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선배."
"왜? 나 안 죽었어."
"선배가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정섭이 아무 대답도 못했다.
"선배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저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
아홉 명이 예라고 대답해도 한 명이 아니오라고 하면 그 한 명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던 분이 선배입니다. 그런 선배가 이럴 수는 없습니다."
원준이 흥분하여 앞에 있는 정섭에게 소리쳤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기자실이고 안에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에 큰 소리로 원준이 고함치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그런데 정섭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 안에 있는 CCTV를 의식하고 있었다.
연신 주변 카메라를 관찰하더니 갑자기 상민이 원준의 손을 잡고는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따라와 봐."
뭐가 특별한 이야기를 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하려는 모양새였다.
둘은 그렇게 하여 건물 옥상의 테라스로 올라왔다. 테라스로 나오자 정섭이 말을 하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모습은 거기에 사람이 있나 없나 살피는 것 같았다.
나흘 전이다. 정섭에게 전화가 왔고 그 전화를 받고는 자기가 예전에 조사했던 30명에 대한 명단을 준 것이 그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번 일에 올인을 한 것처럼 매달릴 태세였다. 그게 겁이나고 두려워 그날 바로 상민을 만나 심각성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었다.
다음 날부터 바빴는지 정섭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질 않았다. 명단을 주기 전까지는 마치 둥지 위에 있는 어린 새처럼 연신 먹이를 달라고 문자 보내고 전화해 소리 빽빽 지르던 그였는데 그제는 바빠 연락 자체가 없었다.
가끔씩 생각이 날 때가 있어 무의식적으로 문자를 확인하고 수신 번호를 확인하고 대화창을 검사하여 연락이 없었는지 확인하였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김정섭 이름으로 된 연락은 없었다.
"마치 그날 같은 모양이구나. 내가 처음 D시에 가서 관련자들을 면담할 때처럼...
바쁘겠지. 아니다. 충격적이겠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도둑질한 것으로 대학 가고 그걸 숨기겠다고 마을이 단합하여 은폐하고... 이제는 그게 죽음이 되어 나타나고.
...
저주라는 말에 더 놀라시겠지. 정신도 없을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의 홍수 속에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하고 어느 것을 믿으면 안 되는지도 구분이 안 될 거야."
이틀째 되는 날은 원준이 바빴다. 며칠 전 무산된 4차 산업혁명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재상정을 위한 여야 간사 회동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 나라 안에서 가장 크고 중대한 이슈거리라 모든 관심이 그곳을 향해 있었다. 따라서 기자들도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집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하루 온 종일을 국회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D시에 간 김정섭 소식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특히나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지난 본회의에서 4차 산업혁명이 상정조차 되지 못한 원인이 된 그 비밀 법안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법안의 끼워넣기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관심을 가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찾을 수가 없었다. 선배들도 그 법안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를 않았다. 없어서 안 한 것인지 아니면 있어도 함구령이 내려져 안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그 법안을 찾는데 매달렸다. 뭐랄까? 느낌이나 낌새가 마치 A마을에서 도둑질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난 어른들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은폐하고 조작했던 것처럼 이 법안도 뭔가를 은폐하고 조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자꾸 냄새가 나. 그것도 A 마을에서 느꼈던 그런 냄새가 강하게 나. 자꾸 은폐하고 조작하고 숨기는 모양새가 흡사 A 마을 형태야. 분명히 뭔가가 있어. 그게 뭘까?"
정섭을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이상하고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뭔가 안 좋은 느낌과 냄새가 날 때면 자동적으로 D시에 가있는 정섭이 떠올랐다. 그제야 핸드폰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정섭에게서 온 전화는 없었다. 문자도 대화앱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직도 인터뷰 중인가? 30명 다 하고 있나.
...
잘 돼 가는 가?
...
말들을 너무 많이 듣다보면 좀 복잡할 건데. 시간들도 혼동 되고."
그날 하루가 끝날 때까지 전화는 오질 않았다. 원준은 의회에서 꼬박 밤을 새우는 사이사이 연신 핸드폰을 확인했다.
