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시오?”
불순한 의도를 지녔을지도 모를 낯선 이를 만난 것치고는 다비드의 음색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수정구를 든 노파의 모습이 암살자라 하기에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다비드는 자신의 실력 또한 믿고 있었다.
“클클, 이미 잊힌 이름. 알아 무얼 하겠는가? 지금은 그저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사 니코. 그대 미래를 알고 싶은가?”
노파의 말에 다비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점성술사가 대관절 무슨 이유로 몰래 자신의 마차에 타고 있었단 말인가.
미래를 알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 한낱 인간이 어찌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점칠 수 있겠는가. 달콤한 말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다비드가 노파를 내쫓으려는데 노파는 불쑥 붉은 구술을 꺼내 내밀었다.
“미래를 알고 싶거든 이 구슬을 받으시게.”
노파를 살펴보는 다비드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저 구슬에 독이라도 발라져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혹, 폭발력을 봉인한 마법 아이템이면 어찌할 텐가.
의심하는 자신의 머리와는 달리 다비드의 손은 붉은 구슬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정말 미래를 알 수 있을까?’
자신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한 번도 미래를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저 현실이 갑갑하고 싫었고 한없이 현재를 잊으려고만 하였다.
다비드에게 미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표가 있고 희망이 있는 자만이 미래를 그려 본다.
다비드는 치솟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붉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파팟.
‘으음.’
다비드는 갑작스럽게 머리가 무거워져 왔다. 무겁게 닫히려고만 하는 눈꺼풀 사이로 노파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클클거리는 웃음소리마저 귓가를 윙윙거리다 잦아들었다.
‘함정에 빠진 건가?’
다비드는 이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다비드는 눈을 떴다.
마차가 아니다.
‘여긴 어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인다. 통제 불능이다.
다비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보고 듣는 것뿐이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랑디라고 불렀다.
다비드는 한참 만에야 자신이 깨어난 것이 아닌 랑디라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랑디는 다비드의 사고와는 별개로 움직였다. 다비드는 그저 관전할 뿐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비드로서는 인지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소년이던 랑디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간 랑디의 가문이 몰락하고 검술에 미쳐 검을 연마했다. 그리고 왕국의 기사단원이 되고 고대 유적을 발견해 뛰어난 연공법을 익혔다.
그 연공법으로 인해 크로니스 왕국은 높은 수준의 기사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중 랑디의 실력은 단연 돋보였다.
크로니스 왕국은 막대한 힘을 갖게 되어 곧장 세피온 제국으로 쳐들어왔다.
언제나 선봉에는 랑디가 있었다.
랑디의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다비드는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행하는 게 아니긴 하지만 제국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최선봉에 선 기분이었다.
랑디는 빠르게 공을 세우며 자작,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 실력도 일취월장하여 검을 익히는 기사들이 누구나가 바라는 경지인 마스터에 이르렀다.
랑디를 선봉으로 한 크로니스 왕국의 기세는 무서웠고 세피온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국의 수도 대전에 무릎 꿇린 황제가 보였다.
‘아니!’
다비드는 황제의 모습을 보고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어버렸다. 무릎 꿇은 황제는 다름 아닌 다비드 그 자신이었다.
타인의 눈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은 굉장한 괴리감을 들게 했다. 그리고 너무나 처량하게 보였다.
긴노 세피온 황제의 뒤를 이어 10년의 황자의 난을 겪고 황제에 오른 다비드 세피온.
그는 황제가 되었으나 곧 크로니스 왕국의 침략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제국의 마지막 황제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었다.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 랑디가 공작으로 봉해지고 자신의 영지에 칩거하여 한 단계 진보한 검술의 경지를 이루는 것을 비추었다.
그리고 새롭게 황제가 된 크로니스 제국의 카뮤라 황제의 계략에 의해 토사구팽당하는 처지에 이르러 긴 꿈은 끝나 버렸다.
랑디의 죽음과 함께 다비드는 텅 빈 공간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막 성년이 된 18세의 다비드.
‘이것이 나의 미래인가?’
황제가 되지만 무너지는 제국과 함께한 마지막 황제였다.
다비드는 혼란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에 구슬을 건네주었던 노파가 나타났다.
“클클, 운명은 정해지나 그 미래는 항시 바뀌는 법. 클클클.”
노파와 다비드뿐인 이공간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한데 신기하게 그러한 것들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비드가 노파를 보며 물었다.
“내 운명이 무엇이란 말이오?”
“황제가 될 운명. 클클.”
하면 방금 랑디라는 자의 눈을 통해서 본 자신의 모습은 틀림없는 미래란 말인가.
노파의 말이 이어졌다.
“신수의 왕은 하나뿐. 당연한 결과인지고. 클클.”
다비드가 울컥하여 물었다.
“운명이 존재한다면 어찌하든 바뀌지 않는 것이 미래가 아니오?”
“흘흘흘.”
노파가 손을 쳐들자 빛줄기가 날아와 다비드의 손목을 휘감았다.
“크윽.”
따끔한 고통에 손등을 바라보니 기묘한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클클, 그대 용의 선택자. 포르미엘로 가거라.”
‘용의 선택자?’
다비드는 노파가 하는 말이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
다비드는 무언가 대꾸하려는데 머리가 무거워지며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
“으음.”
다비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황자 전하! 전하께서 깨어나셨다!”
다비드의 곁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서둘러 집사장에게 알리니 모리코리와 호위 기사 아포가 급히 뛰어왔다.
“전하! 의식이 드시옵니까?”
다비드가 천천히 눈을 떠 바라보니 낯익은 천장이다. 자신의 방이었다.
“으윽.”
