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그 시각 호텔 아무르 앱솔루의 부사장실에서는 상훈이 초조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오늘 지훈이 여주와 선을 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훈이가 JUNE 그룹이랑 결혼 연을 맺으면 내 자리가 위험해. 최소한 지훈이가 그 집 딸이랑 결혼하는 건 막아야 하고...내가 뺏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
상훈이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 때 상훈의 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부사장님. 알아봤는데 여섯시에 저희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난다고 합니다.”
“알았어. 나가봐.”
비서가 나가자 상훈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상훈은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동생 정도는 이길 수 있겠지 하는 거만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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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40분 호텔 아모르 앱솔루 레스토랑. 지훈은 먼저 나와 맞선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은 선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른 채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잠시 후 여주와 찬미가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데 때마침 지훈의 눈에 속눈썹이 빠져 들어갔다. 지훈은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느라 뵈는 게 없어 여주와 찬미가 자기 앞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박지훈씨 맞죠?”
여주가 지훈을 발견하고 이름을 불렀다.
“네. 저 맞는데 잠시만요.”
지훈은 자기 이름을 듣고 대답만 간신히 했다. 가뜩이나 시력이 안 좋은데 눈을 막 비비니 앞이 더 안보였다. 지훈은 눈을 찡그리며 여주의 얼굴을 보려 노력했지만 눈이 따가워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뭐 들어갔어요? 눈이 빨갛네.”
“네. 눈에 속눈썹이 들어간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안 빠지지 잠시만요.”
“내가 불어줄게요.”
여주는 대뜸 엄지로 지훈의 눈꺼풀을 올리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 아무렇지 않은 일 같아 보이지만 여주에겐 특별한 일이었다. 여주는 남자랑 악수하는 것도 겨우 참는 사람인데 초면에 눈을 뒤집어 까고 바람을 불어주다니. 그것도 얼굴을 아주 가까이 하고. 여주가 초면인 지훈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지훈이 풍기는 묘하게 안쓰러운 분위기 때문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양복을 입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아있는데도 지훈은 어딘가 모르게 처량해 보여 모성애를 자극했다.
지훈은 여주의 도움으로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 나서야 겨우 속눈썹을 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지훈이 눈을 껌뻑거리다 안경을 쓰자 코앞에 여주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보여요?”
“어?”
지훈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20년 동안 짝사랑한 여자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책상 위 액자 속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 눈앞에 서 있다니. 영화에나 나올법한 연출이었다. 지훈은 너무 놀라 멍청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더듬었다.
“어..어...어어...”
“내 뒤에 귀신 있어요? 어째 리액션이 전설의 고향이네.”
여주는 자기 뒤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지훈을 봤다.
“김여주?”
“오늘 나 말고 선 볼 여자 더 있어요? 왜 내 이름에 물음표가 붙지?”
여주는 멍청하게 앉아있는 지훈의 맞은편에 찬미와 나란히 앉았다. 지훈이 말을 더듬는 동안 여주는 팔짱을 낀 채 지훈이 정상적으로 말을 하길 기다렸다.
“지..지지...진짜 김여주에요?”
“제 사진도 안 보고 나왔어요? 사전조사가 너무 부실한 거 아닌가? 그쪽은 비서도 없어요?”
“아니 그게 저는 당연히 거절하려고 이름을 안...”
“나 싫어서 당연히 거절한다구요? 오늘은 저번보다 더 빨리 끝났네. 가자 비서언니.”
여주가 찬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훈은 다급하게 일어나 여주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아니! 맘에 들어요! 엄청 맘에 들어요! 세상 맘에 들어요!”
“마약 했어요?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지금 이 상황이 웃겨요?”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훈은 여주가 자신의 맞선 상대라는 걸 알고 너무 행복한 탓에 활짝 웃고 있었다. 방금 수면마취에서 깨어난 사람 같기도 하고 어디가 모자란 사람 같기도 했다.
“여주씨가 너무 예뻐서요!”
“엥?”
여주는 지훈의 난데없는 돌직구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예뻐도 저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는 게 말이 되나. 여주는 영 꺼림칙했다.
