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을 것을.’
그 재능이나 잠재력만으로 보자면 다비드만큼 눈에 차는 아이가 없으나 그 정통성이라든지 귀족들의 지지는 가장 낮았다.
4황자를 낳고는 황제는 무조건 이 아이가 다음 대 황제가 될 것이라 여겼다. 잘 갈고닦아 보필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될 것이다.
그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은 자신이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
다비드는 마차가 멈추자 서둘러 내려 황제 궁으로 향했다.
“아니, 전하!”
시종이 놀라 다비드를 맞이했다.
“폐하께서는 누구를 만나고 계시느냐?”
“제롬 경이 들어 있사옵니다.”
다비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설마.’
제롬과 황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다비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지 초조해졌다.
잠시 갈등하며 기다리길 5분이 지났을까? 긴 회랑을 걸어오는 제롬이 보였다. 제롬은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 다비드를 보고는 매우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사흘이나 의식불명이던 황자다. 그 걱정이 얼마나 컸던가. 한데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니 제롬은 안심하는 한편, 깨어난 다비드가 곧장 황제 궁으로 온 듯하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 문안 오셨는지요?”
“아닐세. 자네를 보러 왔네.”
제롬이 놀란 얼굴을 하는데 다비드가 지나쳐 걸었다.
“아버님을 뵙고 올 터이니 잠시 기다리시게.”
여기까지 와 놓고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비드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황제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폐하께 소자가 문안드리옵니다.”
내심이야 감추며 무심히 물었다.
“아프다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냐?”
“네, 폐하.”
조용히 고개를 숙인 다비드를 보는 황제의 눈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서렸다가 찰나지간 사라졌다.
“그래. 황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들었다.”
황제의 말에 다비드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어머니인 마리아 황비는 언제나 다비드를 걱정스레 보며 안절부절못하였다.
다비드는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 의도적으로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이제는 마리아 황비가 일부러 다비드의 궁을 찾지 않으면 모자간에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마리아라고 어찌 눈치가 없겠는가. 다비드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는 자주 찾지 않으니 모자간에 얼굴을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찾아뵙고 문안 여쭙겠습니다.”
“그래. 그만 물러가 보도록 하거라.”
“…….”
황제의 축객령에도 다비드가 가만히 있자 황제가 다시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더냐?”
다비드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언제 나처럼 무심한 그 얼굴 그대로다. 어머니인 마리아 황비는 황제의 마지막 부인이다. 그 신분이 몰락 귀족이긴 하나 하인 출신인지라 다른 황비들로부터 언제나 무시를 당하며, 심한 경우 목숨의 위협마저 받아 오며 살았다.
그러한 일들이 황제의 눈을 피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몇몇은 황제 또한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한데도 황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니 다비드로서는 한때 황제를 원망하는 마음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무덤덤하다. 후궁 소생으로 태어난 것도, 세간의 눈을 피해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운명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했다.
‘아직 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나 보군.’
“아닙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다비드는 급히 대꾸하고는 조용히 뒤돌아 나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제의 무심한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찰나지간 자신을 살피던 다비드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다. 평소 보여 주던 흐리멍덩하던 것이 아니다.
쓰러져 의식불명이라기에 걱정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된 모양이었다.
황제를 배알하고 나온 다비드는 곧 제롬과 한 마차에 올랐다.
다비드는 맞은편에 앉은 제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제롬 또한 황자의 시선을 굳이 물리지 않고 마주 보았다. 무례하기 그지없었으나 다비드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덜컹덜컹.
기 싸움이라도 하듯 둘이 마주 보는 사이 덜컹거리는 마차는 어느새 4황자궁에 도착하였다.
자신의 서가에 자리를 잡고는 제롬과 독대한 다비드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폐하께서 어찌 부르셨더냐?”
제롬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찌하여 물으시는지요?”
제롬이 쉽게 대답할 것 같지 않자 다비드는 질문을 바꾸었다.
“폐하께서는 네게 밀명을 내리셨을 것이다. 황태자에 즉위할 만한 황자들을 살펴보라 하셨겠지.”
다비드의 추측이 정확한지라 제롬은 적잖이 놀랐다.
‘어찌 아셨단 말인가?’
사냥과 승마, 그리고 위장하고 감추던 것이 들통 난 검술수련 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을 것 같던 다비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라웠다.
놀람은 감탄으로 이어졌다.
‘역시 이분이시다.’
황제의 눈은 정확했고 자신의 추측도 정확했다. 따로 세력도 정보망도 없는 다비드가 개인의 추측만으로 정확히 사실을 알아냈다.
다비드야말로 다음 대 황제로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말해 보거라. 폐하께 나를 고하였느냐?”
다비드의 말은 어찌 보면 자신만만해 보였다. 제롬이 황태자로 다비드를 추천하였다고 확신하는 모습이 아닌가.
제롬이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음.”
다비드가 침음성을 삼켰다.
‘역시 그 꿈은 미래가 아니었단 말인가?’
손등에 새겨진 표식은 분명 그것이 환상이나 꿈이 아님을 의미했는데 그 내용이 진실은 아닌 모양이었다.
