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는 도적들이 일제히 자신을 향해 덤벼들자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검을 빼 들었다.
말을 타고 이리저리 치고 빠지며 싸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으나 군도나 창과 같이 마상에서 쓸 만한 장병도 가지지 않았고 혹여라도 마갑을 씌우지 않은 써니가 다칠까 염려되어서다.
무엇보다 뒤에서 떨고 있는 조셉과 신디를 인질로 잡으면 어찌할 것인가.
채앵!
“이익!”
도적 두목은 다비드가 자신의 검을 막아 내자 이를 악물고는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한 가닥 검술을 배운 것인지 제압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쉬쉭!
“크아악!”
그새 아까보다 거리를 반이나 좁힌 두 기마가 쏘아 낸 화살에 또다시 부하 둘이 비명성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두목의 얼굴에 조급함이 어렸다.
“어서 이놈을 잡아라!”
호위 무사 둘이 접근하기 전에 어서 귀족가의 공자를 잡아야 일이 수월할 것이다.
“이야악!”
채챙.
서넛의 도적들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여차하면 팔다리 하나쯤은 잘라 버릴 태세였다.
다비드는 요리조리 몸을 피하거나 검으로 쳐 내며 공격을 막아 냈다.
‘이익, 기사 가문의 공자인가.’
상대가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수하들로서도 쉽게 제압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려서부터 검술을 배웠다고 봐야 했다.
“하압!”
공격을 막아서던 다비드가 기세를 바꾸어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앞에선 도적이 돌연 고함을 지르는 다비드의 기백에 놀라 움찔하는 사이 다비드의 검이 어깨를 스쳤다.
“크악!”
뼈가 상할 정도로 깊게 베인 것은 아니나 어깨 근육이 다쳐 검을 쥐기는 힘들어 보였다.
다비드의 검이 번개같이 움직여 찌르기를 회수하자마자 옆에 섰던 도적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쳐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익!”
다비드가 자신을 향해 확 다가오자 도적 두목이 마른침을 삼키며 심기일전하여 검을 곧추세웠다.
하나 검술이 마음먹은 만큼 되던가.
채챙!
다비드의 검격을 채 세 번을 못 받아 낸 도적 두목이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신의 목에 닿은 검날의 차가운 감촉에 등허리가 축축이 젖는 기분이었다.
“무기를 버리거라.”
“으윽.”
도적 두목은 다비드가 마음만 독하게 먹는다면 목이 찔려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수하들이 보는 앞이라 차마 항복을 내뱉을 수 없었다.
“하압!”
“감히!”
스컥.
다비드가 도적 두목을 제압한 사이 모스와 에레즈가 도적들 틈으로 내려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한낱 도적에 불과한 그들이 황실 호위 기사의 실력을 감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다비드의 안전을 최상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다비드와 달리 손 속에 사정이 없었다.
모스와 에레즈의 검이 지날 때마다 도적들의 사지가 잘려 허공으로 떠오르거나 심장이나 목과 같은 급소를 맞아 그대로 절명했다.
다비드가 도적 두목을 채근했다.
“어서!”
스컥!
참다못한 다비드의 검이 도적 두목의 허벅지를 베어 버리고 다시 목을 겨누자 그제야 도적 두목의 입이 열렸다.
“항복! 항복하라!”
어차피 모스와 에레즈를 이길 수도 없는지라 도적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급히 말을 달려온 아포와 파울로가 뛰어들어 도적 두목을 포박했다.
두목까지 합쳐 도적들이 16명이나 되었으나 다비드와 4인의 호위 기사의 실력에 압도되어 모두 한쪽에 무릎 꿇려졌다.
“공자님,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의 정리가 끝나자 아포가 다비드에게 물어 왔다.
“저 나무가 좋겠군.”
다비드의 뜬금없는 말에 그가 가리키는 나무를 보았다.