“죄송해요. 다시 시작할게요. 제 이름은 박지훈이고 이 호텔 전무예요.”
지훈이 고개를 숙이며 여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여주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꺼림칙하게 악수에 응했다. 여주는 손바닥이 닿는 것도 내키지 않아 손가락으로만 간신히 악수를 했다.
“숙취인지 마약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정신 아닌 사람이 제일 싫어요. 혹시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거면 약속을 다음으로 미뤘으면 좋겠어요.”
“저 술도 잘 안 마시고 마약도 안 해요. 진짜 제정신이에요.”
지훈은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자신이 정상임을 어필했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은 감출 줄을 몰랐다. 여주는 계속 실실 웃는 지훈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꺼림칙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싸이코패스 같으니까 그만 웃으면 안 될까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계속 웃기만 하는 지훈이 여주는 부담스러웠다. 지훈은 여주에게 지적을 당하고 나서야 이성의 끈을 조금 되찾았다.
“아! 죄송합니다. 근데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지훈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주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전에 본 적 있나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해서요.”
지훈의 기대와 달리 여주는 지훈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여주는 중요한 내용 외에는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까 눈을 불어줄 때와는 달리 지훈과 얼굴을 가까이 하는 것이 몹시 불편해 알아도 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동창인데...”
지훈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같은 반이었어요?”
“아뇨 같은 반인 적은 없었는데...”
“그럼 기억할 리가 있나. 우리 때는 한 학년 당 한 반에 40명씩 15반까지 있었는데.”
“저는 여주씨 아는데...”
“제가 등치도 크고 남자애들 때리고 다니기로 유명했죠. 그래서 아시나 봐요.”
“아니 그게 아니라...정말 기억 안 나세요?”
지훈은 다시 한 번 간절한 표정으로 여주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저한테 맞은 적 있어요? 나는 나쁜 짓 하는 애 빼곤 때린 적 없는데...뭐 나쁜 짓 했나 봐요?”
여주는 고개를 반쯤 돌려 지훈의 얼굴을 살짝 피하더니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여주씨한테 맞은 게 아니라...기억 못하면 됐어요.”
지훈은 이내 포기하고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는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올라왔다. 귀여운 얼굴과 다르게 손길은 꽤나 거칠고 남자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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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현재진행중인 지훈의 짝사랑을 설명하려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훈이 여주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지훈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때의 일이다. 새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의 점심시간, 지훈은 혼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있었다. 다른 남자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데 지훈은 거기에 끼지 못했다. 운동엔 영 소질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꺼운 점퍼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바람에 달라붙는 바지의 모양이 한 눈에 봐도 앙상했다. 거의 늘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지훈은 하얗고 마른 체구를 갖고 있었다. 안경만 쓰지 않았으면 병약한 왕자님처럼 보였으련만, 두꺼운 뿔테안경 때문에 지훈은 그냥 비실한 범생이 같아보였다.
지훈은 반 애들과 두루두루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점심시간에 같이 놀 친구는 없었다. 하지만 지훈은 같이 놀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슬퍼한 적이 없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지훈은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다. 부모님과 형이 함께 사는 집에서도 늘 혼자였기 때문이다. 지훈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쭉 점심시간이면 이렇게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고독을 맞다가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지훈에게 불량해 보이는 남자애 두 명이 다가왔고, 지훈의 삶을 바꿔놓을 사건이 시작됐다.
“야 너 박지훈이지?”
불량해 보이는 남자애 둘 중 덩치가 큰 쪽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 어.”
멍하니 앉아있던 지훈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스탠드에 앉아있는 자신에게 누군가 말을 건 것은 초등학교 입학 이후 처음이었다.
“너네집 부자라며?”
덩치가 큰 남자아이가 꺼낸 서론은 누가 봐도 ‘삥 뜯기’였다.
“이 동네 부자 많잖아.”
지훈은 덩치 큰 남자아이의 서론이 ‘삥 뜯기’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속이 벌벌 떨렸다. 덩치만 봐도 자신이 싸움에서 지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지훈은 태연한 척 말을 돌리며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싸움에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순순히 돈을 내어주기는 싫었던 것이다.
