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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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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화. 바람이 불어오고 또 가리라
작성일 : 17-11-30     조회 : 335     추천 : 0     분량 : 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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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까지 배운 동작들을 음악에 맞춰 해보겠습니다.』

 

 복부 아래쪽이 저며 왔다. 검진 결과를 받고 나서 전에 없이 느껴지는 증상이었다.

 

 ‘기분 탓일 거야.’

 

 댄스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처럼 그와 만나기로 돼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송 실장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

 

 “아니에요.”

 “본부장님한테 가실 거죠? 같이 나가요.”

 “먼저 가세요. 전 잠깐 쉬다 갈게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란은 한참 동안이나 불 꺼진 강당 안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

 

 그녀는 양 무릎에 손을 올린 채 툭 고개를 떨궜다.

 

 ‘아직 30년도 안 살아봤다고! 이건 너무하잖아!’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들이 차가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살면서 이렇게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는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푹 숙인 그녀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온기가 전해졌다. 그였다.

 

 “변수 씨, 여긴 어떻게…….”

 “여기서 뭐 해요?”

 

 불이 꺼져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엉망이 돼있을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소란의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수업 끝나고 잠깐 쉬고 있어요.”

 “송 실장님한테 들으니까 오늘 많이 힘들어 보였다던데.”

 “아, 아니에요. 힘든 거 없어요.”

 

 헝클어진 머리칼을 그가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저 눈빛에 대고 자신의 불행을 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혹여 짐이 될까 두려웠다.

 

 “무슨 일 있죠? 얘기해 봐요.”

 

 비음 섞인 그의 중저음이 텅 빈 강당 안에 울려 퍼졌다. 이토록 포근한 울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좀 생겼어요.”

 “무슨 일이요?”

 “근데 그걸 변수 씨랑 나누고 싶지 않아요.”

 “왜요?”

 “불행이 두 배, 세 배로 커질까 봐 겁나거든요.”

 

 그의 눈빛이 두어 번 흔들렸다. 눈빛을 보면서 소란의 마음도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불행이 백 배가 된대도 난 함께 나누고 싶어요.”

 

 ***

 

 변수는 늦도록 사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창 너머 먼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본부장님!”

 “실장님 먼저 퇴근하세요.”

 

 송 실장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준수 형!”

 

 형제 모드로 전환하는 걸 보니 예삿일은 아닌 듯했다. 송 실장은 소파 위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얘기를 듣고 난 후 그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넌 어쩌고 싶은데?”

 “누군가 나한테 벌을 주고 있는 거 같아. 그동안 소란 씨 두고 갈팡질팡했잖아. 어쩌면 기회를 주는 건지도 모르지.”

 “기회?”

 “만회할 기회 말이야.”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자책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오히려 힘이 났다. 아픈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일단 대학병원 두 곳에 정밀 검사 좀 예약해줘. 미국 외삼촌한테도 연락해서 병원 알아봐 달라고 해야겠어. 심장 전문의지만 대장 쪽 의료진도 잘 알고 계시겠지. 확진되면 소란 씨랑 같이 미국으로 갈 거야. 거기서 치료도 받고 충분히 회복되면 들어오려고.”

 “뭐? 여기 일은 다 어쩌려고. 아버지랑 상의한 거야?”

 “…….”

 

 변수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너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아버지 설득시킬 자신 있어. 내 평생 이런 확실한 감정은 처음이니까.”

 “소란 씨에 대한 마음이 그 정도인 줄 몰랐다.”

 “나도 몰랐어. 이번 일 있고 나서 확신하게 됐어.”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고 여겨왔건만 송 실장으로서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너한테 놀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뭐가?”

 “소란 씨 만나고부턴 내가 알던 최변수가 아닌 거 같아서. 두 사람 정말 운명인가 보다.”

 

 운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인생사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이 뒤엉킨 미스터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미스터리가 한 사람의 인생을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물들인다면? 명백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길들인다면? 이런 신비한 힘을 무어라 칭해야 할까.

 

 “형! 아버지 설득하는 거 도와줄 거지?”

 “그럼.”

 

 ***

 

 “힘내. 우리 힘내자. 힘내면 다 잘 될 거야.”

 

 다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중언부언했다.

 

 “나 괜찮아.”

 “변수 씨는 뭐래?”

 

 소란의 입가에서 배시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얘 봐라. 이 와중에 웃음이 나와?”

 “그러게.”

 “변수 씨가 뭐랬는데?”

 “미국 가서 같이 치료 받재. 병원까지 벌써 다 알아봤더라고.”

