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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필름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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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화. 내 속에 고조곤히 온 그대
작성일 : 17-12-08     조회 : 310     추천 : 0     분량 : 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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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내력이 무슨 유전자도 아니고 어떻게 유전이 돼요?”

 “그, 그렇죠. 유전될 수가 없죠.”

 

 변수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진 씨 집안의 희귀한 내력을 납득시키기란 쉽지 않을 터.

 

 “근데 그런 건 왜 물어요?”

 “아니에요. 우리 얼른 밥 먹으러 가요.”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소란의 머릿속은 전기회로를 들여다 볼 때만큼 복잡했다.

 

 “부모님 집에 순수 누나 와있어요.”

 “송 실장님 동생 분요? 얼만 전 결혼했다던?”

 “네. 근데 남잘 잘못 봤더라고요. 아주 나쁜 놈이더라고요.”

 

 ‘나쁜’ 놈의 정체는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어엿한 극단주인데다 허우대도 멀쩡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사실혼 관계의 내연녀와 어린 딸까지 있었다. 야쿠자 조직과 비밀리에 연계돼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람 쉽게 못 믿겠네요.”

 “그러게요. 누나가 좀 순진한 데가 있지만 그걸 악용하는 사람이 진짜 나쁜 놈이죠.”

 “송 실장님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말로 다 못하죠.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어요.”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모솔일 수밖에 없는 그의 사연 또한 드라마 자체였다. 일찍 세상을 뜬 부모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온 그였다. 제 자식처럼 돌봐준 변수 부모에게 짐이 되기 싫었기에,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송 실장님 고생 많으셨구나.”

 “스무 살 때부턴 저희 부모님한테 오히려 용돈을 드렸다니까요. 순수 누나 뒷바라지도 혼자 다 했는걸요. 물론 누나도 자립심 하난 끝내주지만.”

 

 송 실장이 그와 일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변수네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폐라며 극구 거절해오던 그였지만, 고생해 모은 재산을 일순간에 사기당한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젠 회사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됐죠. 아빠나 저나 송 실장님 없으면 절대 안 되거든요.”

 

 어떤 이의 고단한 삶은 왜 정당히 보상받을 수 없는 걸까. 누군가의 불운은 왜 또 다른 불운을 부르는 걸까. 그녀는 송 실장의 삶을 관통하는 고단한 운명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

 

 말쑥한 차림의 다정이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전직 발레리나답게 길쭉하고 여리여리한 외모는 여전했다.

 

 “이 분이 누구신가? 주다정 양 아니신가? 오늘 스타일 좋은데?”

 “좋긴.”

 “우리 둘이 공연 보는 거 오랜만이다, 그치?”

 “그러네. 뭐가 그리 바쁜지 이런 데 올 엄두도 못 냈네.”

 

 춤이라는 공통분모 덕에 두 사람은 줄곧 공연을 함께 보러 다녔다. 둘 다 뮤지컬이나 오페라 같이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공연을 선호했다. 다정이 발레를 그만둔 뒤로는 발레를 비롯한 클래식 무용은 공연 목록에서 자연스레 빠지게 되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소란아, 이 부분은 언제 들어도 좋지 않니?”

 

 공연이 후에도 다정의 눈은 꿈을 꾸듯 여전히 몽롱했다.

 

 “고 2때 국어 선생님이 읽어 주셨던 거 생각난다. 우리 그때 완전 반했었는데.”

 “누구한테? 선생님? 아님 시?”

 “둘 다지.”

 

 사실이었다. 다정은 그 무렵 국어 선생님과 한창 사랑에 빠졌더랬다. 물론 짝사랑이었지만 그녀의 열병은 실로 대단했었다.

 

 “하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뭘 해도 다 좋아 보이지.”

 “말해 뭐 해. 난 국어 선생님 발톱의 때까지 좋았다니까.”

 “그랬지. 다정이 넌 뭐든 열정적이잖아.”

 

 공연 도중 다정이 울음을 터뜨린 순간이 있었다. 소란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까 왜 울었어?”

 “응? 티 났어?”

 “응, 엄청.”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 나올 때 더 이상 못 참겠더라고.”

 

 그녀가 참지 못했던 건 눈물일까, 이 모진 세상일까. 그 옛날 못다 이룬 짝사랑일까, 아니면 뜻대로 되지 않는 지금의 사랑일까.

 

 “응, 이해할만 해.”

 “뭘?”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냐, 넌 내 마음 절대 몰라.”

 “왜?”

 

 다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일과의 만남 이후 부쩍 숨긴는 게 많아진 그녀였다.

 

 “안일이랑 뭐가 잘 안 돼?”

 “응, 많이.”

 “그래? 안일인 별 말 없던데.”

 “그러시겠지. 일생이 태평한 사람이니까.”

 

 소란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걸까. 두 사람의 속도 차이는 영 좁혀지지 않는 걸까.

 

 “걔가 좀 그렇지? 네가 뭐 때문에 힘든지 알 거 같아.”