사흘 째 되는 날 의회는 고무 풍선 바람 빠지듯이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여야 합의나 간사간의 회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오전에는 그야말로 파장 분위기였다. 그래서 꼬박 밤을 지새웠던 원준은 허탈감이 들었다.
그때 자기도 모르게 버릇처럼 핸드폰으로 손이 가더니 최근통화 목록부터 문자창, 그리고 대화앱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락 방법을 다 확인 했다. 그가 확인한 것은 김정섭의 연락이었다. 오전 내내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니, 어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유 기자, 뭐해. 다 끝났는데 우리 사우나나 가자."
사우나 안에서 그는 갑자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특히 그가 A 마을에 갔을 때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식당 주인과 그와 같이 왔던 마을 사람 두 명이 생각나 괜히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의 그들 반응을 보면 과거의 사실을 숨기 위해서는 뭐라도 할 사람 같았다. 남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자기들이 과거에 남의 글을 도둑질하여 자식을 대학에 보냈다는 사실만 숨길 수 있으면 뭐든 다 할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을 양쪽에서 부축해 와서는 나쁜 놈이라는 말과 빨갱이였다는 말을 하게 했겠는가.
그 생각이 들어 정오에는 바쁜 틈 사이에 짬을 내서 직접 전화를 했다. 그런데 몇 번을 재차 연결 시도해도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제는 정말 겁이 났고 걱정이 되었다. 결국 몇 번을 더 시도한 뒤에 문자를 보냈는데, 약 30분 뒤에 [바빠]라는 단 문자가 왔다. 그게 끝이었다. 그 뒤로는 다시 전혀 연락이 되질 않았다.
막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한 사람이 외쳤다.
"터졌다. 터졌어. 합의가 성사 되었데. 오후 3시에 여야 원내 대표가 공동으로 임시 국회 추진과 4차 산업혁명 법안 통과를 발표한데."
오전까지만 해도 무산된 것으로 알았던 합의가 그 사이 물밑 접촉을 통해 진전을 보인 모양이다. 최초로 그 사실을 알린 사람의 말 그대로면 법안은 통과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임시 국회를 개원하기로 합의를 봤다면 법안 통과에도 합의를 봤다고 보면 될 것이다.
"제길 이렇게 쉬운 걸 하루 온종일 기다리게 만들어. 누구 훈련 시키는 거야..."
투덜대다가 원준은 갑자기 자기가 찾고 있던 법안이 떠올랐다. 이번 법안의 관건이던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원준은 임시 국회 일정 발표가 있는 시점에 발표장에 있지를 않고 의원실을 돌아다니며 지난번 조사를 하다가 중단한 비공개 법안의 상정 여부를 알아보았다.
"하하하. 유 기자. 뭘 그런 걸 아직도 떠올리고 있어. 그때 중단되었으면 끝난 일이지."
"어서 오시게 유 기자. 저번에는 미안했어. 그때는 바빠서 말이야.
...
에이 그런게 어디 있어 없어. 그랬으면 아직도 합의중이겠지."
"허허허. 이 친구가. 세상 물정 모르네. 다 끝난 일에 왜 골치 아픈 걸 넣어. 다 끝난 일이야."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의원들이 직접 만나 주었고 그들의 말을 통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누락이었다. 그들의 호쾌한 대답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의원들 사이의 논쟁 끝에 그 법안은 누락된 상태에서 4차 산업혁명 관련 법안만 통과하기로 합의를 본 것으로 들렸다.
그걸 조사하느라 매달리는 바람에 정섭의 일은 생각지를 못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그제야 정섭이 생각나 핸드폰 최근통화 목록과 문자창, 그리고 대화앱을 돌아다니며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정섭이 연락한 흔적은 없었다.
다음날 오전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의회가 아닌 회사로 바로 출근을 하였다. 출근해서는 이번 4차 산업혁명 법안 처리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중요 보도 방향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담긴 목록들을 만드는데 오전을 보냈다. 정오 무렵에 좀 쉬려고 사무실 밖 복도에 나왔다가 지나가던 김정섭을 만났다.
