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아가페형 사랑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강의안을 준비하면서 소란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기분이었다. 아가페형 사랑. 자신의 저주 키워드가 바뀌고 있는 게 맞다면 이번에는 아가페형이 될 것이었다.
『아가페형은 헌신적 사랑을 의미하죠. 상대방에 대한 헌신의 강도가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연인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유형이죠.』
『모성애나 신의 사랑 같은 건가요?』
유부남 강사와 루두스형 사랑에 빠졌다던 여학생이 물었다.
『맞아요. 아가페형 사랑에서 부모나 신을 대신하는 존재는 바로 연인이죠. 아가페형 사랑이란 한마디로 보답을 바라지 않는 ‘희생’과 동의어인 셈입니다.』
『남녀 사이에선 희생이란 게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잖아요.』
『사랑의 출발점이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하잖아요. 그게 깊어지면 희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죠. 사랑도 결국은 주고받는 개념이에요. 사랑의 강도가 다르거나 일방향일 경우 쉽게 깨지는 이유가 바로 그거죠.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바람직하지 못해요.』
어느새 ‘희생’의 개념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20대 청년들에게 ‘희생’이란 것이 과히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듯했다.
『다들 ‘희생’이란 개념이 혼란스러운 모양이네요. 그 개념 자체도 복잡하겠지만, 희생을 사랑이나 연애 문제에 대입하게 되면 더 어려워지죠. 연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한다는 사랑관이 자칫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수도 있고요.』
변수가 아가페형 사랑으로 바뀐다면? 지나간 두 개의 키워드로 충분히 혼란을 겪은 지금,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다가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란은 여전히 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상대방이 무작정 헌신해 온다면 처음엔 좋겠지만 얼마 안 가 부담스러울 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죠. 한쪽에선 희생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인 반면, 다른 한쪽에선 부담스러운 짐으로 느껴진다면 두 사람 관계가 오래 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희생에 대한 태도가 서로 일치한다면 문제될 게 없죠. 한마디로 ‘위대한 사랑’이 탄생하는 거죠.』
위대한 사랑.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랑일까. 부모나 신의 사랑과도 같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사랑이 정말로 가능한 걸까.
***
변수는 암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동안 인화해둔 사진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가 춤추는 모습, 신기한 듯 카메라를 구경하는 옆모습, 커피를 마시며 웃는 모습…….
“이게 다 무슨 사진이에요?”
갑작스런 연연의 등장에 그의 눈이 커졌다.
“연연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웬일은요. 인화하는 법 가르쳐주기로 하셨잖아요.”
“네? 제가요?”
변수는 지난 주말을 떠올렸다. 뜻하지 않은 그녀 가족들과의 만남.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그 자리에서 인화 얘기가 나왔던 것도 같았다.
“생각 안 나세요? 그날 저희 아빠랑 필름 카메라에 대해 한참 얘기하셨잖아요.”
“아, 그랬군요. 잊고 있었네요.”
“서운하네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인화는 다른 방법으로 배우는 게 낫겠어요. 사진작가 후배를 소개해줄 수도 있고요.”
“네?”
어둠 속에서도 일그러지는 그녀의 눈이 또렷이 보였다.
“이번 주말 약속은 안 잊으셨죠?”
“무슨 약속이요?”
변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여지를 주는 거지? 더 이상 그녀에게 향하는 길을 막아야 했다.
“미안해요. 주말에 다른 일이 생겼어요.”
“무슨 약속인지는 기억나고요?”
“아, 그게 그러니까…….”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취소하시는 거군요. 정말 너무 하시네요.”
그녀의 긴 생머리가 신경질적으로 찰랑댔다. 변수는 자신의 모호한 태도에 대해 자책할 뿐이었다.
“연연 씨.”
“죄송하지만 지금은 변명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네요. 나중에 뵐게요.”
휙 돌아서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소란에게 느낄 죄책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는 그녀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
『이제 와서 취소도 안 된대. 소란아,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거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알잖아. 너라도 검진 받으면 친구한테 선물한다 셈 칠 수 있잖아.』
아침 일찍 걸려온 다정의 전화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예약해둔 건강검진을 대신 받으라는 것. 당일 취소가 안 된다는 병원 측의 통보에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사람이 바로 소란이었다.
『너 검진 받은 지 5년도 넘었다며? 우리도 이제 곧 서른이야. 건강 챙길 나이가 된 거라고.』
『오늘 검진 받으려면 진작부터 굶었어야 하잖아. 나 어제 저녁 많이 먹었는데.』
『내가 다 알아봤지. 야간 검진이라 지금부터 굶으면 된대.』
통화를 끝내자 소란은 문득 긴장되기 시작했다. 병원이라면 겁부터 먹는 그녀였기에 검진 시간이 다가올수록 식은땀까지 났다. 환자복을 입고 오만가지 검사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 댄스 수업은 송 실장님한테 조정해 달라고 하면 돼요. 걱정하지 말고 검진 잘 받아요.”
변수는 점심을 함께 먹으며 긴장하는 그녀를 다독였다.
“남들 들으면 정말 웃겠어요. 낼 모레 서른인 여자가 병원 무서워서 이렇게 떤다는 게 말이죠.”
그녀의 병원 공포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동생이 9살 때 하늘로 갔거든요. 뇌종양 때문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죠. 동생을 떠올리면 환자복이나 병원 침대가 먼저 생각나요.”
“그랬구나.”
“그때부터 그랬어요. 병원이란 말만 들어도 무서웠어요.”
