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못해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지금 다시 여주씨를 만났으니까.”
지훈은 과거를 회상하다가 여주에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근데 초등학생 때 보고 지금 처음 봤는데 날 알아본 거예요?”
“초등학생 때 수소문 해봤더니 JUNE 식품 외동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로 쭉 지켜봤어요. 기사 같은 걸로.”
“와 스토커랑 맞선보는 거 같네요. 소름끼치고 좋네.”
여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팔을 연신 비벼댔다. 20년짜리 스토커랑 맞선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때 상훈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상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윤기가 흐르는 왕자님 같은 모습이었다. 상훈은 여주와 지훈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지훈을 안쪽 자리로 밀어내고 여주 앞에 앉았다. 지훈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옆으로 밀려났다.
“안녕하세요 김여주씨. 저는 이 호텔 부사장인 박상훈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상훈은 뜬금없이 여주에게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 여주도 엉겁결에 상훈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역시나 내키지 않아 손가락으로만 간신히 악수를 하고 재빨리 손을 뺐다.
“동생 응원하러 오셨나요?”
“네. 동생이 연애 한 번 못해본 놈이라 걱정 돼서요. 그런 사람을 모태솔로라고 하죠 아마?”
상훈의 말에 지훈은 아연실색했다. 지훈은 자신이 모태솔로라는 걸 여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주가 자신을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서였다. 지훈은 당황한 얼굴로 상훈의 옆에서 안절부절 못했지만 정작 여주는 아무렇지 않아했다.
“저도 모태솔론데요?”
여주는 태연하게 말했다. 여주의 반응에 상훈은 살짝 당황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남자랑 여자랑 같나요? 남자가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건 좀...”
상훈은 양손을 뱅뱅 돌리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여주는 상훈에게 맞장구 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뭐가 달라요? 남자 모태솔로는 고자라 모태솔로인건가요? 지훈씨 고자예요?”
여주가 지훈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완전 건강해요!”
가만히 있던 지훈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이건 알려야 한다는 의지였다.
“지훈이가 고자는 아닌데 용기가 없어요. 남자면 용기가 있어야 되는데...남자가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가서 대쉬도 하고 욕심도 좀 내고 여자를 좀 리드하고.”
상훈은 눈웃음을 치며 여주에게 동의해달라는 눈치를 줬다. 그러나 여주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왜 여자 욕심을 내야 돼요? 여자 욕심 많아봤자 나중에 바람이나 피지. 쓸모도 드럽게 없는 용기네요.”
여주는 상훈을 ‘뭐 어쩌라고’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허허 아니 그게 아니고...”
상훈은 더 이상 여주에게 대꾸할 수 없었다. 미처 여주의 이상한 성격에 대한 사전조사를 못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것 같았다. 덕분에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지훈은 안정을 되찾았다.
“형 내가 잘 할 수 있으니까 이만 가서 일봐요.”
지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훈을 밀어냈다. 상훈은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김여주씨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상훈은 또 악수를 청했다. 상훈은 여주의 트라우마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스킨십을 많이 하려 했다. 보통은 스킨십을 많이 할수록 여자들이 잘 넘어왔었으니까. 그러나 여주는 역시나 내키지 않아 손끝으로만 간신히 악수를 하고 재빨리 손을 회수했다.
“또 볼지는 모르겠지만 안녕히 가세요.”
여주의 차가운 인사에 상훈은 어두운 얼굴로 레스토랑을 나갔다. 남겨진 지훈과 여주는 애매한 상황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적막만이 흘렀다. 그러다 성격 급한 여주가 먼저 물꼬를 텄다.
“음식이나 시키죠 배고픈데.”
“아! 뭐 드실래요?”
“그쪽 호텔이니까 그쪽이 추천해주는 거 먹을게요.”
“아! 그러면 제가 특별 코스로 준비할게요. 옆에 분 것까지 3인분이면 되죠? 잠시만요.”
지훈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여주는 황당했다. 보통은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하지 않나.
“비서언니...이 호텔 후계자들은 상태가 다 왜 이래...부사장은 동생 도와준다더니 동생 디스만 잔뜩 하고 가버리고 저 전무는 왜 주문을 주방 가서 하는 거야...웨이터는 관상용인건가. 그리고 내가 비서 언니 소개한 적도 없는데 왜 언니가 누군지 묻지도 않지?”
“사장님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저를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인데요? 주방에 간 건 메뉴에 없는 걸 준비하려는 게 아닐까요? 특별 코스라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맞선상대를 여기에 남겨두고 주방으로 사라지면 어떡해.”
여주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꼰 채 꼰 다리를 까딱거렸다.
“모태솔로라잖아요. 이해하세요.”
“나도 모태솔론데 나도 저렇게 이상해?”
“뒤지지 않죠.”
찬미의 묵직한 돌직구에 여주는 입을 닫았다.
지훈은 10분이나 지나서 신난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지훈은 뭔가 엄청난 걸 준비했으니 기대하라는 듯한 시선을 여주에게 마구 쏘아대고 있었다. 잠시 후 나온 요리들은 용 모양, 잉어 모양, 꽃 모양 등 휘황찬란한 데코레이션을 뽐냈다. 나름 먹을 만큼 먹어본 여주에게도 듣도 보도 못한 요리들이었다. 그러나 여주는 요리에 감탄할 여력이 없었다. 점심 때 샐러드 몇 입 먹은 게 전부인 여주는 배가 너무 고파 그 어떤 감탄이나 질문도 없이 요리를 먹어치웠다. 음식이 늦게 나오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그런 여주를 지훈은 턱을 괴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꼭 3살 아이의 식사를 흐뭇하게 쳐다보는 어머니 같았다. 식사를 마무리 하는 차가 나오고 나서야 여주는 지훈을 바라보며 말문을 텄다.