복도에서 정섭을 보고 놀란 원준이 물었다.
"선배, 언제 오신 겁니까?"
정섭이 조금은 회피하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어어어, 어젯밤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 일 하기로 하신 겁니까?"
정섭이 여전히 투명하게 말했다.
"접었어. 날아갔어."
원준이 놀라며
"왜요?"
정섭이 태연히
"그렇게 알고 신경 꺼."
"또 방송 부적합입니까?"
"당연한 거 아냐.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신 같은 걸 어떻게 방송해. 자네도 이제 신경 꺼. 그 교통사고도 잊고."
"그 가족들 일은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번 선배 말씀으로는 아주 특별한 가족이라 했는데."
"조사해 보니까 별거 아니었어. 두 사람은 자살이 맞고. 이번 사고는 불가항력적인 사고였어.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불가항력적인 일."
그의 말이 이상했다. 뭔가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기분이 든다. 며칠 전의 말과 지금의 말이 너무나 달라 누가 들어도 의심을 할 말투다.
원준이 조금은 답답하다는 듯이
"그게 다입니까? 그게 다예요."
정섭이 원준의 반응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똑바로 보며
"그럼 뭐가 있겠어. 나 지금 바빠. 가정집에서 발견된 변사체 사건 때문에 경찰서 가야 해."
원준이 아무 대답도 못하고 주춤주춤 도망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정섭을 보기만 했다. 끝내는 자기를 보는 원준을 그냥 세워둔 채 정섭이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 몇 걸음을 걷다 말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뒤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자네도 이번 일 완전히 손 떼고 다른 거 신경 써. 알았지. 잊어버려. 요즘 의회가 4차 산업혁명으로 정신없잖아. 그거나 신경 써."
그 말을 남기고는 도망치듯이 종종걸음으로 멀리 가버렸다. 혼자 남은 원준은 여전히 멀어지는 정섭을 보고 있었다.
'뭐지? 저럴 선배가 아닌데. 저 선배는 싸움 개처럼 한 번 물면 안 놔주는 사람인데. 왜 저렇게 말하지. A 마을에서 뭔 일이 있었나? 혹시 지난번 내 생각처럼 동네 나이 든 어른들이 선배를 찾아갔나? 뭐지?'
그때 상민에서 전화가 왔다.
"응, 나야. 무슨 일이야."
핸드폰으로 상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선배라는 사람 어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사라졌다는데. 동네 들쑤시고 다니더니 갑자기 사라졌다는데. 회사 출근했어?"
원준이 놀라지도 않고 태연히 말했다.
"응, 출근했어."
그제야 상민이 다급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휴우, 다행이네. 난 또 어찌 되어 행방불명이라도 된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는데. 그래, 뭐라고 하던데. 한데? 방송되는 거야?"
원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아니 또 방송 부적격이래."
실망을 했는지 상민이 바로 대답을 못하고 상대편이 조용했다.
원준이 상민의 대답을 기다리다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해. 그저께만 하여도 뭔가 큰 걸 잡은 사람처럼 흥분했었거든. 당장에라도 방송하면 대박을 칠 것처럼 말씀하셨던 분이야. 그런데 갑자기 입을 닫아 버렸어. 이상해."
그제야 상민이 입을 열었다.
"그도 그 동네에서 침묵하는 병을 옮았나 보지. 흐흐흐."
"침묵하는 병?"
"그래. 침묵하는 자들 속에서 그 병이 걸린 모양이다. 침묵하는 병."
상민의 말에 원준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정섭이 사라진 복도를 보았다.
'침묵하는 자들과 침묵해야 할 자.'
"야, 끊어. 뭐 좀 알아 봐야 겠다. 먼저 끊는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 원준은 은밀하게 정섭이 취재하던 내용이 방송 부적격이 된 이유에 대한 조사하였다. 그런데 채 한 시간도 되질 않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 김정섭. 그런 내용 없었는데."
"그럼 어떤 교통 사고에 대한 기획안 전혀 없었습니까?"
"무슨 소리야. 기획안 자체가 없었어.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요. 그냥 최근에 뭘 조사하는 것 같아서."