강변에는 숲이라 불리기엔 민망하지만 몇 그루 튼실한 나무들이 자라 있었다.
“묶어 두고 경비병을 불러 압송하도록 하지.”
아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줄줄이 엮인 도적들을 끌고 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몇 그루의 나무에 나누어 묶었다.
“떠나기 전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묶이게 된 도적 두목의 눈앞에 다비드가 얼굴을 내밀었다.
“왜 이들을 쫓았나?”
다비드가 가리킨 신디와 조셉을 한차례 보던 도적 두목이 두 눈을 꼭 감았다.
“말 못한다!”
굳게 입을 닫았으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겁이 나긴 하는 모양이었다.
어중이떠중이 도적패로 보이지만 이 정도 규모의 도적들이 수도 인근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다비드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도적 두목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그렇다고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궁금할 뿐이지 황자인 그가 치안 유지에 발 벗고 나서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다.
“굳이 말하기 싫다면야.”
다비드의 고개가 조셉에게로 돌아갔다.
“수도 경비대로 가서 이곳에 도적들을 묶어 놓았다고 이르시오.”
“네, 공자님.”
조셉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옆의 신디를 향해 말했다.
“레고르 마을로 가는 길이다. 데려다 주랴?”
다비드의 말에 신디가 도리질 쳤다.
“레고르 마을에 저들의 패거리가 더 있어요. 경비대를 불러와야 해요. 조셉 아저씨와 함께 도망친 것도 경비대를 부르기 위해서였어요.”
“응?”
신디의 말에 다비드의 안색이 굳어졌다. 레고르 마을이 비록 규모가 작은 마을이라곤 하나 지척에 수도를 두고 있다.
어떤 간 큰 도적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약탈한단 말인가. 다비드는 더욱이 이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스르릉, 촤악!
언제 빼어 들었는지 모를 다비드의 검이 도적 두목의 성한 허벅지 한쪽을 마저 상처 냈다.
“끄아악.”
슈우우, 팍!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내의 귀밑거리를 스쳐 지나간 다비드의 검이 나무에 박혀들었다.
“네놈이 죽기까지 10초가 남았다. 정체가 무엇이냐?”
다비드가 마음만 먹으면 검날이 작두처럼 도적 두목의 목을 자를 것이다.
서슬 퍼런 다비드의 눈을 보는 두목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5초가 지났구나.”
“사, 사라반 용병대입니다! 저는 그저 말단 간부입니다요!”
공포에 질린 도적 두목이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용병인 것을 숨기고 도적으로 위장해 일을 벌여야 하건만 지금 사내의 머리는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비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포를 돌아봤다.
“200명 정도 규모의 용병대입니다. 대원들의 실력은 고만고만하나 대장인 사라반이 A급 용병입니다.”
다비드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금 겁에 질린 사내를 보았다.
“누구의 의뢰냐?”
사내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가더니 급히 도리질 쳤다.
“자,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돈이 급해 마을을 약탈했습니다요.”
“용병 벌이가 시원찮나 보구나.”
다비드의 맞장구에 사내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어쭙잖은 변명에 다비드가 차갑게 웃었다.
“10초가 모두 지났구나.”
“사, 살려!”
샤아악!
나무에 살짝 박힌 검을 역수로 쥔 다비드가 허리를 숙이며 휘둘러 빼자 사내의 목을 아슬아슬 스치며 검이 뽑혀 나왔다.
“아아, 으아아아…….”
사내의 목에는 옅은 상처와 함께 피가 스며 나왔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당장의 고통보다는 극한까지 몰렸던 두려움에 오줌을 지리며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무심히 본 다비드가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이들만 경비대에 맡기고 사냥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다.
“레고르 마을로 간다. 사라반에게 직접 묻겠다.”
200명 규모의 용병대다.
얼마를 이끌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전 용병대를 이끌고 왔다면 이들을 제하고 180여 명 정도가 마을에 있다는 말이었다.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아포는 불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제롬은 그 모습이 기가 막혔으나 끼어들어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포는 즉시 호위 기사들을 보며 명을 내렸다.