“어쨌든 너도 부자잖아.”
덩치 큰 남자애 옆에 있던 키 작은 남자 아이가 지훈에게 따지듯 말했다.
“용건이 뭐야?”
지훈은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시크한 말투로 되받아쳤다.
“어쭈? 개기냐?”
키 작은 아이는 덩치 큰 아이의 부하 격으로 보였는데 깐족대는 것은 더했다.
“개기긴 뭘 개겨. 용건이 뭐냐고. 너네 나랑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지훈은 멘트와 달리 목소리를 떨었다. 이제 더 이상 담담한 척 연기를 할 수도 없었다.
“부자한테 할 말이 뭐가 있겠어. 돈 좀 빌려줘라. 우리 떡볶이 좀 사먹게.”
덩치 큰 남자아이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역시 보스급은 솔직하고 간결했다.
“싫어.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왜 돈을 빌려줘.”
지훈은 끝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용돈이야 차고 넘치는데, 돈이 아까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고분고분 돈을 내주기 싫었다.
“우리가 지금 부탁하는 거 같아?”
키 작은 남자아이는 지훈의 머리를 때렸다. 역시나 모든 불량배는 보스가 아니라 쫄따구가 행동력이 좋았다. 결국 매타작이 시작됐다. 키 작은 아이가 지훈을 붙잡았고 덩치 큰 아이는 지훈을 때리기 시작했다. 1대 1로 싸워도 지훈이 질 판에 2대 1이었으니, 지훈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얻어맞고 있었다. 그때 마침 당번이었던 여주가 3층 창문 밖으로 칠판지우개를 털다 그 장면을 목격했다. 엄마를 닮아 불의만 보면 분노조절장애가 오는 여주는 털다 만 칠판지우개를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여주는 성질이 급해 계단을 통으로 뛰어넘듯 해 순식간에 1층에 도달했다. 성인 여자만큼 큰 키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엄청난 속도로 남자애들에게 뛰어가는 여주의 모습은 흡사 사냥감을 발견한 재규어 같았다.
“야 이 새끼들아!!!”
여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칠판지우개로 불량한 남자애들의 머리를 연속으로 후려쳤다. 채 털리지 않은 분필가루가 남자애들 머리와 얼굴에 들러붙어 장관을 이루었다.
“아이씨 미친년이.”
얼굴이 하얘진 두 남자아이는 동시에 여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키 작은 아이의 팔을 잡아 그대로 꺾어버리고, 왼손으로 덩치 큰 아이의 뒷목을 잡아 눌렀다. 여주는 덩치가 크기도 했지만 덩치보다도 힘이 좋았다. 체구는 성인 여자만 했지만 힘은 성인 남성에 가까웠다. 남자애들은 저항도 못하고 여주에게 잡힌 부위가 아파 소리만 꽥꽥 질러댔다. 여주의 자비 없는 악력에 남자애들은 저항할 여력이 없었다.
“계속 개기면 더 세게 누를 거야.”
남자아이들은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아파서 소리는 지르고 있었지만 자존심 상 여자한테 지는 걸 인정할 수가 없어 그만하라고도 하지 못했다. 여주는 그런 식으로 반항하는 불량아들을 굴복시키는 걸 좋아했다. 여주는 웃는 얼굴로 점점 더 세게 힘을 줘 남자애들을 잡았다.
“아 알았어! 아파! 아파! 잘못했어!”
덩치 큰 애가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역시 보스급은 판단력이 빨랐다. 하지만 여주는 두 명이 동시에 항복하기 전까지 힘을 풀지 않았다.
“옆에는 왜 말이 없냐? 네 팔은 더 꺾어도 괜찮아? 부러져도 모른다. 우리 집은 부자라 네 팔 하나 부러져도 깽값 물어주는 거 문제도 아니거든.”
여주는 물리적 공격뿐만 아니라 심리적 공격에도 강했다. 여주는 자신이 부잣집 딸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활용했다.
“아아! 아파! 알았어 알았어 잘못했어!”
