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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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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화. 생쥐는 혼자가 아니다
작성일 : 17-12-07     조회 : 339     추천 : 0     분량 : 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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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수의 시선은 한동안 필름지에 고정돼 있었다. 격렬하게 춤추는 다정의 모습. 그의 입가에는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마음껏 춤출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가 필름 하나를 골라 인화기 틀에 조심조심 끼워 넣었다. 측면 조리개를 능숙하게 돌린 다음 드러난 상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아팠다면 이런 멋진 모습도 당분간 못 봤을 텐데.’

 

 그의 처진 눈꼬리가 온화하게 꼬물거렸다. 선명하게 드러난 상에 맞춰 필름 틀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한 치의 오차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레버를 신중히 조정하고 나서야 한껏 흡족한 미소를 짓는 그.

 

 ‘신께 감사드립니다. 이렇듯 그녀를 건강하게 돌려주시다니.’

 

 선반에 놓인 확대경을 집어 들어 초점을 맞춰나갔다. 육안으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평소처럼 기기를 사용했다. 빈틈없는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란 씨가 언제쯤 반지를 낄까?’

 

 레드필터를 삽입한 다음 중심부에 슥슥 물을 발랐다. 인화지를 깔끔하게 부착하려면 물만한 게 없었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레드필터를 뺀 다음 노광(*사진 감광 재료를 감광시키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 초시계를 살폈다. 그리고는 3초, 5초, 8초 간격으로 가리개를 올렸다.

 

 ‘부모님껜 언제 말씀드리지?’

 

 노광 작업을 끝낸 인화지를 현상액에 조심스레 담갔다. 시간을 확인한 후 그는 잠시 숨을 돌렸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결혼도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시면 어쩌지.’

 

 담가둔 인화지를 간간이 확인하며 기지개를 쭉 폈다. 3분 정도 흘렀을까. 상이 점점 선명히 떠올랐다. 현상액에서 건져 올린 인화지를 대여섯 번 물에 헹구며 그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니야, 그러실 리 없지. 사랑스런 소란 씰 두고 반대하실 이유가 뭐겠어.’

 

 헹궈진 인화지를 슬며시 픽서에 담갔다. 잠시 뒤 그는 기대에 찬 얼굴로 불을 켰다.

 

 ‘와우, 소란 씨 정말 예쁘다.’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토록 아름다운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로펌 면접 때문에 2주 뒤 한국 들어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보고 싶어, 미련아.』

 

 훈남이 보낸 메시지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 읽는 미련. 그녀의 모습은 마치 사춘기 소녀 같았다.

 

 “그렇게 좋아?”

 

 미련은 감격에 겨운 듯 고개만 끄덕였다. 급기야 그녀는 훈남의 메시지를 읊기 시작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보고 싶어, 미련아…… 보고 싶어, 미련아.』

 

 그녀는 주문을 외우듯 메시지를 웅얼거렸다.

 

 “반신반의했는데 이 분도 정말 고모를 못 잊나보네.”

 “그럼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줄 알았니? 듣고 보니 기분 나쁘다, 너.”

 “그런 뜻이 아니라, 고모가 첫사랑 운운하는 게 왠지 현실감이 없어 보였거든.”

 “그만큼 네가 속세에 찌들었단 뜻이야. 첫사랑에 목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니?”

 

 미련은 ‘보고 싶어’란 문구를 또다시 읊조렸다. 더 이상은 못 들어줄 지경이었다.

 

 “최 본부장한테 고마워서 어쩌지?”

 “강연회 주선해준 거?”

 “어머, 최 본부장이 말 안 해? 로펌 건도 그 사람이 주선해 준 건데.”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강연회 주선에 대해서도 자신은 별로 한 일이 없다며 겸연쩍어 하던 그였다.

 

 “이래서 그 사람한테 더 신뢰가 간다니까. 자기가 한 일을 떠벌리지 않고 묵묵히 챙겨만 주잖아. 이런 남자 정말 흔치 않아.”

 

 소란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을 위해 힘써준 일이기에 과시할 만도 한데, 그녀에게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었다. 깊고도 넓은 그의 속내에 무한정 신뢰가 솟았다.

 

 “더군다나 거긴 우리나라 최고 로펌이잖아. 야, 진소란! 이 정도로 능력 있는 남잘 두고 뭘 망설이냐? 다 버리고 아픈 너랑 떠날 생각까지 했었는데 청혼 아니라 더한 것도 받아줘야지, 안 그래?”

 “그런가?”

 “당연하지.”

 

 생각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단호함이 서렸다. 하지만 소란의 얼굴은 사뭇 심란했다. 암 소동 탓에 미안했던 마음이 채 가시지 않은 터였다. 게다가…….

 

 “정말 괜찮을까?”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저주 키워드 말이야.”

 “아직도 그 생각이야? 이젠 그런 거 아무 의미 없잖아. 최 본부장 하는 거 봐라. 이런 게 무슨 저주냐?”

 

 미련은 벌써 잊은 게 틀림없었다. 그의 모습이 에로스형에서 루두스형으로, 또다시 아가페형으로 바뀌어 왔다는 것을. 우연이 세 번 겹치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지 않은가. 자신의 아홉수 입방정 저주는 ‘카멜레온 같은 사랑’임에 틀림없었다.

 

 “두렵거든.”

 “뭐가?”

 “다음엔 어떻게 변할지.”

 

 ***

 

 “뭐 그런 자식이 다 있어?”

 “차라리 일찌감치 헤어지길 잘 했어.”

