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이번엔 카스칼 백작을 보았다.
“카스칼 백작. 그대가 제롬 경을 도와 주시오.”
“네, 폐하.”
인사 후 황제의 접객실을 나오자 카스칼 백작은 즉시 일련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황자들을 찬찬히 살펴본 후 폐하의 선택을 도울 수 있도록 객관적이고 진실되게 이야기해야 할 걸세.”
“네, 백작님.”
“자네의 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으이.”
카스칼 백작은 신신당부와 함께 황궁 내의 지리에 능한 시종 하나를 제롬에게 붙여 주었다.
“조만간 다시 부를 것이니 여독을 풀고 있게.”
시종을 따라간 제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작이나 후작쯤 되는 귀족들에게는 머무르는 별장을 내어 주지만 그 아래 하급 귀족이나 손님들에게는 이렇게 방을 내어 준다.
하지만 그 방도 제롬이 전에 살던 곳과 비교하면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넓은 침대는 4명이 누워 뒹굴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궁 안과 밖의 생활이 이토록 다르구나.’
“제롬 님의 짐은 정리하여 놓아두었습니다.”
시종의 말에 테이블로 시선을 옮기니 그의 배낭이 놓여 있었다. 카스칼 백작의 일행에 끼어 황궁으로 들어온 것이니 여행 장비를 챙길 필요 없이 제롬은 책 몇 가지를 배낭에 넣어 왔을 뿐이다.
“고맙습니다.”
제롬의 인사에 시종이 싱긋이 웃으며 고개 숙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 줄을 당겨 주십시오. 그럼.”
시종이 나서자 방에 홀로 남게 된 제롬은 의자에 앉아 배낭을 뒤적였다. 곧 그의 손에 한 권의 책이 딸려 나왔다.
책을 보는 제롬의 얼굴에 슬픈 빛이 떠올랐다. 스승님이 자신에게 남겨주신 유산이자 보물. 낡고 색이 바랜 겉표지를 훑었다.
제목조차 없는 낡은 책은 스승이신 드리미티 공이 세상을 떠돌며 자신의 오랜 꿈인 이상향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기술한 책이다.
이 책에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법부터 강한 군대를 도모해 외척으로부터의 방비를 철저히 하는 것까지, 드리미티 공의 국가 경영에 대한 총체적인 생각과 방법들이 기술되어 있었다.
스승님은 이 책을 제롬에게 남겼다. 일 년이 넘도록 보아 온 책인지라 이미 그 내용은 제롬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각인으로 남았으나 스승님의 유일한 유품인지라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다녔다.
“스승님…….”
스승님은 자신의 어린 시절 배고프고 착취당하던 삶을 잊지 않으시고 명성을 날린 이후에도 백성들의 삶을 불쌍히 여겨 가르침을 베풀며 대륙을 떠돌았다.
그렇게 드리미티 공의 제자가 된 전쟁고아 출신의 제롬은 어린 시절의 참상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
“스승님이 바라던 이상향을 꼭 이루고 말겠나이다.”
스승님이 바라던 이상향을 실현함으로써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히 정책들을 수용할 왕을 찾아야 할 터였다.
삼 일이 지난 날 제롬은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황제 궁에 딸린 식당에 도착한 제롬은 황제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폐하, 부르셨사옵니까?”
“저녁이나 함께 먹자고 불렀네. 이리 오시게.”
기다란 테이블에는 황제를 비롯한 몇몇이 더 있었는데 황비들과 황자들이었다. 졸지에 황족들의 식사 자리에 끼게 된 제롬은 크게 당황했으나 내색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황제의 손짓에 제롬이 일어서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황제를 중심으로 제롬이 왼편에 앉았는데 대체적으로 황제와 가까운 곳에 앉을수록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니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제롬을 눈여겨보았다.
아무리 드리미티 공의 제자로 수학하고 평정심이 남다른 제롬이었으나 지금은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롬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던 황제가 테이블의 사람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현자의 유지를 이은 대학자일세. 미래의 현자이기도 하지. 껄껄.”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황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제롬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드리미티 공의 제자라고?’
그런 제롬을 보는 황후와 황비의 눈이 빛났다.
