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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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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화. 행복한 주인이 되다
작성일 : 17-12-06     조회 : 341     추천 : 0     분량 : 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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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수 씨가 여긴 어떻게…….”

 

 뜻하지 않은 그의 등장에 소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가방에 넣어놔서 못 받았나 봐요.”

 “다정 씨한테 연락했더니 여기 있다길래 와봤어요.”

 

 땀으로 범벅이 된 소란의 얼굴을 그가 슬며시 닦아주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보니까 꽤 격렬하게 추던데.”

 “그래 보였어요?”

 

 소란의 들숨과 날숨이 거칠게 반복되었다.

 

 “가슴 답답할 땐 이 방법이 최고거든요.”

 “그래요? 나도 한번 써먹어 봐야겠네요. 소란 씨한테 좀 배워둘걸.”

 

 그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에 소란의 가슴이 시려왔다.

 

 “춤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엔 다정이가 발레 하는 모습이 좋아 보여 시작했어요. 춤을 전공해서 전문 댄서가 돼볼까 생각도 했었죠.”

 “근데 왜 안 했어요?”

 “내 유일한 분출구가 춤인데 그게 직업이 되면 안 될 거 같았어요. 댄서 친구들이나 다정이가 춤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고요.”

 

 공감의 표시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수 씬 왜 사진작가나 바리스타가 안 됐어요?”

 “좋아하는 일들이긴 한데 딱히 열정 같은 게 없었거든요.”

 “열정이요?”

 “주어진 상황을 성실하게 해내거나 관심 가는 일에 몰두하는 수준이죠. 그 이상 타오르는 감정은 좀처럼 생기질 않더라고요.”

 

 소란의 호흡이 잦아들었다. 휑한 공간 안에 오롯이 두 사람만 함께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낯설었다.

 

 “지금은 좀 다르지만.”

 “네?”

 “열정이란 감정을 처음 가져봤거든요. 그것도 사람한테.”

 

 그의 그윽한 눈길이 소란을 향했다. 열정의 화살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변수 씨, 나 할 말이 있어요.”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이 아니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알아요.”

 “네? 안다고요?”

 

 ***

 

 진남이의 집안은 고려 말 이래 명문가로 위세를 떨쳤다. 문무를 겸비한 남이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왕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자네 덕에 이시애의 반란을 4개월 만에 잠재울 수 있었다네. 자네의 혁혁한 무공에 크게 보답할 것이니라.”

 

 세조의 격찬을 등을 업은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남이의 기세를 꺾은 건 진 씨 집안의 아홉수 입방정 저주.

 

 ‘전하께선 귀성군을 너무 편애하는군.’

 ‘어찌하면 귀성군이 전하의 눈 밖에 날 수 있을까?’

 ‘몇 차례 눈 밖에 나면 금세 몰락하고 말 텐데.’

 

 토벌대에서 함께 싸운 귀성군 이준을 시기한 나머지, 남이는 그를 모략할 기회만 찾고 있었다.

 

 세조와의 활쏘기 시합이 있던 날, 남이는 만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꼬인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전하, 소인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귀성군을 지나치게 아끼시는 듯합니다. 소인은 그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사료되옵니다.”

 

 무르익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세조의 얼굴 또한 일순간 어두워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세조가 진남이한테 사약이라도 내렸어?”

 

 소란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 미련을 재촉했다.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갔지. 근데 진남이의 시기가 계속되니까 세조도 더 이상 못 참았던 거지. 그 뒤론 고위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여생을 보냈대. 승승장구하던 과거는 한갓 추억으로만 남은 거지.”

 “왕의 눈 밖에 난 게 결국은 자기 자신이었네. 쯧쯧.”

 “그러게. 그 놈의 입방정이 웬수지.”

 

 일찍이 탈무드는 말했다. 말이 입 안에서 돌고 있을 때 그 말은 노예에 불과하지만, 일단 입 밖으로 튀어 나오면 주인이 되고 만다고.

 

 소란에게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변수에게 솔직히 터놓지 못해 맴돌기만 한 말들 때문에 노예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입 밖으로 토해낸 말들로 인해 오히려 행복한 ‘주인’이 되었다.

 

 “최 본부장 말이야. 생각할수록 참 괜찮은 사람이야.”

 “응, 맞아. 정말 좋은 사람이야.”

 

 예약해둔 병원에서 소란이 검사받지 않았음을 안 그는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 더구나 그녀는 청혼 이후 연락두절 상태였다. 소란이 처음 검진 받은 병원에 문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된 그.

 

 “네가 말 안한 걸 알면서도 묵묵히 받아준 거잖아. 그러고 보면 그 사람 확실히 대인배야. 아님 널 무지막지하게 사랑하던가.”