“파울로, 직접 경비대로 가 병력을 차출한다. 모스와 에레즈는 공자님을 모신다.”
“넵!”
파울로가 즉시 자신의 말을 타고는 돌아온 길을 따라 수도를 향해 달렸다.
아포가 제롬을 보며 의중을 물었다.
“이들과 함께 수도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위험할 수도 있소.”
제롬은 그러겠노라 말하려다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위험하기는 황자 또한 마찬가지다.
돌려보내려면 자신이 아니라 4황자를 돌려보내야 할 것이 아닌가?
“따라가겠습니다.”
아포가 곤란한 듯 4황자를 돌아봤다.
다비드가 제롬을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의 표정이 잠깐 굳는 듯했으나 찰나지간에 지나갔다.
“최대한 신경은 쓰겠지만 여의치 않을 수도 있소. 스스로 보호토록 하시오.”
그사이 써니의 등에 올라탄 다비드가 신디를 보았다.
“신디! 조셉과 함께 수도로 가 있어라.”
신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울로 님이 가셨으니 수도로 갈 이유가 없어요. 마을로 돌아가겠어요!”
신디의 당찬 말에 제롬은 혀를 끌끌 찼으나 다비드는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자, 타거라.”
신디가 다비드의 앞에 타자 써니가 기분이 나쁜 듯 투레질을 했으나 큰 덩치에 어울리게 2명을 태우고도 거뜬한 모습이었다.
“저는 혹시 모르니 이들을 감시토록 하겠습니다.”
조셉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일행은 말을 타고 알레고리 숲을 향했다.
레고르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알레고리 숲의 중앙에 난 길을 가로지르는 것이 가장 빨랐다.
앞서 말을 달리는 다비드의 등을 보는 제롬의 표정은 복잡했다.
‘예사 움직임이 아니었어.’
써니를 길들일 때만 해도 의외의 모습과 체력에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으나, 검을 들고 달려드는 도적들을 보고도 꿈쩍하지 않고 맞서는 대범함이나 그들을 제압하는 검술 실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수련을 해 왔었단 말인가?’
황자들 모두 기본적인 검술이야 배우지만 심취하여 파고들어 기사로까지 임명된 자는 2황자가 유일했다.
한데 제롬이 보기에 4황자 또한 익스퍼트는 아닐지라도 실력이 보통은 아닌 듯했다.
오래전부터 검술을 익힌 것이 틀림이 없으리라.
그늘진 숲길을 두 시간여 달린 끝에 숲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숲을 벗어나자마자 내리쬐는 햇빛에 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마을은 남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를 더 가야 나온다. 말을 달리면 지근거리인지라 일행은 속도를 높였다.
마을 어귀가 보이자 신디의 얼굴에 다급함과 불안함이 함께 내비쳤다.
급한 마음에 경비대를 호출하러 도망쳐 온 탓에 얼마나 많은 도적들이 마을을 들이닥친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저럴 수가!”
신디가 악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손을 들어 막았다. 신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 어쩌죠.”
다비드도 눈앞에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2백에 가까운 도적들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다.
도처에 마을 장정으로 보이는 자들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고, 마을 중앙에는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데 모여 겁에 질려 있었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제국에 대한 도발행위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이익…….”
다비드의 얼굴에서 분노를 읽은 제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또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4황자가 섣불리 나설까 염려되었다.
겁 없이 블러드스톰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나 십 수 명의 도적을 보고도 단기필마로 돌진하는 것을 보면 용감하긴 하나 다르게 말해 무모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제롬의 걱정이 무색하게 다비드는 멀 머리를 돌렸다.
“알레고리 산으로 간다.”
그 말에 아포를 비롯한 기사들이 흠칫 놀랐으나 이미 다비드가 앞서가고 있는지라 별말 없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