 “아직 확진 받은 것도 아닌데 벌써?”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일도 다 접고?”

 “응.”

 “와우. 변수 씨 정말 대단하다. 우리끼리 키워드 어쩌고 했던 게 무색할 정도네.”

 “그러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네.”

 

 불현듯 닥쳐온 불행을 기꺼이 나눠지겠다는 그. 소란은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를 어떻게든 저주 키워드에 끼워 맞추려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참, 안일이 만났어?”

 “벌써 들었구나? 만나긴 만났지.”

 

 다정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한텐 말 한마디 않고. 너희 둘 다 너무한 거 아냐?”

 “우리가 뭐 사귀기라도 하니? 아직은 그냥 썸 타는 정도야.”

 “걔가 네 스타일이라고 했다며.”

 “너한테 얘기만 들었을 땐 영 아닌 거 같았는데. 남녀 사이란 게 원래 이론이랑 실전이 다르잖니.”

 

 알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무엇 때문에 서로에게 빠져드는 걸까. 누군가는 말했다. 사랑의 열정은 곧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그를 사랑하면 할수록 자신의 삶도 사랑하게 될까. 그것이 병들고 비루한 것일지라도?

 

 “다정아, 나 잘 이겨낼 수 있겠지?”

 “그럼. 네가 누구니? 진소란이잖아. 잘난 건 없어도 주눅 들지 않는 진소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깔깔댔다. 20년 지기 친구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의 말이었다. 소란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에게 부족한 건 없었다. 빈틈없이 흡족한 그의 사랑,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가족과 친구들…… 지금이라면 그 어떤 역경이든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국 가기 전에 변수 씨가 청혼할까?”

 

 뜬금없는 다정의 말이 내내 그녀의 귓전을 맴돌았다.

 

 ***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저란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빚지고 도움 받은 결과물이죠. 제 영혼과 가슴, 머리를 올곧게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훈남의 가슴 벅찬 강연에 좌중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미련이 있었다.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반 변호사님은 왜 아직도 싱글이세요?』

 『글쎄요. 제가 생각보다 고지식한 면이 있나 봐요. 한 사람을 제 인생 깊숙이 받아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네요.』

 

 청중과의 대화가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미련은 몇 번이고 손을 들고 싶었지만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오실 생각도 있으세요?』

 『기회만 된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쫓기듯 떠났기 때문인지 항상 다시 돌아오고 싶은 곳이죠.』

 

 미련은 끝까지 용기를 내기 못했다.

 

 “뭘 묻고 싶었는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소란이 물었다.

 

 “글쎄, 딱히 묻고 싶은 건 없었어.”

 “궁금한 거 많지 않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한 문장으로 추려지질 않더라. 다짜고짜 날 기억하냐고 물을 수도 없고.”

 

 10년을 훌쩍 넘긴 빛바랜 첫사랑의 기억이 그녀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분이 기억한다면 어쩔 건데? 미국 못 가게 바짓가랑이라도 잡게?”

 “응.”

 “뭐?”

 

 농담처럼 들리진 않았다. ‘저자 강연회’를 빌미 삼아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녀가 아니었던가. 소란은 그녀의 ‘미련’이 얼마나 공고한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두 사람 어떻게 될지 참 궁금하다. 미련이 미련으로 끝날지 어떨지 말이야.”

 “나도 궁금하네.”

 

 소란이 배를 움켜쥐었다.

 

 “아파?”

 “응, 조금.”

 “전엔 안 그랬잖아. 검사 결과 때문에 예민해진 걸 수도 있어.”

 “그랬으면 좋겠어.”

 

 복부에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소란은 덜컥 겁이 났다. 그럴 땐 사랑의 힘이고 뭐고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만다.

 

 “오후에 진료랬지?”

 “응. 내일은 변수 씨가 예약해둔 병원 두 군데서 검사 받기로 했어.”

 “이번에 최 본부장 다시 봤어.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너에 대한 마음이 정말 깊은 모양이야. 훈남 오빠 강연회 성사시킨 것도 고맙고.”

 

 소란이 나갈 채비를 했다. 마침 서점 안으로 서너 명의 손님들이 무리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언뜻 낯익은 얼굴이 스친 듯했다.

 

 휑한 가지를 드러낸 가로수들이 새삼 쓸쓸해 보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 멀었다. 복부가 또다시 저려왔다.

 

 『소란 씨, 병원 가는 길이죠? 힘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내가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

 

 그의 메시지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검사 결과가…….”

 

 

 《슬퍼하지 말아라, 머지않아 때가 온다. 그 위에 비 오고 눈이 내리리라.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고 또 가리라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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