“이해해요. 그치만 달리 생각하면 건강검진은 소란 씨 동생 같은 불행을 미리 막으려는 거잖아요. 긴장 풀고 편하게 생각해요.”
그의 따스한 눈빛이 큰 위안이 되었다. 그와 보내는 잠깐의 시간 동안 어느새 긴장감도 사그라들었다. 마음이 편해지자 그녀는 잊고 있던 ‘저주 키워드’가 다시 생각났다.
“저, 변수 씨.”
“네.”
“요즘 뭐 달라진 거 없어요?”
“뭐가요?”
이걸 어떻게 알아봐야 할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눈빛은 예전 그대로였다. 살갗을 스치는 부드러운 손길도 여전했다. 그가 변하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아, 아니에요.”
“나중에 데리러 갈게요. 끝나면 연락해요.”
“네, 고마워요.”
알 길이 없었다. 아가페형 사랑이 우리에게 가능하긴 한 걸까.
***
“네가 병원엘 갔다고?”
“다정이 때문에 그렇게 됐어.”
놀란 얼굴로 안일이 물었다.
“검사는 잘 받았고?”
“병원 가기 전엔 힘들었는데 막상 검사 받을 땐 아무 생각이 없어지더라고.”
“난 결과 나오기 전까지가 엄청 긴장되던데.”
“왜?”
“혹시 무슨 이상 있을까 하고.”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걷기 시작할 때부터 온 가족과 친지들의 관심사는 오직 한 살 터울 남동생의 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이 아프거나 성가실 만한 상황은 아예 불가능한 일처럼 느꼈었다.
“나 엄청 건강한 거 알잖아.”
“하긴.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애가 무슨 문제가 있겠어.”
안일이 술잔을 부딪쳤다.
“요즘엔 최 본부장이랑 어때?”
“뭐가?”
“지난번 만났을 때 좀 심란해 보이길래.”
“연애가 다 그렇지.”
소란의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의 다정한 눈빛을 이제는 무한정 믿고 싶었다.
“여유 좀 생긴 거 같네. 그래, 그러면서 사랑하는 거지.”
“너 웃긴다. 네가 누구한테 충고할 입장은 아닌 거 같은데.”
그가 피식대며 연거푸 술잔을 부딪쳤다.
“너한테 고백할 거 있어.”
“뭔데?”
“다정 씨네 댄스 학원 등록했어.”
“뭐? 너 미쳤어?”
두 사람의 만남을 9년째 저지해 왔건만 기어코 그가 일을 벌이고 만 것이다.
“너희 둘 진짜 안 어울려. 내 말 자꾸 허투루 들을래?”
“SNS에서 사진 봤는데 완전히 내 스타일이더라고. 만나진 않았지만 진작부터 메시지 주고받았어.”
“뭐?”
금시초문이었다. 아무 말 않던 다정의 앙큼한 속내에 갈증이 몰려왔다.
“연애를 너무 오래 쉬었더니 몸도 찌뿌둥하고.”
“몸 찌뿌둥하다고 연애를 해?”
“댄스 겸 연애지.”
“야!”
무슨 일에든 야무지고 적극적인 다정과 귀차니즘의 화신 안일, 인맥왕 다정과 친구라곤 소란뿐인 안일이 과연 어울리는 커플일까. 무엇보다, 활활 타오르는 정열의 여왕 다정과 친구처럼 편한 관계를 선호하는 안일의 사랑이 가당키나 할까.
“둘이 잘 안 돼도 나한테 뭐라 안 하는 거다.”
“그럼, 그럼. 그리고 시작도 하기 전에 왜 안 되는 거부터 생각하냐?”
그녀는 안일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의 조합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소란에게 그가 덧붙였다.
“다정 씨도 그러던데? 내가 딱 자기 스타일이라고.”
***
“고모!”
“무슨 일 있어? 네가 목소리 깔고 고모라 그러면 진짜 겁나더라.”
“나 어쩌지?”
소란의 눈가가 어느새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소란아, 왜 그래? 그 녀석이 또 속 썩여?”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럼 뭐야?”
소란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자신에게 이런 순간이 오게 될 줄이야.
“다정이 대신 건강검진 받은 거 알지?”
“알지. 근데 무슨 문제 있어?”
소란의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된 후였다.
“대장암이래.”
“뭐?”
미련의 입이 쉬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암이라고?
“조직검사 같은 거 더 해봐야 아는 거 아냐? 건강검진 한번 받고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겠어. 진행이 많이 됐다나봐. 일주일 뒤에 주치의 만나보러 오래.”
“말도 안 돼. 아닐 거야. 뭔가 잘못 된 거야.”
검사 당시 대장에 용종 서너 개가 발견됐다며 간단한 제거 수술을 했었다. 사전에 동의된 사항이라 수면 상태에서 진행된 일이었다. 간단한 용종 몇 개가 암 덩어리였다니. 소란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고모, 나 이제 어쩌지?”
“아니야. 의사 만나서 자세한 거 알아보고 검사 더 해봐야 돼. 미리 걱정하지 말자.”
“병원에서 암이란 걸 섣불리 알려줄 리가 없잖아. 웬만큼 확실하니까 알려줬겠지.”
눈물샘조차 말랐는지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불행과 행복이라는 쳇바퀴는 왜 잠시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 소란은 지금 이 순간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변수 씨한테 어떻게 말하지?”
《불행을 극복하는 것은 행복을 누리기보다 쉽다. 인간에게는 행복 이외에 그것과 같은 정도의 불행이 항상 필요하다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