 “아냐, 넌 모른다니까. 친구랑 연인은 다르잖아.”

 “뭐가 문젠데? 속 시원히 얘기 좀 해봐.”

 

 들고 있던 숟가락을 툭 내려놓고는 긴 한숨을 내쉬는 그녀. 어쩐지 예사롭지 않았다.

 

 “너도 알지? 서로 메시지만 주고받다 안일 씨가 댄스 수업 온 날 처음 만난 거.”

 “응, 알지.”

 “그날 우리 잤어.”

 “뭐?”

 

 속도 차이에 대한 소란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던가? 초고속으로 달리는 두 사람의 사랑을 지레 걱정했던 걸까.

 

 “근데 뭐가 문제야?”

 “그게 다였어.”

 “엥?”

 “첫날 자고 나서 지금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어. 며칠 전에 막 따지고 드니까, 자긴 원래 호흡이 긴 사람이라며 생각할 시간을 좀 갖재.”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 만난 날,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든 게 문제였을까. 녀석은 지금 느긋한 탐색의 시간이 절실할 터였다.

 

 “그래서 결심했어.”

 “뭘?”

 “더러워서 버리기로.”

 “뭐?”

 

 ***

 

 회의 내내 뾰로통하던 연연의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다. 사적인 문제 때문에 일하면서 불편을 겪는 게 자꾸만 찝찝했다. 무엇보다, 지난 시간들에 대한 자책의 마음을 이제는 거두고 싶었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그가 연연의 눈치를 살폈다.

 

 “본부장님,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네? 아, 네. 잠깐 제 방으로 올래요?”

 

 트레이드마크이던 그녀의 긴 생머리는 싹둑 잘려져 있었다.

 

 “헤어스타일 바뀌었네요.”

 “네, 좀 바꿔 봤어요. 괜찮은가요?”

 “네, 뭐.”

 

 그녀의 찰랑거리는 생머리에 설렜던 적도 있었건만, 지금으로선 그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예요? 일 때문인 거 같진 않은데.”

 “맞아요. 좀 상의할 게 있어서요.”

 

 연연의 눈동자가 두어 번 흔들렸다. 그 앞에서 이토록 긴장이 된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 일은 할 만한가요?”

 “네, 뭐 그렇죠.”

 

 변수는 망설여졌다. 송 실장이 묘안이라며 추천해준 방법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녀에게 반발심을 일으킬 소지도 있었다.

 

 “본사 마케팅팀에 자리 하나 비었거든요. 입사 때 1지망이 마케팅팀이었던 걸로 아는데.”

 “저보고 본사로 가란 말씀이시군요.”

 “말하자면 그렇죠.”

 “제가 원한 건 북마켓 마케팅팀이었죠. 다른 덴 관심 없습니다.”

 “그랬나요?”

 

 얘기가 이대로 마무리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왕 말 꺼낸 김에 강하게 나갈 필요도 있겠다 싶었다.

 

 “인사이동은 회사 내부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선택의 문젠 아니란 거죠.”

 “그게 사적인 감정에 근거한 거여도 그런가요?”

 “사적인 감정이라는 객관적 근거라도 있나요?”

 “본부장님!”

 

 연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난감하긴 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연연 씨가 객관적 근거 운운할 입장은 아니죠. 알다시피 애당초 입사 자체가 객관적이질 않았잖아요.”

 “…….”

 

 특채라는 미명 하에 ‘특별히’ 입사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그녀였다. 자신이 받은 나름의 ‘특혜’ 앞에 당당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문제만은 아닙니다. 신중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변수 씨…… 흑흑.”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단발로 자른 머리가 어깨 위에서 들썩였다.

 

 “강연연 씨, 진정하세요.”

 

 변수의 영원한 구원투수 송 실장이 등장했다. 그가 연연의 팔을 부축해 방을 나갔다.

 

 휴우. 변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노트북을 열었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집안 내력 유전’를 입력했다. 대머리, 사주팔자, 키, 예술가, 부전자전, 가창력 등등. 유전이라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시시콜콜한 글들이었다.

 

 ‘소란 씨가 왜 그런 걸 물었지?’

 

 그녀가 말하는 집안 내력이란 게 뭔지 궁금해졌다. ‘유전’이란 단어까지 더해지니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분명 소란 씨 집안 얘긴 거 같은데.’

 

 별 의미 없는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왠지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그녀의 영혼과 삶이 그리는 풍경들, 가슴 속 켜켜이 쌓인 감정들까지 모두 다 보듬고 싶었다. 그녀라는 존재는 소리 없이 다가와 어느새 자신의 영혼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 웬일이세요?”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사일런스 서점을 찾은 변수는 뻘쭘한 기분이 들어 괜스레 책들만 뒤적였다.

 

 “훈남 오빠 일 너무 감사했어요. 뭐라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다짜고짜 물으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저기, 고모님. 혹시 소란 씨 집안에 독특한 내력 같은 게 있나요?”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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