“밥 다 잘 얻어먹고 이런 말 미안하지만 아마 난 그쪽이랑 결혼 안하게 될 거예요.”
여주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네? 왜요? 제가 맘에 안 들어요? 저 진짜 하자 있어서 모태솔로인 거 아니에요.”
지훈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뭐가 문제였지. 초면에 자꾸 실실 웃은 거? 아니면 모태솔로라서? 음식이 너무 거창했나? 지훈은 무엇이 여주의 심기를 거슬렸는지 생각하며 다급하고 절박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난 애 낳을 생각이 없거든요.”
“예?”
“재벌끼리 결혼하면서 애 안 낳겠다는 거 말이 안 되는 거 알아요. 게다가 난 외동인데. 근데 난 허리 디스크도 있고 일 쉬면서 애 볼 생각이...”
“제가 맘에 안 들어서 결혼 못하겠는 거 아니면 상관없어요.”
지훈은 마음이 급했다. 이번이 여주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까 초조했다.
“애가 없어도 된다구요? 그럴 리가. 어디 밖에서 낳아 와가지고 공식적으로는 내 자식인양 그런 플레이 할 생각이라면 동조할 생각 없으니 접구요.”
여주는 당연히 먹힐 거라고 생각했던 거절 레파토리가 실패하자 당황스런 맘에 말이 빨라졌다.
“그럴 일 없어요.”
지훈은 여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자기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여주의 말을 철회시키기 위해 뭐든 하고 싶은 맘이었다.
“그리고 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쪽은 정략결혼도 맘에 드는 눈치지만 난 그러고 싶은 맘이 없어요. 우리 부모님도 정략결혼 아니었거든요. 아버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검사 어머니랑 결혼하셨어요. 덕분에 할아버지한테 제일 작은 회사를 물려받긴 했지만...아무튼 전...”
여주는 어떻게든 자리를 파하겠다는 생각으로 횡설수설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돌아온 지훈의 대답은 여주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그럼 여주씨가 날 사랑하게 만들게요.”
지훈은 이제 여주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여주의 부정적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지훈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지훈은 의자에 엉덩이를 가만히 붙이고 있기조차 힘겨웠다.
“...왜 그렇게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 나랑 결혼하면 형을 이기고 호텔 사장자리 물려받을 거 같아서?”
여주는 지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라 지훈의 이런 태도가 이상하기만 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치고는 지훈은 너무 애절하고 진실해 보였다. 여주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그냥...”
지훈은 솔직하게 짝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라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냥?”
“그냥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언제든 여주씨가 싫다고 하시면 떠날게요.”
결국 지훈은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해 그냥 기회를 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으로는 이미 짝사랑을 수백 번 고백하고 있었다. 톡하면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애절하게 매달리는 지훈을 여주는 내칠 수가 없었다. 그를 거절한다면 죄책감에 시달릴 것만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그 표정을 보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럼. 일단 만나요. 대신 나랑 뭘 하든 내 허락을 받고 해요. 내 손을 잡을 때도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고 나한테 갑자기 가까이 오는 것도 안 되고 내 뒤에서 날 놀라게 하는 것도 안돼요. 아니 아예 내 뒤에 서지 말아요. 짜증나거나 화난다고 나한테 소리를 질러도 안 되고 분위기 좋다고 자기 혼자 삘받아서 키스하려고 하거나 포옹해도 안돼요. 한 마디로 내가 갑이고 그쪽이 을이 되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다면 만나요.”
여주는 자기 입으로 지훈을 허락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남자를 만난다고?’
여주가 말을 끝맺자마자 지훈은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가 죽으라는 것만 아니면 기꺼이요.”
일은 이미 벌어졌다. 엎질러진 물이다. 돌이킬 수 없었다. 먼저 허락했고 상대도 받아들였다. 여주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더니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동갑인데 그냥 말 놔도 되죠? 난 아버지한테도 존댓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
에라 모르겠다. 친구라고 생각하고 대해보자. 여주는 그런 생각이었다.
“좋아요.”
지훈은 활짝 웃어 보였다. 여주가 반말이 아니라 욕설을 하자고 했어도 지훈은 웃었을 것이다.
지훈과 번호 교환을 마친 여주는 찬미와 레스토랑을 떠났다. 지훈은 여주가 떠난 뒤에도 한참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꿈이 아닌 지 자기 볼을 꼬집어봤다. 얼얼한 볼따구로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지훈은 생일선물을 받은 어린이 같은 표정으로 경쾌하게 레스토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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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는 여주가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업무 상 악수도 겨우 해내는 사람이 연애라니. 걱정스러웠다. 지훈이 간절하게 매달렸던 건 봐서 알지만, 그래도 여주가 곧바로 연애를 허락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사장님. 정말 진지하게 박지훈 전무랑 만나실 생각이세요?”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래야겠지.”
여주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트라우마는...”
“그 이후로 19년이나 흘렀잖아. 그 동안 사적으로는 아빠 말고 만난 남자도 없고.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이상하게 그 남자 얼굴을 보니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만나자고 하긴 했는데...모르겠다.”
여주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주도 알고 있었다. 아직 괜찮지 않다는 걸. 친구처럼 대해도 결국 불편해지겠지. 지훈이 제 풀에 지치지 않고 계속 버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돌연 ‘나는 남자를 사랑할 수 없어’ 라고 말해도 될까. 괜히 그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여주는 가슴이 답답했다. 찬미는 그런 여주의 마음을 읽은 듯 여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