 “그러게. 나도 이번에 확신하게 됐어. 내 아홉수 키워드는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었던 거 같아.”

 

 그의 아가페형 사랑을 냉큼 받아도 되나 싶을 만큼 날아오르는 기분. 이게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미리 말 못한 거 화 안 나요? 나 때문에 여기 일까지 모두 정리하려고 했잖아요.”

 

 소란이 물었을 때 그는 오히려 반문했다.

 

 “소란 씨가 안 아프다는데 그것만큼 기쁜 게 어디 있어요? 다른 생각은 하나도 안 나던데요.”

 

 아…… 그에게 빚진 마음을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을까.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청혼까지 받았으니 하는 말이지.”

 

 무거운 족쇄마냥 가방 한구석에 처박아둔 반지를 내밀었을 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죠. 소란 씨 마음이 변한 게 아니면 돌려줄 필요 없어요. 갖고 있다가 준비되면 천천히 대답해줘요.”

 “그래도 어떻게…….”

 “소란 씨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이제 조급할 필요 없잖아요. 우리 차근차근 가요.”

 

 반지는 여전히 소란의 가방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더 이상 ‘무거운 족쇄’가 아닌 ‘가벼운 설렘’인 채로.

 

 ***

 

 “왜요? 주말엔 왜 만날 수 없죠?”

 

 다정이 볼멘소리를 했다. 안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난 호흡이 긴 사람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계속 달리기만 하면 금방 지친다는 거죠.”

 “나랑 같이 보내는 게 안일 씨한텐 지치는 일인가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두 사람의 속도는 엇나가기 일쑤였다.

 

 “이제야 알겠네요. 소란이가 왜 진작 우릴 만나게 안 했는지.”

 “여기서 소란이 얘기가 왜 나와요?”

 “걔가 그랬거든요. 남녀 사이엔 속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네?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어이없다는 듯 야속한 눈길을 보내는 그녀에게 더 이상의 소통은 불가한 듯했다.

 

 “시간을 좀 가져요, 우리.”

 “지금 시간 갖고 있잖아요. 이만큼 천천히 시간 갖는 커플도 있나요?”

 “…….”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무사안일’의 평온함이 그리웠다. 연애는 애당초 ‘무사안일’과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평지풍파’에 가까운 복잡다단한 개념임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중이었다.

 

 “그럼 그날은 왜 그랬어요?”

 “네? 그날이라면…….”

 

 그의 눈에 핏발이 서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실수였나요?”

 “그게, 일방적인 건 절대 아녔다고 생각하는데.”

 

 다정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일었다. 그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날’을 추궁하는 그녀에게 더이상 대꾸할 길이 없었다.

 

 “천천히 가자는 둥 속도를 맞추자는 둥, 그런 건 다 핑계 아닌가요? 그런 사람이 처음 만난 날 그렇게…….”

 “다, 다정 씨!”

 “난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닌가요?”

 “저기, 미안한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나중에 봐요.”

 

 황급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얄미웠다. 급기야 다정의 입에서는 거친 외마디가 흘러나왔다.

 

 “나쁜 자식!”

 

 ***

 

 송 실장은 망연히 창밖을 응시했다. 동생의 결혼식에 다녀온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임신 중이지 않은가.

 

 “송 실장님!”

 

 변수의 외침을 듣고서야 멍한 시선을 거두는 그.

 

 “오후에 본사 회의랑 일간지 인터뷰 있었던 거 같은데. 몇 시죠?”

 “…….”

 “실장님! 오늘 스케줄 어떻게 되냐고요.”

 

 변수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만 보던 그가 엉뚱한 대꾸를 했다.

 

 “편집회의 내일 아침 9시, 온라인서점연합회 모임 모레 오후 2시…….”

 “실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아, 오늘 스케줄 물으셨죠.”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송 실장이 허겁지겁 노트북을 열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네? 아, 아니에요.”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변수는 급히 형제 모드로 전환할 필요를 느꼈다.

 

 “형, 빨리 말해. 뭐야?”

 “순수가 한국 들어온대.”

 “그래? 신랑이랑 다니러 오는 거야? 아니면 출산하러?”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가족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왜 불행해야 할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길 없어 벽면을 주먹으로 꽝 치고 말았다.

 

 “형!”

 “이 나쁜 자식을 어떻게 해야 되지?”

 

 괴로운 듯 마른세수를 반복하는 그를 진정시키기란 쉽지 않은 듯했다.

 

 “대체 누구 말하는 거야?”

 “순수 남편 말이야. 그 사기꾼 같은 자식!”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나한테 무슨 일 있어?”

 “응, 그런 거 같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당신이 내 옆에서 노래 부르니, 황야도 천국이 되네 – 오마르 하이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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