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갑작스러웠죠?”
조만간 청혼하려던 그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언질도 없이 결혼 얘길 꺼낸 엄마의 성급함에 변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
“그게 아니라…….”
“아침까지만 해도 결혼 얘긴 전혀 없으셨거든요. 저도 좀 놀랐어요.”
“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부모님 말씀대로 하면 어때요? 너무 촉박한가요?”
운전석에 앉은 그가 슈트 안쪽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설마 반지 같은 건 아니겠지?
소란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더 이상 일이 커지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되돌려야 했다.
“변수 씨! 실은…….”
“소란 씨, 우리 결혼해요. 나랑 평생 함께 해줘요.”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갔다.
“소란 씨 아프단 얘기 듣고 깨달았어요. 소란 씨가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말이죠. 여기 일 정리 되는대로 결혼하고 얼른 떠나요.”
그의 손에는 멋모르고 반짝이는 반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부모님이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해졌네요.”
“그, 그러게요. 좋으신 분들 같아요.”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시곤 절대 설득 안 될 일이란 생각을 하신 거죠.”
“근데 변수 씨, 할 말이…….”
“부담 갖지 말아요. 소란 씨 치료 받는 동안 저도 쉬면서 필요한 공부도 할 거니까요. 스무 살 이후론 도무지 쉰 기억이 없네요.”
그의 눈동자는 검정색도 갈색도 아닌 그저 깊은 ‘심연’의 색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의 삶 깊숙이 들어온 눈, 그녀를 혼돈과 희열로 번득이게 한 눈,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저 눈…….
“소란 씨!”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차문을 박차고 나온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소란 씨! 소란 씨!”
자신의 이름이 연거푸 불리는 것조차 외면한 채였다.
***
『저희 조가 분석한 아가페형 사랑의 예는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세간의 평은 다양합니다. 뛰어난 작가와 세기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배우의 세기의 로맨스, 24년의 나이 차이와 불륜이라는 사회적 비난을 감내한 위태로운 사랑 등등.』
『불륜으로 시작한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정갈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한 여학생이 문제 제기를 했다.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사회의 가치관이나 관습이 큰 영향을 미치죠. 하지만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논제를 판단할 절대적 잣대란 게 과연 존재할까에 대해서 말이죠.』
박사과정 때 자주 거론되던 주제였다. 식상하리만치 닳고 단 논제지만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난제이기도 했다.
『저흰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봤습니다. 진 세버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 때문에 압박해오는 정부에 쫓겨 의문의 죽음을 맞죠. 로맹 가리는 그녀가 죽은 지 1년 만에 권총 자살을 합니다. 죽음을 불사한 두 사람의 사랑을 단 몇 개의 단어나 문장으로 함축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을 관습적인 키워드에 가두는 일이 과연 정당할까요?』
발표자의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소란의 눈앞에 변수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은 그저 허공으로 흩어져버릴 뿐이었다. 소란은 몇 번이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이 꼭 사랑 때문에 죽은 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들의 인생 앞에서 누구도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기에, 우리 또한 답할 길이 없으며 답할 자격 또한 없다는 것을요.』
『두 사람의 사랑과 죽음이 서로를 향한 헌신에 기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쩌면 상대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을 준비나 자격이 안 돼 있었던 건 아닐까요?』
누군가의 의구심이 소란의 가슴에 비수처럼 와 닿았다. 헌신적인 사랑을 받을 준비와 자격, 자신에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자책감을 만회할 기회가 올지도 의문이었다.
강의실 뒷문으로 누군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안일이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안일이 손을 들며 아는 체를 했다.
“웬일이야?”
“근처에서 점심 먹었거든. 너 끝날 시간 된 거 같아서.”
“교직원이 좋긴 좋구나. 이렇게 땡땡이 쳐도 되고.”
“땡땡이 아니고 외근이거든?”
초겨울의 캠퍼스는 더없이 스산했다. 잔디 위를 뒹굴던 푸른 청춘들도 두터운 패딩 점퍼 속에 몸을 움츠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정 씨한테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암 선고 받은 거? 아님 결과 뒤바뀐 거? 아님 변수 씨한테 말 못하고 있는 거?”
“응, 전부 다.”
“와, 너희가 사귀니까 편하긴 편하네. 한 사람한테만 보고하면 되고 말이야.”
그녀의 빈정거림도 아랑곳 않고 안일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슬그머니 건넸다.
“나 청혼까지 받았어.”
“뭐, 정말이야?”
“변수 씨 부모님까지 허락하셨어. 식 올리고 미국 가라셔.”
“오예. 너도 원하던 바 아녔어?”