한데, 제롬의 이어지는 말에 다비드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4황자님을 황태자로 생각하고 계시옵니다.”
‘아니, 어찌…….’
늘 자신에게 무심하던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자신을 황태자로 생각한다니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더욱이 누구보다 제국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황제였다. 그간 감추었지만 자신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어 황태자로 봉한다 하여도 지금의 정황으로 보아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당장에 다른 황자들을 지지하던 귀족 세력들은 황제의 결정을 인정치 않고 즉각 반발할 것이다.
누구보다 제국을 위하는 황제의 성품상 아무리 각별한 자식이 있다 하여도 그 자격이 없음을 아는데 황태자로 봉할 리가 없다.
다비드가 제롬에게 재차 물었다.
“사실이더냐?”
의외로 담담한 다비드의 태도에 제롬은 속으로 연방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 속내야 어떻든 제롬이 듣기에는 그저 사실을 확인해 보는 물음으로 들렸다.
“사실이옵니다.”
다비드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사실이던가? 내가 황제가 된단 말인가?’
사흘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누구보다 기뻐했을 다비드였다. 하나 니코라는 존재의 만남으로 불확실하긴 하지만 미래를 엿본 후로는 도무지 지금의 사실이 기쁘지 않았다.
정황으로만 봐서는 그때에 본 그 미래 모습이 사실이라는 것이 아닌가. 제국은 혼란에 처하게 될 것이고 자신은 쇠퇴하는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크로니스 왕국으로부터 멸망당할 것이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이더냐?”
“흙속의 진주는 언젠가는 빛나는 법이옵니다. 긴 어둠을 지나셨으니 이제 세상을 비추실 때가 아니옵니까?”
우회적으로 말하긴 했으나 여태 재능을 숨기고 그저 한량같이 지낸 자신을 말함이다. 그것만으로는 황태자가 될 이유로 충분치 않았다.
무릇 황제라 함은 그 개인의 능력보다도 인망이 두터워야 한다. 지금 다비드의 세력이라고는 자신을 따르는 호위 기사 몇이 전부였다.
“제국은 사분오열될 것이다. 폐하께서 생각지 못하신단 말인가?”
다소 격앙된 다비드의 말에 제롬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 또한 그것이 염려되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당장 황태자로 봉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또한 다른 세 분 황자님 중 한 분을 황태자로 즉위한다면 필시 반발이 있어 내란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나 또한 같지 않더냐?”
제롬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련의 준비로 세 세력의 힘을 비등하게 맞출 것이옵니다. 그 뒤 4황자님이 황태자로 즉위하시어 세 세력을 고루 다독여 그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이옵니다.”
제롬의 말에 다비드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말이야 쉽지 그 전에 다비드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먼저일 것이다.
제롬의 말대로 되려면 세 세력이 모두 납득할 만한 이유를 보여야 했다. 황태자로서 다른 황자들 그 누구보다도 월등한 공을 세우거나 능력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요절하기 딱 십상이겠구나.”
심각한 말이나 제롬은 되레 웃었다.
“명검은 수많은 망치질을 견뎌야 하지요.”
“명검이 되기 전에 검날이 부러지겠구나.”
“그 고련을 견디실 분은 오직 4황자님뿐이옵니다.”
다비드가 피식 웃었다.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롬과 대화할수록 자신의 속내를 모두 털어놓고 있었다.
한 번도 다른 이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생각을 모두 드러내 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충성심이 대단한 아포에게도 그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는 다비드가 아닌가.
다비드는 제롬에게서 알 수 없는 동질감 내지는 친밀감을 느꼈다. 그것은 제롬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미 다비드에게 깊이 매료되어 그를 꼭 황태자로 즉위시키겠노라 마음먹었다.
“폐하로부터 암중으로 4황자님을 도우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진정 나를 돕고 싶더냐?”
제롬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며 생글 웃었다. 다비드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으나 금세 사라지며 표정이 심각해졌다.
‘꼭 누군가 등 떠밀어 황제에 앉히려 하는 것 같구나.’
생존의 위협을 받던 지난날은 모두 거짓말과 같이 지금 상황만으로는 다음 대 황태자는 자신으로 낙점된 것만 같았다.
‘그 꿈이 맞다면 나는 황제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것으로 끝이다.’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
바라지 않는 결과다.
“진정 나를 돕고자 한다면 나의 황태자 즉위를 막아야 할 것이다.”
다비드의 의외의 말에 제롬의 얼굴이 굳었다.
‘이분은 정녕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없단 말인가?’
다비드의 형형한 그 눈빛만을 본다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숨겨진 다른 속내가 있다는 말인가?
다비드는 제롬이 의아해하든 말든 상관치 않았다. 지금은 노파가 보여 준 미래가 진실인지 아는 것이 더 중했다. 더욱이 서쪽 크로니스 왕국에서 랑디라는 괴물 같은 기사가 나타났는데 막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 현자의 제자라면 아는 것이 많겠군.’
다비드는 노파가 마지막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포르미엘이라고 들어 보았는가?”
“흐음. 포르미엘이라.”
워낙에 뜬금없는 질문인지라 제롬은 미간을 좁히며 포르미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려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