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망할 원장 같으니....월급도 쥐꼬리만큼 주면서 시키는건 왜 그리 많은거야?...'
독서실 총무일을 끝내고 두꺼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마음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수환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듯 멍하니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처음 계약서 쓸때 꼼꼼히 안 본 내 잘못도 있지만....아, 그래도!!, 기간만료 이전에 그만둘 시
150 만원의 손해배상 청구라니 너무 하잖아?!..."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잠시 걸음을 멈춘 수환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어렴풋이 보였다.
"꼼짝없이...내년 5월까진 노예 확정이네..."
경적을 울리는 차 들을 바라보며 수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버스 올 때까지......30분은 기다려야하네...엥?.."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정류장에 도착한 수환은 평소처럼 의자에 앉지 못했다.
'영도 쇼핑' 수환이 매일 타는 버스가 지나치는 정류장의 이름이었다.
수환은 늘 정류장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11월9일 저녁7시....오늘은 달랐다.
버스정류장에는 검은 코트에 스커트를 입고 술냄새가 진동하는 장발 여성이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의자에 괴상한 자세로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
수환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음악의 볼륨을 높이며 생각했다.
'이 동네에 예전부터 이상한 사람이 많다더니 아는 척하지 말아야겠다.'
그 순간-
"우웁,우욱"
-?
"설마....?"
익숙한 소리에 수환은 제발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웨에에에에엑"
신은 수환을 도와주지 않았다.
취한 여성의 입에서 나온 피자반죽들이 정류장 바닥에 퍼졌다.
'아흑...하느님...!!'
눈을 질끈 감으며 바닥의 더러운 것을 피하는 수환에게 갑자기 누군가 이어폰을 강제로 빼내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오~초면에 죄송한데에~ 숙취음료 좀 사 주실래여?~헤헷"
맙소사, 방금 전 까지 정류장 바닥에 피자를 만들던 취객여성이 어느새 일어나 골골대며 수환에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게다가 초면인데 다짜고짜 숙취음료라니?..
수환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류장 근처 편의점
가게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있는 수환은 자기 앞에서 숙취음료를 들이키고 있는 여성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짓고있었다.
"키야아아~이건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까?..헤헤헤"
양이 부족하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입맛을 다시며 텅 빈 숙취 음료깡통을 둘러보는 여자를 보며 수환은 생각했다.
'아...요즘 공부도 힘든데 어쩌다가 이런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버스시간 20분은 남았는데..
날이 좀 춥긴하지만 정신나간 여자 상대하는것보다야 정류장에 앉아있는게 그나마 낫겠지...'
아쉬운 표정을 짓고있는 여자를 보며 수환은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으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아,그러시겠어요?...음료 감사합니다..."
수환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취해서 토하고 숙취음료구걸한 여자'
줄여서'숙취여자'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인사했다.
몸을 돌려 정류장으로 가려던 수환은 잠시 멈칫하더니 여자에게 물었다.
"술...좀 많이 드신거 같던데...원래 그렇게 많이 드세요?.."
수환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대답했다.
"아...헤헤...아니에요...오늘은 친구들이 타지에서 올라와서 오후부터 좀 마셨거든요..
친구들 배웅해주고 속이 안좋아서 잠깐 쉰다는게 그만...히~"
대답을 들은 수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낮술??....보기에는 진짜 멀쩡하게 생겼는데 역시 미친여자가 분명해..빨리 집이나 가야겠다..'
걸음을 재촉하려던 수환에게 갑자기 여자가 말을 걸었다.
"저기...실례가 안된다면...도와주신 대가로 나중에 제가 밥 한번 살게요..이름이랑 연락처좀 알려주시겠어요?.."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일부러 멀리하려던 여자가 갑자기 이름이랑 번호를 물어보다니..
"아뇨, 괜찮아요...그럼 이만..."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수환의 앞을 가로막으며 여자는 다시 한번 말했다.
"자,잠시만요...보답하게 해주세요!!..."
술기운에 홍조를 띄운 여자의 얼굴을 보며 수환은 생각했다.
'안 알려주면 계속 귀찮게 할거 같은데...어쩔수 없나?..'
수환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한 번 보고는 숙취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의미에요?.."
"줘요"
"네?.. 뭐를요?.."
당황하는 표정의 여자를 보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수환이 말했다.
"그쪽 휴대폰 달라고요, 연락처랑 이름 알려달라면서요?..."
"아...네,네..."
휴대폰을 건네받은 수환은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결국 이름과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말았다.
"이게...그쪽 이름이에요?.."
"네,왜요?"
"아,아니에요...그냥 이름이 뭔가 유명한 분이랑 똑같으셔서...성함이 '김수환'이셨구나.."
"그런소리 자주 들어요, 천주교의 추기경님이랑 이름이 똑같다고..."
수환이 지겹다는 표정을 띄었다가 지우며 말했다.
"아..네...저, 제 이름은'이지현'이에요 23살이고요."
"나도 23살이에요"
"그러셨구나...아..."
수환은 술이 어느정도 깼는지 어색해하는 숙취여자 아니 '지현'을 힐끔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가도 될까요?"
"네?...아,네...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받은 수환은 어느새 도착한 버스에 타고는 의자에 앉았다.
더 할 말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정류장에서 지현이 자신을 보고있는듯 했다.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듯 수환은 정면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하아...오늘 정말 피곤하네....대체 뭐야 저 여자?..'
차가운 밤바람이 불고 저녁이지만 밝은 달이 떠 있던 11월9일 저녁7시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