 

 변수네 본가 거실에는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였다. 변수네 가족, 그리고 순수와 준수 남매. 부모님은 상처받은 순수를 어떻게든 위로하려는 쪽이었다. 반면 준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쉬이 잠재우지 못했다.

 

 “그 자식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당장이라도 일본으로 가야겠어요.”

 

 그의 분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었다.

 

 “준수야, 진정해라. 그쪽에 변호사 보내서 자초지종 알아보고 귀책사유 있으면 나도 가만 있지 않을 거다.”

 

 최정의의 분노는 이성적이지만 현실적이었다. 부친의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변수도 마찬가지였다.

 

 “형, 문제 있으면 내가 직접 가서 알아볼 거야. 걱정 마.”

 

 고개를 떨군 채 침묵하는 순수에게 자꾸만 그의 눈길이 갔다. 이런 감정이 연민일까. 어쩌면 첫사랑의 불행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일 수도.

 

 “당분간 여기서 지내. 준수 오피스텔은 임산부한텐 여러 모로 안 좋아. 출산 때까지 내가 뒷바라지할 테니까 마음 편히 갖고.”

 “면목 없어요, 아줌마.”

 “면목 없는 건 우리야. 하늘에서 너희 아버질 어떻게 만나겠냐? 형님이 나한테 어떤 분이셨는데.”

 “죄송해요, 아저씨.”

 

 두 분의 따스함이 결국 순수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말았다. 참아왔던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울어? 이게 다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거야.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한테나 철썩 마음 주니까 이런 사단이 나잖아!”

 “형은 왜 누나한테 그래.”

 

 변수의 마음 또한 여간 착잡한 게 아니었다. 한동안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네 여자친군 언제 다시 온다냐?”

 “어? 변수 여친 있어?”

 

 흘릴 눈물을 다 흘렸는지 순수가 충혈 된 눈으로 물었다.

 

 “응, 그렇게 됐어.”

 “정말? 놀랄 일이네. 너 누구 사귀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화제는 자연스레 변수의 연애사로 흘렀다.

 

 “언제 어디서 만났는데? 벌써 집에 인사까지 왔었어? 나한텐 왜 한마디도 안 했어?”

 “누난 뭐가 그렇게 궁금해? 하나씩 좀 물어봐.”

 

 그의 멋쩍은 기색을 눈치 챘는지 준수가 불쑥 나섰다.

 

 “내가 다 꿰고 있지.”

 “오빠가? 요즘엔 비서실장이 상사 연애까지 챙겨?”

 “우리가 단순한 직장 동료 사인 아니니까. 내가 형으로서 챙겨줘야 할 부분이 많지.”

 “오빠도 참, 자긴 모솔이면서 대체 누굴 챙긴다는 거야?”

 

 순수의 비아냥에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훈훈함이 번졌다.

 

 “모솔이 뭐냐?”

 

 최정의가 처음 듣는다는 듯 묻는 통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아저씨 모르세요? 명색이 포털사이트 대표신데 인터넷 약어 정돈 아셔야죠. 모태솔로의 줄임말이 모솔이에요.”

 “모태솔로? 그러니까 준수 얘가 연애 경험이 전무하단 거냐?”

 “그렇죠. 나이 마흔다섯에 모솔이란 건 진짜 심각한 일이죠.”

 “변수가 급한 게 아니네. 이 녀석부터 어떻게 해봐야겠다.”

 

 다시 한 번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각자의 가슴속엔 남모를 그늘 하나씩은 품고 있기에.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을 전 인류가 공감하는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모양이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거실에 모인 가족들을 바라보며 변수는 톨스토이에게 새삼 격한 동질감을 느꼈다.

 

 ***

 

 “반훈남 씨 로펌 얘긴 왜 안 했어요?”

 “아, 그거요? 제가 별로 한 일도 없어요. 그분이 워낙 출중하셔서 성사된 일이죠.”

 

 그의 겸손에 소란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난 이 사람 작품 너무 좋아요. 백설 공주에 대한 독창적 시선이 마음에 든달까.”

 “맞아요. 획일화된 미와 소비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비판하는 시각이 참 인상적이죠. 여성학 공부하면서 많이 고민하던 문제였죠.”

 

 전시관은 꽤나 한산했다. 폴 맥카시란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무척이나 초라한 풍경이었다. 대학원 때 토론 주제로만 언급하던 작가였는데 때마침 국내 전시가 열려 반갑던 차였다.

 

 “내가 이 작가에 관심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뭐랄까, 느낌?”

 “정말요?”

 “사랑하면 다 알게 된답니다. 소란 씨가 뭘 좋아할지, 무슨 생각을 할지 말이죠.”

 

 그의 눈매는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공공장소임을 무시하고 와락 달려들고 싶을 만큼.

 

 “부모님이 언제 또 올 거냐고 물으세요.”

 “아, 네. 다시 인사드리는 게 맞죠.”

 “부담돼요?”

 “그건 아니지만…… 네, 좀 그렇기도 해요.”

 

 그가 소란에게 바싹 다가섰다.

 

 “민망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커요.”

 “검진 결과 잘못됐단 거 아시고 많이 좋아하셨어요. 빨리 얼굴 보고 싶다고 하실 정도니까요.”

 

 자신의 저주 키워드에 대해 말해줘야 할까. 소란은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두 사람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기에.

 

 “변수 씨, 집안 내력이 유전된단 얘기 들어봤어요?”

 

 

 《생쥐야,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일은 제멋대로 어그러지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 – 로버트 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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