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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기
작가 : 진설우
작품등록일 : 20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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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작성일 : 16-04-04     조회 : 692     추천 : 0     분량 : 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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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한다.’

 하나 제롬은 아직 모든 황자들에 대한 파악을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궁에 들어선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황자들의 왕으로서의 자질을 살펴보라 하니 무리한 일이었다.

 ‘4황자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건만.’

 제롬은 계속해서 4황자 다비드에게 마음이 쓰였다. 한량으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며칠 곁에서 지켜본 제롬의 귀에는 과장되고 꾸며진 소문으로 들렸다.

 재밌는 것은 그러한 소문을 내도록 유도한 것이 4황자 본인의 의지였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별 볼일 없어 보이게 하여 상대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게 하는 좋은 전략이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정사에 참여하지 않아 그 능력을 알 수 없지만, 잠재력에서는 4황자가 가장 뛰어나 보이지 않던가.

 4황자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커져 갔다. 제롬이 마지막으로 알고 싶은 것은 4황자의 진정한 의지와 야망이다.

 그는 훗날을 위해 야망을 숨기고 한껏 엎드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꼬리를 말고 숨어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내면에 들어 있는 진정한 야망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하나, 다비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찰나에 황제가 부르니 제롬으로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제롬의 머릿속은 복잡한 고민이 거듭되는데 마차는 야속하게도 어느새 황제 궁에 닿아 있었다.

 황제는 오전의 기도를 마치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황제는 종종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정원수를 돌보는 것을 즐겼다.

 싹둑.

 제롬이 왔음을 알면서도 황제는 가위를 놓지 않았다. 삐죽 튀어나온 나무의 가지를 모두 잘라 내고는 그제야 가위를 시종에게 넘기며 제롬을 돌아봤다.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주위를 휘이 둘러보았다. 황제의 호위를 맡은 친위 기사단부터 십여 명의 시종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 정원을 돌본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거늘 이 가지치기란 것은 늘 어려우이.”

 황제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듣는 귀가 많은지라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썩 좋은 곳이 못 된다.

 “일단 안으로 들지.”

 제롬은 황제를 따라 그의 서재로 안내되었다. 기사들은 문밖을 지키고 섰고 조그만 테이블을 사이에 둔 제롬은 황제와 독대하고 있었다.

 차를 홀짝이는 둘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황제였다. 황제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현자께서 보시기엔 어떻던가?”

 현자라는 말에 제롬은 향기롭던 차 맛이 더없이 쓰게 느껴졌다. 뱉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아 넘긴 제롬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과분하옵니다. 농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농이라…….”

 황제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는 제롬을 향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하하, 미래의 현자가 아니신가. 그대는 앞으로 현자라 불려야 할 것이야.”

 “네, 폐하.”

 제롬이 황제의 의중을 알고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은 스스로의 고행과 함께 널리 지식을 베풀어 현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황제는 제롬을 현자로 만들어 낼 생각이다. 드리미티 공의 마지막 제자에다 그의 유지를 이었다. 황제가 필요한 것은 현자의 지지다.

 누가 되었든 황태자에 임명될 황자는 제롬의 도움이 절대적일 것이다.

 “그래, 황자들을 살펴보니 어떻던가?”

 “아직 시간이 충분치 않사옵니다.”

 “대략이나마 말해 보게.”

 자신의 말이 황제의 선택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것인가? 제롬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심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어떤 황자님을 황태자에 앉히더라도 내란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이옵니다.”

 “으음. 계속해 보게나.”

 제롬이 한 달이 넘도록 중점적으로 파악한 것은 황자들 개개인의 성품도 있지만, 각 세력 간의 분위기와 힘 또한 면밀히 관찰했다.

 “1황자이신 포시드 황자님을 황태자로 봉할 경우 제국은 북부를 잃을 것이며 3황자이신 러시드 황자님을 황태자로 봉할 경우 제국은 동부를 잃게 될 것입니다. 2황자이신 피에르 황자님을 황태자로 봉할 경우 제국은 삼등분될 것이옵니다.”

 1황자를 지지하는 현 재상 페틸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의 영지가 몰려 있는 곳이 북서부였다. 3황자 세력의 원로 귀족들은 동부에 자리 잡고 있었고, 2황자의 세력은 거의가 신흥 귀족 출신들이라 전국에 영지들이 퍼져 있어 지방 세력의 지원은 약하나, 중앙군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2황자의 지지 세력이었다.

 제롬의 거침없는 말에도 황제의 표정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한 달 만에 제롬이 파악한 것을 황제라고 여태껏 몰랐을 리는 없다.

 “나머지 황자들은 어떠한가?”

 “나머지 세 분 황자님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무언가 파격적인 능력을 보여야 할 것이옵니다.”

 황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능력을 보일 재능이 있던가?”

 제롬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재능을 보고자 다비드를 조금 더 살펴보고 싶지 않았던가. 하나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계속해서 침묵을 지킬 수도 없었다.

 “아직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아직은?”

 “네, 폐하.”

 “으음.”

 황제가 침음성을 흘리며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댄 황제가 고심하는 듯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다비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황제의 물음에 제롬은 조심히 황제의 신색을 살폈다. 그 표정에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듯했다.