현자는 누구든지 마다하지 않고 지식을 베풀어 제자가 많았는데 그들 중 몇몇은 사부의 위명을 이어받아 지력을 떨치고 있어 귀족가의 참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드리미티 공의 제자라면 누구나가 탐낼 만한 인재인 것이다. 그것도 황제가 직접 황족들에게 소개시켜 줄 정도라면 대단한 인재일 것이다.
“제롬 경이 아직 젊으나 그 지닌 학식은 대단한바, 황자들은 스스럼없이 지내며 배움을 청하라.”
“네, 폐하.”
황제의 지엄한 명령에 황자들이 입을 모았다. 이 상황에 어색해하던 제롬도 겉으로는 내색지 않고 마주 인사하며 황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황제는 6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 슬하에 6명의 황자와 9명의 황녀를 두었다.
황후가 일찍이 혼기가 없어 둘째 부인에게서 먼저 1황자를 얻었으니 올해 35세의 포시드 세피온 황자였다.
‘현 재상의 지원을 받고 있고, 입지가 탄탄하지.’
둘째 황비의 아버지가 지금의 재상인 페틸 공작이니 외손자인 포시드 황자에 대한 총애와 지지가 각별했다.
‘그 옆이 2황자 피에르 세피온.’
피에르의 어머니인 폴라 황비는 황제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드리폴 백작가의 사람이었다.
드리폴 백작은 급성장한 기사 가문으로 휘하에 뛰어난 기사들도 많았다.
그들이 모두 군부에서 새로운 요직에 들어차고 있으며 드리폴 백작 본인도 군부의 총사령관 바로 밑의 2명의 부총사령관 중 일인이었으니 군부의 새로운 물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부의 젊은 세력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32세의 피에르 2황자는 그 지닌바 무위도 뛰어나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기사였다.
제롬의 시선이 그 옆의 유약해 보이는 청년에게로 옮겨졌다.
‘3황자. 러시드 세피온.’
제롬이 그 옆에 앉은 3황자를 보았다. 금빛 머리칼에 단정하며 가장 인물이 뛰어난 3황자는 황후 소생으로 귀족 원로들의 지지가 대단했다.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전 총사령관이 황후의 아버지인 헬리온 공작인지라 귀족 원로는 물론, 군부에서조차 3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았다.
더군다나 황후 소생으로 황제의 적통인지라 그 정통성도 가장 뛰어났다. 안타까운 것은 황후가 노산으로 낳은 아이인지라 몸이 유약하여 잔병을 달고 살았다.
그렇다고 3황자 러시드가 그 능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으나 제 위의 두 황자에 비해서는 모자라는 감이 있었다.
‘음, 저분은.’
제롬이 뚱한 표정으로 양고기를 씹으며 와인을 들이켜고 있는 4황자를 보았다. 황제의 여섯 번째 부인인 황비 마리아의 소생이었다.
마리아는 작위 없이 성만을 가진 몰락 귀족으로 황궁의 시녀로 일하고 있다가 운이 좋아 황제의 마지막 황비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사이 얻은 4황자는 기질이 영특하고 마법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마법사로 입문하기 전 불의의 사고로 그만 마법적 재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는 모든 것에 시큰둥한 듯하더니 술 마시기와 노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 매일 저녁 술을 마시며 해가 뜨면 사냥을 쏘다니기 일쑤였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 4황자를 꾸짖어도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릴 적 당했던 사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컸는지라 정도를 넘지만 않으면 이제는 내버려 두는 처지였다.
‘확실히 망가졌군.’
제롬은 4황자 다비드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총기도 없고 야망도 없는 사내의 눈빛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4황자의 옆으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15세의 5황자와 10세의 6황자가 보였다.
평화로운 시기에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자가 아니라면 성년이 되지 못한 황제의 옹립은 내란을 부추길 뿐이다.
황자들과 황자비, 그리고
‘저분이 막내 공주님이시겠군.’
웨이브 진 금발에 도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미모의 여성이 올해 17세가 된 9황녀 카트리나 세피온이었다.
그 위에 8명의 황녀가 있었으나 모두 맺어진 가문에 정략 결혼하여 가 버린 탓에 이제 황궁에 남은 공주는 9황녀인 카트리나뿐이었다.