변수의 마음을 확인하고파 여기까지 왔지만 그녀는 막상 두려웠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가진 듯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최 본부장한테 털어놓는 게 그렇게 어려워?”
“모르겠어. 처음엔 뭔가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젠 미안해서 말을 못 꺼내겠어.”
“음.”
“이젠 너무 늦었는지도.”
뜨거운 커피를 싫어하는 그가 연신 컵 속으로 입김을 불어넣었다. 심란한 친구가 걱정돼 여기까지 와준 그였다.
“다정이랑은 잘 돼가?”
“글쎄, 아직은 지켜보는 중이야.”
“준비도 되기 전에 풍덩 빠지는 것보단 천천히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근데 다정 씬 이런 내가 영 답답한가 봐.”
활활 타는 듯한 다정의 성격을 아는 그녀로서는 백번 이해되었다.
“남자가 그렇게 나오면 좀 답답하긴 하지. 특히 다정인 더 그럴 거야.”
“친구로선 괜찮단 거잖아. 참 이상해. 연인이랑 친구랑 왜 이렇게 다른 거냐?”
두 사람의 만남을 극구 뜯어말린 이유를 그도 절감하는 모양이었다.
“혹시 아니? 그 접점을 너희가 찾게 될지.”
“나도 그러면 좋겠다. 서로 속도가 안 맞는 것만 빼면 완벽한 커플일 텐데.”
“남녀 사이에선 속도 조절이 생명이지. 그걸 빼고 어떻게 완벽을 논하냐?”
조심스레 탐색 중인 남녀 사이에도 고민은 산더미인 듯했다. 안일의 얼굴이 전에 없이 까칠해진 것도 이해할 만했다.
***
“혹시 병원에서 연락 왔나요?”
어젯밤 있었던 회식 탓인지 종일 숙취로 괴로워하는 송 실장에게 물었다.
“어, 소란 씨한테 무슨 얘기 못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요?”
“검사 안 받으셨던데.”
“두 군데 모두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차에서 부리나케 달려 나간 뒤로 그녀에게선 연락조차 없었다. 몸이 더 안 좋아진 걸까. 변수는 회사 일을 서둘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점에서 청혼하는 건 영 아니었던 걸까요?”
“글쎄요. 마음의 여유가 없긴 하겠지만 공식적인 부부가 되면 더 안정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잖아요. 잘 하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송 실장의 말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청혼 이후 내내 마음 졸여왔던 게 사실이었다.
“여기 일 정리하려면 송 실장님이 많이 도와주셔야 돼요. 오늘부턴 좀 더 서둘러야겠어요. 당장 팀장 회의 소집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변수의 공백에 대한 갑작스런 통보에 팀장들은 저마다 술렁였다.
“본부장님, 혹시 저희 회사 미국 진출하나요?”
“대표님께 뭐 잘못한 거라도 있으세요? 너무 갑작스럽네요.”
“본부장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여러 가지 차질을 빚을 텐데요. 꼭 지금이어야 하나요?”
스스럼없고 활기찬 사내 분위기를 선호하는 경영관 덕에 변수는 솔직담백한 리더십을 발휘해왔었다. 자신의 부재를 염려하고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마땅했다.
“여자친구가 많이 아프거든요. 당분간 치료에 전념할 계획입니다.”
“네?”
여러 개의 놀란 눈들이 모두 변수의 입을 주시했다.
“조만간 결혼식도 올릴 거고요.”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흘러나왔다.
“어머, 본부장님 대단하시네요.”
“이런 면이 있으신 줄 미처 몰랐네요. 너무 멋지십니다.”
그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그녀의 손을 잡고 당장이라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다.
“당분간 편집회의는 윤 팀장님이 맡아 주시고요. 제가 맡았던 신간 리뷰랑 칼럼은 최 팀장님이 대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회의는 늦도록 계속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정리하는 게 그녀를 위한 최선의 방책인 것 같았다.
‘소란 씨,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론 웃는 날만 있을 거예요.’
***
소란은 오디오의 볼륨을 최대치로 올렸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나면 무슨 수든 생길 것만 같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 속에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의 아홉수 저주는 어쩌면 지금의 이 괴로움이 아닐까.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머뭇거리던 모습 속에 저주가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요란한 일렉트릭 사운드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춤인지 광기인지 모를 그녀의 몸놀림은 천정을 뚫을 듯 에너지를 발산했다.
‘괜찮아.’
‘괜찮은 걸까?’
가방 안주머니에 며칠째 넣고 다니던 반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당장 저 반지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누군가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정이일까?
“거기 소란 씨에요?”
《당신의 격렬한 눈물로 제발 나를 저주하고, 축복하시기를 – 딜런 토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