 ‘폐하께서는 4황자님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는 건가?’

 제롬은 조금 황제를 떠볼 발칙한 생각을 해 보았다.

 “어렸을 때 총기가 대단했다 들었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먼 옛날을 생각하듯 아련해졌다.

 “그랬지. 내 그토록 똑똑하고 총명한 아이가 황가에 태어나 기뻤었지.”

 황제의 목소리 말미에서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사고로 인해 사람이 달라 보일 정도로 변해 버린 다비드의 모습 때문이리라.

 ‘폐하는 4황자를 마음에 두고 계신다.’

 제롬은 황제의 생각을 엿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뿐이지 황제는 4황자를 특별대우 해 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카포 왕국에서도 겨우 한 필만 보내올 정도로 귀하디귀한 명마 블러드스톰을 선뜻 4황자에게 내려 주는 것도 그렇고, 황자의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그랬다.

 ‘이미 황태자로 4황자를 낙점한 것은 아닐까?’

 제롬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황제가 차일피일 황태자 즉위를 미룬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아직 나이가 어린 4황자가 장성한 뒤 그를 황태자로 봉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차일피일 미루어 온 사이 1, 2, 3황자의 세 세력으로 귀족들의 지지가 나뉘어 버리고 선뜻 4황자를 황태자에 봉할 수가 없어 그 지지를 얻고자 현자인 드리미티 공을 부른 것이 아니었을까?

 ‘내게 명을 내리신 것은 그저 확신하기 위해서였나?’

 제롬이 어느 황자를 지지하건 그 발언에 무게는 없다. 하면 황제는 왜 자신에게 일러 황자들을 관찰해 보라 하였을까?

 이미 황태자로 4황자를 낙점 찍고 있는 상황이면서 왜 굳이 제롬에게 둘러보라 했을까? 그 이유가 그저 자신의 생각을 확인받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현자!’

 황제는 자신에게 현자의 명성과 권위가 아니라 지혜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현자로서 4황자의 힘이 되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4황자님을 무사히 황태자의 자리에 봉할 방법이라…….’

 제롬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자신 또한 4황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그때 황제가 다시 말을 걸었다.

 “요 근래 다비드와 어울렸다 들었네.”

 “네, 폐하.”

 역시 황제는 제롬은 물론 다비드에 대하여 항상 눈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겉으로야 무관심한 척 내버려 두지만 속으로야 항상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흘 전 다비드가 암습을 받아 쓰러졌다 들었네. 자네를 급히 부른 것도 그 때문이야.”

 황제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제롬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다비드를 생각하는 황제의 마음이 이리도 각별할 줄은 몰랐다. 하면 자신이 할 일은 다음 대 황태자 후보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다비드를 무사히 황태자로 올리기 위한 책략이다.

 다비드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다른 황자 세력으로부터 암습이 없었는데 사흘 전 다시 사건이 터졌으니 다급함에 제롬을 부른 것이다.

 “폐하께서는 4황자님의 안위가 걱정되시옵니까? 아니면 4황자님의 황태자 즉위가 걱정되시옵니까?”

 제롬의 말에 황제가 뜨끔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띠웠다.

 “역시 현자의 수제자로구나.”

 황제가 제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현자의 마지막 유지를 이은 제자다. 그 지식을 시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보통의 사람보다야 뛰어날 것임이 당연했고 상황 판단이나 앞을 내다보는 선경지명 또한 있다.

 ‘황자의 심복으로서는.’

 아무런 세력도 없는 4황자였다. 자신이 최대한 황위를 지킨다면 앞으로 10년은 버틸 것이다. 그간 제롬으로 하여금 다비드를 보필하게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사방으로부터 고립되어 혼자서 끙끙 앓다 괴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이 보기에 다비드는 어떻던가?”

 황제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자신만이 다비드의 특별함을 아는 것인지 다른 이들에게 또한 그것이 보이는지 말이다. 현자의 유지를 이은 제자 제롬의 대답이 기대되었다.

 “폐하, 4황자님은 그 비범함이 다른 다섯 분 황자님들과 비교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호.”

 “신이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한 것은 다비드 황자님을 좀 더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그 녀석은 내게도 진실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네.”

 황제의 말에는 조금의 섭섭함마저 느껴졌다. 제롬은 비로소 황제가 왜 황태자 즉위를 차일피일 미루어 왔는지 확신했다.

 “허면 신이 할 일은 다비드 황자의 황태자 즉위를 돕는 것인지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대 태양을 인도하는 자 제롬. 그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황제의 명이다. 고민할 것도, 고민해서도 아니 될 문제였다.

 “명을 받드옵니다.”

 제롬이 인사 후 물러가는데 황제의 얼굴에 씁쓸함이 컸다. 18년 전 다비드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유달리 총명하고 똑똑했던 다비드였다. 무엇을 하든 소질을 보이던 아이가 마법사가 되려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 후 삐뚤어졌으나 다비드의 재능은 마법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형들에 밀려 조용히 지내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성년이 되면 적극 그를 후원하려 하였으나 그사이 다른 황자들의 세력이 너무나 커져 황제로서도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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