 소란은 루두스형을 선호하는 이들의 사랑관이 어떤 것일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사랑에 대한 고민이나 생각이 있기는 한 걸까. 아울러 변수의 마음도 궁금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캠퍼스를 가로지르는데 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란 씨, 강의 끝났을 시간이네요. 보고 싶어요. 우리 내일 볼까요?』
어지럽던 마음은 이내 설렘으로 바뀌었다. 소란은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
살포시 벨을 눌렀다. 소란의 가슴은 쉴 새 없이 쿵쾅댔다.
사귄 지 두 달이 돼가고 있지만, 그가 집으로 소란을 초대한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맨살을 보여주는 것 같아 꺼려진다던 그의 말이 그동안 내내 서운했던 차였다.
“왔어요?”
그가 환희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 소란의 가슴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벅차올랐다.
“집이라고 별로 특별한 건 없어요. 회사 사무실이 좀 확대된 정도라고 보면 될 거예요.”
정말로 그랬다. 여기저기 쌓인 책들, 책장과 책꽂이로 둘러싸인 벽들, 장식장을 가득 메운 필름 카메라들…… 사무실을 고스란히 옮겨놨다 해도 믿길 정도였다.
“오랜만에 요리를 좀 해봤어요.”
주방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식탁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걸 다요?”
“케이크랑 쿠키는 오랜만에 구워봐서 모양을 좀 망쳤어요. 그래도 맛은 있을 거예요.”
배시시 미소를 머금은 그의 눈망울이 어스름한 조명에 은은히 반짝였다. 이런 류의 감정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표현할까. 그녀는 부푼 가슴을 주체할 길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걸…….”
“송 실장님이랑 한때 쿠킹 클래스 수강했었거든요. 물론 솜씨는 제가 훨씬 났죠.”
“고마…….”
“소란 씨, 설마 우는 거예요?”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고 싶어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감격에 겨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땐 행동으로 표현하는 게 최선.
그녀의 입술이 순식간에 그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그의 입에서 달콤한 쿠키 향이 풍겼다. 그가 소란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혀에서도 달콤한 향내가 전해졌다.
“변수 씨, 사랑해요.”
“생일 축하해요.”
소란의 뼈와 살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여도, 감정을 헷갈리게 하는 그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냥 좋았다. 그의 입술과 혀만큼이나, 그의 존재 또한 온전히 그녀에게 속해있는 느낌이었다.
케이크 위의 초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몸짓도 강렬히 타올랐다. 두 사람의 치아가 살포시 부딪치는 소리가 가끔씩 고요한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의 코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은 몹시도 따스했다. 소란에게 그것은 마치 자신의 숨결처럼 하나로 느껴졌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의 생명에 온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무엇인 것만 같았다.
고난도의 요가 동작을 취할 때처럼 기분 좋은 울렁거림이 시작되었다.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우리 오늘 케이크 먹을 수 있는 거죠?”
“아마도요.”
두 사람은 밤이 새도록 케이크를 맛보지 못했다. 케이크 이상의 달콤함을 오래오래 맛보고 싶었기에.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나의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 엘리자베스 브라우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