"참, 그리고 보니 뭘 한다고 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아무런 연락이 없던데."
"언제요?"
"한 사나흘 훨씬 넘었지."
'뭐야 사나흘 전이면 내가 명단 주었을 땐데. 그럼 왜 그 명단이 필요했던 거야.'
그 사실을 알고 원준이 화가 나 정섭을 찾아 갔던 것이고, 지금은 옥상 테라스에 나와 있는 것이다.
"갑자기 왜 이래. 점심 때 다 이야기했잖아. 그 일 없었던 것이 되었다고."
"왜 거짓말 하신 겁니까?"
"무슨 소리야?"
"데스크에 기획 취재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왜 그 명단이 필요했고 지난번 취재 자료가 필요했던 겁니까?"
원준의 말에 정섭이 내심 숨기고 있는 것이 들통난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거짓말이 들통 났을 때 할 말이 없는 사람의 행동과 태도였다.
"그럼 왜 그 자료가 필요했던 겁니까?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정섭이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그는 도리어 그제는 주변의 CCTV를 살피기만 했다. 그야말로 흥분하여 소리치는 원준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던 그가 주변 카메라에는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선배!"
"귀 안 먹었으니까 조용히 이야기해. 그리고 그 동네 이야기는 절대 취재 대상이 될 수가 없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혹시 선배도 누군가의 압박을 받아 침묵하셔야 합니까?"
"됐어. 그런 소릴랑 하지 말고 잊어. 그 동네 일은 무조건 잊어."
"뭐가 두려운 겁니까? 그리고 이미 기획 취재가 없는 상태에서 왜 저의 자료가 필요했던 겁니까? 무슨 의도였습니까?"
"의도 없어. 그냥 알아보려고 했을 뿐이야."
"아니죠. 아니였죠. 사흘 전부터 선배는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딴 걸 하고 있었던 겁니다. 뭘 하신 겁니까? D시에서 A마을에서 하셨던 일의 목적이 대체 뭡니까?"
"취재야."
"취재 아닙니다. 취재라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가졌던 선배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마저 사라지려고 하니까. 대체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무슨 이유 입니까?"
원준의 추궁에 보고만 있던 정섭이 말을 다 듣고 나서는 대답은 안 하고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정섭의 표정은 조금은 일그러져 있었는데 말이 끝났을 때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돌아섰다.
"선배!"
원준의 외침에 고개만 돌려서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충고 하나 하지. 그 마을 사건이나 일들 조사하지마. 절대로 조사하면 안 돼. 알았어. 후회하고 싶지 않을려면 하지마."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원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은 악수를 하자는 모습이었다. 얼떨결에 놀란 원준이 가만히 있자 정섭이 직접 왼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들어 악수를 했다. 강제 악수에 원준이 인상을 찡그렸는데 이상하게 악수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표정이 달라졌다.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정섭을 보고만 있었다.
악수가 끝나자 정섭이 아무 말 없이 그냥 뒤돌아서 가벼렸다. 혼자 남은 원준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오른손 손바닥에 작은 검은 물체가 있었다. 바로 메모리칩이었다. 정섭이 악수를 핑계로 몰래 원준에게 메모리칩을 건넨 것이다.
저녁 시각에 원준이 급하게 상민을 찾아왔다. 상민은 학원에 있었고 수업이 끝난 시각이라 혼자 있었다. 사무실 밖에서 원준이 상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나오라는 표시였다. 상민이 핸드폰 문자를 보니 원준에게서 문자도 와있었다.
[노트북 가지고 밖에 나와. 조용한 교실에서 보여줄 게 있다.]
그렇게 하여 둘은 학생들이 없는 교실에 들어왔다.
들어서기가 바쁘게 원준이 외쳤다.
"노트북. 노트북"
"왜?"
"김 선배가 지난번 일 조사한 파일 입수했다. 같이 보자."
그렇게 하여 둘은 노트북에 메모리칩를 꽂고 그 안에 있는 영상을 보았다. 메모리칩 안에는 영상이 세 개 있었는데 모두가 사고 현장에서 경찰이 목격자의 진술을 녹취한 영상이었다.