결국 키 작은 아이까지 항복 선언을 했다. 여주가 남자애들을 놔주자마자 남자애들은 교실로 뛰어갔다. 여주가 지훈에게 사과를 하라고 시킬까봐서였다. 남자애들은 자기보다 센 여주에게 항복한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차마 약해빠진 지훈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여주도 그들의 생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쫓지 않고 지훈의 옆에 앉았다.
“야 빌빌이.”
여주는 전형적인 정의의 사도와는 캐릭터가 달랐다. 보통은 영웅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고 친절하게 인사를 하는 전개지만 여주는 거칠었다. 지훈의 자존심이 떨어지든 말든 약해서 맞았으니 여주에게 지훈은 빌빌이였다.
“나 말하는 거야?”
지훈은 빌빌이가 자기를 칭하는 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너 말고 여기 또 누구 있니? 귀신 봐?”
여주는 약한 주제에 자존심을 세우는 지훈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내 이름은 박지훈이야 빌빌이라고 부르지 마.”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얻어터지던 게 구해주니까 자존심이 울컥하냐?”
여주의 돌직구에 지훈은 할 말이 없었다. 더 이상 자존심을 세워봤자 더 비참해질 뿐이라는 걸 지훈은 알고 있었다.
“...고마워 구해줘서.”
지훈은 드디어 자존심을 조금 내려놓고 솔직하게 말했다.
“고마워하라고 구해준 건 아니야. 일단 내가 봤으니 무시할 수가 없었어.”
“어쨌든 고마워.”
“그래 고마워하라고 구해준 건 아니지만 고맙다고 안 했으면 꿀밤 때리려고 그랬어. 고마운 줄 모르는 놈은 최악이야. 그나마 똑똑하군 빌빌이.”
여주는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주는 남의 머리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자신의 힘이 세다는 걸 확인하는 절차임과 동시에 상대에 대한 칭찬도 겸하고 있는 의식이었다. 또 짧은 머리카락의 촉감을 좋아하기도 했다.
“너 쟤네가 돈 달라는데 안 줬지?”
여주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지훈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응. 줄 이유가 없으니까.”
“바보. 다른 애들은 줄 이유가 있어서 돈 주는 줄 알아? 돈 안주면 쟤네가 때리는 거 아니까 그리고 힘으로 자기가 못 이길 거 아니까 주는 거야. 다른 애들이 기부천사거나 바보라 주는 게 아니라고.”
여주는 이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계속 쟤네한테 돈이나 뜯기란 거야?”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니 지훈은 또 다시 자존심이 울컥해 언성이 올라갔다.
“너는 영원히 약할 예정이야? 네가 힘이 세지면 되잖아. 학교에서 애들은 딱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어.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그리고 나처럼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놈. 보통은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중에 하나야. 너는 방금 피해자이면서 방관자였어. 내가 남자애 둘하고 싸울 때 너는 날 도울 생각도 안 하고 앉아만 있었어. 방관자지. 내가 너였다면 난 일어나서 도왔을 거야. 날 도와주러 온 내 편이 2대 1로 불리한 상황이니까. 네가 왜 비겁한 방관자였는지 알아? 약하니까. 넌 네가 약한 걸 알고 있어서 무서웠을 거야. 결국 넌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약하기만 한 애였어 방금. 자기편을 위험한 상태로 뒀으니 너 자신도 더 위험해진 거고. 그러니까 강해지던지 아니면 나쁜 놈들이 달라는 대로 주고 조용히 살아. 몸이 돈보다 중요하잖아?”
여주의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자존심에 치켜 올라갔던 지훈의 눈썹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너처럼 강해질 수 있어?”
지훈이 여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사실 난 타고나길 힘이 세서...어쨌든 강해지려고 노력은 해봐. 그러고서 안 되면 강한 놈을 옆에 두던지 그냥 돈으로 해결하든지. 아무튼 피해자랑 방관자가 되는 건 최악이야. 차라리 몸이라도 성한 가해자가 나으니까 열심히 해봐라. 현실은 영화처럼 정의가 승리하는 결말로 끝나지 않아. 살아남으면 장땡이다.”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 교실로 들어갔다. 지훈은 여주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주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왠지 가슴이 떨렸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 처음은 동경이었겠으나 결국은 지훈의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