다비드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두통이 가시지 않는 머리를 잡고는 다시 누웠다.
“전하! 무리하지 마시옵소서.”
“후우, 어찌 된 것이냐?”
“삼 일 전 제롬 경을 찾아가기 위해 마차에 탑승하시고는 그대로 쓰러지셨사옵니다.”
“삼 일 전?”
“네, 전하.”
깜짝 놀란 다비드의 물음에 모리코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마차에서 노파를 보지 못했느냐?”
“예에? 노파라니요?”
4황자의 호위 책임자인 아포가 고개를 저었다.
“마차에는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으음.”
다비드가 옅게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 물러가 있거라.”
“네, 전하.”
갑작스레 쓰러지시며 머리라도 다쳤단 말인가? 모리코리를 비롯한 아포와 시종들은 걱정을 안고는 모두 방을 나섰다.
홀로 남게 된 다비드는 조금 몸을 일으켜 보고는 아까보다 두통이 심하지 않자 침대에 걸터앉았다.
“후우. 그럼 그 노파는 누구였단 말인가?”
분명 노파가 건넨 붉은 구슬을 받고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긴 꿈을 꾸었다.
“꿈이었단 말인가?”
랑디라는 인간의 긴 일대기를 보았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만이 남았으나 그가 준 인상은 강렬했다.
크로니스 왕국의 최선봉에 서서 무수히 많은 제국군을 죽이고 끝내 황제가 된 자신을 사로잡아 죽인 이가 아닌가.
그것이 꿈이라면 지금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 크로니스 왕국은 실로 무섭게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정녕 내가 황제가 된단 말인가?”
미신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고 아무런 이상이 없던 자신이 갑작스럽게 기절한 까닭은 무엇인가.
믿는 것도 우습지만 믿지 않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맞아!’
다비드는 불현듯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오른손과 왼손 등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드래곤을 형상화한 마크 같기도 했다.
“꿈이 아니야.”
현실이라면 아포나 모리코리는 어찌하여 노파를 보지 못하였을까. 정말 꿈속의 내용이 진실일까.
지금 변방 서쪽의 나라에는 괴물 같은 기사들이 힘을 기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제국으로 넘어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10년? 20년? 꿈속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보다는 훨씬 성숙한 모습이지만 마흔을 넘어 보이지는 않았다.
‘20년까지 걸리진 않아. 15년? 10년?’
자신이 다른 황자들을 제치고 황제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아무런 지지 기반도 없던 다비드가 황제가 되는 것도 기적이다.
그런 그가 혼란스러운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란으로 피폐해진 제국을 들이닥친 크로니스군은 제국으로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황제가 되는 것이 내 미래라면 그 시발점은 지금이다.’
다비드의 머릿속에 제롬이 떠올랐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을 지지해 준다면 황태자가 되는 것도 결코 헛된 꿈은 아니었다.
‘사실일까?’
자신이 정말 본 것이 미래일까? 손등의 문신이 증명하니 노파를 본 것이야 틀림없는 사실이라 해도 그 꿈의 내용이 헛된 것일 수도 있었다.
‘확인해야 해.’
제롬을 만나 보면 알 일이다. 다비드는 자신의 추측이 아닌 제롬의 속내를 물어볼 작정이었다.
침대 옆에 걸린 줄을 당기자 곧 문이 열리며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마차를 준비하라!”
태양이 분기점을 지나 이제 서쪽으로 기울려는 한낮이었다. 다비드를 태운 마차는 제롬이 거하고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황궁 안에서의 황자의 호위는 2명으로 정해져 있기에 아포와 에레즈가 뒤따랐다.
***
벌컥!
제롬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봤으나 그는 없었다. 현자의 제자로 예우하고 있긴 하나 제롬은 아직 관직도, 작위도 없는 학자였다.
그런 그를 황자가 직접 찾아다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인을 보내 기별하면 마땅히 제롬이 알아서 황자를 찾아뵐 것이다.
하나, 다비드는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시바삐 확인해 보고 싶었다. 따라나섰던 시종들이 급히 제롬의 행방을 물었다.
“얼마 전 폐하의 부름을 받고 황제 궁으로 향했다 하옵니다.”
시종의 말에 다비드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아직 사실의 확인도 하지 않았는데 만약 제롬이 황제에게 자신을 추천하면 어찌 될 것인가?
형들을 비롯한 황비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수많은 귀족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는 격이다. 황제가 되든 되지 않든 피의 길을 걸어야 할 뿐이다.
“어서 황제 궁으로 가자!”
다비드를 태운 마차가 급히 황제 궁으로 향했다.
***
사흘 전 제롬은 다비드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라 다비드의 궁으로 향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채비하는 길에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같이 다비드의 궁을 찾았으나 쓰러진 다비드는 사흘째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흠, 이 무슨 변괴인가.”
멀쩡하던,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더욱 건강해 보이던 다비드가 갑작스럽게 쓰러졌으니 제롬이 걱정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일반인도 아닌 황자가 아닌가. 혹여 독에 의한 암습은 아닌가 하여 의원들이 다녀가며 살펴보았으나 독에 의한 현상은 아닌지라 의아함이 더욱 컸다.
오늘도 어김없이 4황자궁을 향하려는데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의복으로 보아 황제를 직접 모시는 자이다.
“제롬 경이 되십니까?”
“그렇소만.”
“지금 즉시 황제 궁으로 납시라는 폐하의 명이십니다.”
“으음. 알겠소.”
거부할 수 없는 황제의 명이다. 황제가 제롬을 부르는 이유야 뻔했다. 황자들을 두루 살펴보라고 한 결과를 듣고 싶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