제롬은 찬찬히 황후와 황비들을 살피면서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황비들이 신경전을 벌이며 제롬을 훑어보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한동안 바쁘겠구나.’
그날 제롬을 소개시켜 주는 저녁 만찬이 파하고 제롬은 다음 날부터 황비들의 호출을 받아 황비 궁으로 불려 다니기 일쑤였다.
저마다 황제의 의중을 모르니 어찌 되었든 현자의 마지막 제자라는 제롬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황비들은 자신의 황자들을 대동한 채 보았기에, 황자들을 자세히 살피고 대화할 수 있는 자리인지라 제롬으로서도 영 나쁘지만은 않았다.
***
서책을 모아 놓은 황궁의 도서관. 길게 늘어선 책장들 틈에 한 명의 미청년이 책을 들고 훑어보다가 탁 소리가 나게 덮어 다시 책장에 끼워 넣었다.
“이제 한 분의 황자님만 남으신 건가?”
황궁에 든 지도 벌써 한 달째. 제롬은 황비들의 호출을 받아 황자들을 대면하는 자리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 자신이 책을 좋아하기도 했고, 조용히 황자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그사이 드물지만 황자가 직접 찾아온 적도 있었다.
황비들은 물론 황자들 또한 시시때때로 제롬을 호출했는데 제롬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 지식이 방대하고 깊이가 있는지라 이야기를 나눔에 있어서 공부가 되는 것도 많았고 친분을 쌓으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제롬이 받은 밀명이 황자들을 평가하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그들은 그저 이따금씩 제롬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제롬이 받은 밀명을 알았다면 아예 제롬을 자신들의 궁으로 불러들여 앉혀 놓았을 것이다.
‘가장 세력이 두터운 것은 3황자이시고, 그 뒤가 1황자이시다. 하나 그 지닌 능력이 가장 뛰어남은 2황자이시니…….’
직접 황자들을 살펴본 제롬은 자신이 황제였어도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불경되기는 하나 당장에 황제가 서거하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아직 나이가 어린 4황자나 그 아래 5, 6황자는 절대 황위를 물려받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래도 모두 보긴 해야겠지.”
그간 제롬을 가장 많이 부른 것은 6황자 이어드의 어미인 안젤라 황비였다.
다른 황비들이 그저 황제의 의중을 몰라 제롬을 불러들여 탐색을 하는 정도라면 안젤라는 모든 심력을 쏟아 제롬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지지 기반이 약하니 하나라도 더 자기편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와는 너무도 비교되게 4황자의 어머니인 마리아 황비는 제롬에게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4황자 또한 제롬을 찾지 않으니 처음 저녁 만찬에서 본 것을 제외하고는 한 달이 지나도록 4황자를 보지 못한 제롬이었다.
“별수 없군. 직접 찾아가 보아야지.”
그쪽에서 찾지 않으니 이쪽에서 가는 방법뿐이다. 아무리 망나니 한량으로 소문나 있는 4황자지만 공평하게 모두를 관찰하고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도서관을 나서자 자신의 전용 안내인이자 시중 역할을 하는 하인 하이드가 따라붙었다.
궁 안의 하인들이라 하여 모두 비천한 것이 아니라 그 계급이 있어 그저 잡일만 하는 하급 하인이 있는가 하면 하이드처럼 귀족을 상대하는 상급 하인이 있었다.
상급 하인은 대체적으로 몰락한 귀족가의 사람들이나 작위가 낮은 귀족들의 서자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평민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을뿐더러 오랜 귀족 생활이 몸에 배여 이처럼 안내인이나 하급 하인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모든 하인들을 총괄하는 시종장만 하더라도 상급 하인 출신이었으나 그 작위가 백작에 이르지 않았던가.
“4황자는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제롬의 물음에 하이드가 공손히 대답했다. 카스칼 백작으로부터 제롬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답하고 들어주라는 엄명을 받은 터였다.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분인지라. 어느 날은 궁에만 계시고 어느 날은 종일 사냥을 다니시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종적 없이 자취를 감추는지라.”
그 말에 제롬이 미소 지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는군요.”
“네에.”
하이드가 어색히 웃자 제롬이 앞장서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