영상의 출처를 알자 상민은 내심 들떴다. 이를 통해 이번 사고에 누군가의 은밀한 손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찾고 싶어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곳의 개입을 내심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원준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영상을 보는 상민의 반응을 보고 싶어 했다. 그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사건을 들추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걸 알고 싶어 몇 번이고 물어봤지만 친구는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숨겨진 이유를 알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설득이다. A 마을의 저주에 매달려 있는 친구를 그 수렁에서 빼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사고 이전까지는 친구가 고향 일에 매달려 있다 생각지를 않았다. 그저 안 좋은 저주를 잘 이겨내고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 그가 저주에 발목이 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은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그래서 영상을 보여주면 말을 꺼내기가 쉬울 거라 생각했다.
첫 목격자는 피해 차량의 운전사다. 영상에는 고맙게도 진술을 하는 목격자의 이름과 나이가 자막으로 나왔다. 나이가 두 사람보다 많았는데 그 영상을 보며 상민이 단번에 죽은 외삼촌과 동갑인 사람이라 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앞서가던 SUV 차량이 이상했다고 한다. 속도가 들쑥날쑥거렸고,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연신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추월을 했던 겁니다. 보복 운전 같은 거 아닙니다. 블랙박스 영상 보세요."
피해 차량 운전자의 진술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추월을 하면서 보았다는 장면이다. 추월을 하다가 옆을 보니 SUV 차량 안에 있던 가족들이 싸우고 있었다. 뒤에서 볼 때부터 안이 이상하더니 결국은 차 안에서 싸우는 장면이었다고 했다. 그가 추월하며 정확하게 보았는데 운전석에 있는 아저씨는 핸들은 잡지도 않고 뒤로 고개를 돌려 말싸움을 하고 있었고 차 안에 있는 다른 가족들도 고함치며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난리였어요. 차 안에서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뒤에 한 이야기는 사고까지의 이야기였다. 거기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냥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박았다고 했다. 피해 차량 운전자가 진술하고 있는 영상에서는 승합차에 타고 있던 사상자들의 이름과 나이, 주소, 사진들이 자막으로 나왔다.
그걸 보는 순간 상민이 놀라 소리쳤다.
"어! 저 어른들은 우리 동네 아니면 우리 동네 인근 다른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이야. 그곳에서 전직 공무원이던 어른들."
결국 가해자도 A 마을이고 피해자도 A 마을 사람들이었다. 다시금 저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이 애매한 것은 원준이다. 피해 차량 운전자의 말이 나올 때까지는 모든 사고가 불가항력적이고 우발적인 사고로 확정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일한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이 또 다시 수렁에 빠트리려 하고 있다.
다음 영상은 화물차 기사의 진술이다. 그는 제법 나이가 있고 배가 불룩한 모습인데 자막으로 나온 나이는 애들 엄마 권성희와 같았다. 이 사실은 원준이 먼저 알았다. 파일에서 봤던 나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차량은 처음에는 승합차 뒤를 따라가고 있다가 승합차가 추월하면서는 사고 차량 뒤에 있었다고 했다. 계속 그 차 뒤를 따라가고 있어 사고 장면을 다 봤다고 했다.
"별거 없었는데. 그냥 갑자기 가해 차가 막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는데. 아! 맞다. 뒤에서 보니까 차 안에서 가족들이 싸우고 있었다. 차가 들썩거릴 만큼 싸우던데."
화물차 기사도 앞선 승합차 운전사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가해 차 가족이 차안에서 싸우고 있었다고. 그 외에는 사고 장면을 설명했는데 가해 차가 피해 차 꽁무니를 충돌하고는 계속 밀고 가다가 어느 순간 갓길 쪽으로 회전하더니 이내 가드레일을 박고서 몇 바퀴 굴렀다고 했다.
"아마 그때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을 겁니다. 끔찍했죠."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않고 멀뚱멀뚱 보고 있는 장면에서 화면이 끝났다. 더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영상을 보고 원준이
"별거 없는데. 그냥 단순 실수나 과실 같은데! 외부 개입 흔적이 없어. 안 그러냐?"
마지막 목격자는 사고 바로 직전에 1차선으로 달리던 승용차 운전자였다. 가해 차량과 나란히 달리던 차주다. 그는 사고가 나자 인명을 구하기 위해 차를 사고 현장 앞 갓길에 세워두고 있다가 진술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말을 하는 사이 또 자막으로 이름과 나이가 나왔는데 그의 나이는 겉모습은 젊은 청년 같았는데 의외로 나이가 있었다. 두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의 말에서도 SUV 차량 탑승 가족이 싸우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한참 싸우는 것 같더니 갑자기 운전석에 있던 아저씨가 핸드를 잡고는 앞으로 총알같이 튀어 나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사고 원인을 말했다. SUV 차량에는 온 로드와 오프 로드 선택 버튼이 있고, 좋은 차는 스포츠 타입의 컨트롤러도 있어 조금만 조작하면 방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제법 자동차에 대한 상식이 있다는 걸 과시하며 사고가 싸움으로 화가 난 아저씨의 과실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까지만 하고 영상이 끝났다.
영상을 보고 나서 상민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와 달리 잠시 상민의 눈치를 살핀 원준이
"됐지. 이제 이 사고가 저주와는 관련이 없다는 확인이 됐지."
상민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사고는 저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다. 맞지!
...
그런데 왜 이런 사건들에 집착하냐?"
그제야 상민이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 저주가 지금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인위적인 저주라고 생각해."
인위적이라는 말에 원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위적인? 그럼 누가 저주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말이야."
"내 생각에는 누군가에 의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찾아 막으면 막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원준이 상민의 대답에 놀라 아무 말도 못했다. 눈치로 보아하니 상민이 이상해졌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사실은 어제와 오늘도 두 건의 사고가 더 있었어. 또 저주처럼 보이는 사고인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단순한 저주라고 넘기기에는 의심스러운 사고였어."
"잠깐, 뭐야 그럼 너는 지금까지 너와 같은 사람들 일을 조사하고 있었단 말이야. 시한폭탄 조사한 거야?
그리고, 그 사고들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라 생각하는 거야?"
원준은 놀란 얼굴이기도 하면서 상대를 이상하게 보는 눈빛이었다. 상민의 말을 머리가 이상해서 하는 소리로 여기는 것 같았다.
상민이 원준의 이상하게 보는 표정과는 달리 자신의 믿음에 확인하듯이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 저주를 풀려고! 그게 풀리는 저주냐? 과거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을 그냥 의심해서 끼워 맞추기 한 거잖아. 왜?"
"끼워 맞추기 맞아. 그리고 그 끼워 맞추기가 너무 잘 맞아 우리 모두는 두려워하지. 그런데 당사자인 우리가 되면 다르게 보여. 그게 뭐냐하면 고의적인 죽음이야.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고의적인 죽음."
"그래서 그 모든 일을 어떤 누군가가 너희와 같은 사람에게 가하고 있다 그 말인거야?"
"응."
"그만, 그만 해.
망상이야. 방금 영상 봤잖아. 거기서 어디 누군가의 힘이 미친 거냐? 우발적 사고지!"
"이번 사고는 아니지만 다른 사고는 맞아. 분명히 개입된 사고들이야."
"상민아! 상민아! 난 아니라고 본다.
그건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너희들 스스로가 절박함에 의해 만들어낸 피해의식이야. 너희 고향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을 이제는 너희가 반대로 피해를 받고 있다 상상하는 거야."
상민은 아무 말도 하질 않고 갑자기 노트북 영상을 다시 재생하여 계속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뭔가를 간절히 찾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원준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이제 그만 둬. 이러다 정말 네 삶을 잃게 된다. 피해 의식에서 만들어진 실체 없는 존재에 네 자신을 잃게 될 거야."
"아냐. 있어. 정말 있어. 정말이야. 믿어 줘."
모니터를 보며 간절하게 말하는 상민의 말에 원준은 포기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