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는 길은 쉬워서 다행이네요. 두 사람 업고 내려와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내려가는 코스가 꽤 맘에 들었던 여주는 상훈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제가 다 생각하고 코스를 짰죠.”
상훈은 빛나는 하얀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상훈의 미소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상훈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훈은 자신을 보며 웃는 여주를 보고 우쭐했지만, 사실 여주는 그냥 코스가 맘에 들어 웃었을 뿐 상훈에게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등산에 시간을 너무 써서 저녁 먹고 공항으로 가야 될 거 같아.”
지훈이 여주와 상훈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엥? 난 당연히 1박 2일인 줄 알았는데.”
여주는 소풍이든 여행이든 서울을 벗어나면 1박을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녀가 첫 데이트에 1박을 한다는 부끄러움 같은 건 없었다. 단순히 당일치기는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같은 방을 쓸 것도 아니었으니.
“에? 그래도 돼?”
지훈은 약간 당황했다. 첫 데이트에 1박을 한다는 게 왠지 쑥스러웠다. 같이 자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먼저 가고 싶으면 먼저 가도 돼. 난 하루 더 쉬었다 갈게.”
여주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나도 하루 더 있어도 돼.”
지훈은 손사래를 치며 같이 있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럼 노래방이나 갈래?”
여주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재벌들이 노래방에서 노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큰 프로젝트를 마친 후 경영진들이 직원회식에 참여해 노래방에 가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재벌들끼리 모여 마이크를 잡고 탬버린을 흔들다니. 스스로를 귀족이라 여기는 재벌들에겐 품위가 실추되는 일이었다. 여주도 집에 노래방 기계를 들여놓고 혼자 놀았을 뿐 재벌가 자제들끼리 노래방을 간 적은 없었다.
“노래방?”
지훈은 노래엔 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여주의 제안이 약간 당황스러웠다.
“스트레스 풀 땐 노래방이 최고야. 난 운동으로 스트레스 풀리는 타입은 아닌가봐. 등산해도 별로 개운하진 않네.”
“저희 호텔 근처에 좋은 노래방 있어요.”
상훈은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상훈은 딱히 아는 노래방도 없었지만 여주와 동행하기 위해 괜히 아는 척을 했다. 다들 노래방이란 곳에 친숙하지 않으니 그저 호텔 근처에 있는 노래방 아무 곳이나 집어 여기가 좋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거기까지 같이 가게?”
지훈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상훈을 쳐다봤다. 정말 재수 없게도, 상훈은 노래까지 잘 했다. 지훈은 노래방에서조차 상훈과 비교될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노래방은 사람이 많을수록 재밌으니까 같이 가요 사장님.”
평소 같았다면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을 찬미가 대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상훈과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비서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같이 가시죠.”
여주는 찬미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이런 일에 의견을 표명할 사람이 아닌데. 같이 등산하면서 정이 든 건가 싶었다. 지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여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상훈을 끼워줬다.
네 사람은 호텔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한 뒤 목욕을 마치고 노래방으로 출발했다. 상훈이 제일 앞에 앞장서고 여주와 찬미가 나란히 그 뒤를 따랐다. 지훈은 맨 뒤에서 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워 후 약간 덜 마른 여주의 머리가 찰랑거리면서 지훈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지훈은 상훈과 함께 가는 노래방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방금 목욕을 마친 여주의 향기에 하루의 피로가 전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네 사람이 도착한 노래방은 부잣집 자제들이 놀기엔 작은 규모였다. 상훈이 급하게 핸드폰 검색으로 알아낸 노래방이었기에 지극히 평범한 노래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투덜거릴 틈도 없이 상훈과 지훈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경쟁적으로 노래방책을 낚아챘다. 둘은 마치 시험 5분전의 학생처럼 다급하게 노래방책을 넘겼다. 그러다 지훈이 먼저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번호를 입력했다. 지훈의 선곡은 위치스의 떳다 그녀. 지훈은 나름 여주에게 어필 할 노래로 고른 것이었으나 전주부터 너무나 방정맞았다.
“애타게~너무나 애타게~기다려왔던 그녀가 내게로 왔네! 좋아! 좋아! 네가 와서 좋아! 너무나도 기다렸던 네가 와서 좋아!♪”
지훈은 눈까지 질끈 감고 열창했다. 지훈의 선곡은 여주와 만나게 되어 기쁘다는 뜻이었지만 지훈의 의도와는 달리 여주와 찬미는 그런 지훈의 모습이 조금 부담스러워 서로 눈치를 봤다. 지훈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채 점수가 나오기도 전에 바통 터치하듯 상훈이 앞으로 나갔다. 상훈의 선곡은 라이온 킹 주제가로 유명한 엘튼 존의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And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It is where we are~It's enough for this wide eyed wanderer~That we got this far♪”
상훈은 꽤나 멋지게 팝송을 소화했다. 상훈은 여주와 찬미 앞으로 와 마치 콘서트를 하듯 손까지 내밀며 열창했다. 상훈은 자신의 멋진 외모와 중후한 목소리에 반하지 않은 여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주도 자신에게 반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주는 모니터에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다가 상훈이 앞을 가리자 기분이 언짢을 뿐이었다. 애먼 찬미만 상훈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상훈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또 지훈이 마이크를 잡아챘다. 지훈은 이번엔 애절한 발라드를 선곡했다. 노래에 빗대어 자신의 마음을 여주에게 고백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여주는 머릿속으로 무슨 노래를 부를지 생각할 뿐 노래에 별로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지훈과 상훈은 40분이 넘게 서로 경쟁하듯 노래를 불러댔다. 둘 다 여주에게 어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정작 여주는 자기 차례가 오지 않아 짜증만 났다. 기어코 여주는 폭발해버렸고 상훈이 일어나기 전 지훈의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마이크를 뺏어들었다. 여주의 선곡은 양혜승의 화려한 싱글.
“결혼은 미친 짓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서로 구속해 안달이야♪…재혼도 미친 짓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 좋은 세상을 두고 또 서로 구속해 안달이야♪”
여주는 별 뜻 없이 고른 노래였으나 본의 아니게 두 남자를 퇴짜 놓고 있었다. 여주는 노래가 끝나자 두 남자가 일어나기 전 마이크를 찬미에게 넘겼다.
“그래도 한 곡은 불러야지.”
여주가 찬미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저 두 남자가 또 마이크 쟁탈전을 벌이기 전에 얼른 한 곡이라도 뽑으라는 것이었다.
“전 노래 부르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찬미는 노래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여주가 노래를 권한다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애국가라도 부를 사람이었다. 오늘은 상훈이 보고 있는 지라 약간의 내숭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저랑 듀엣곡 어때요? 그대 안의 블루는 유명하니까 알죠?”
상훈이 벌떡 일어나 찬미 옆에 앉으며 듀엣곡을 권했다.
“아...알긴 아는데...”
찬미는 부끄러움에 말끝을 흐렸고 상훈은 마음대로 노래를 예약했다. 전주가 나오자 상훈은 손목을 잡아 찬미를 일으켰다. 여주는 수줍은 얼굴로 상훈과 듀엣곡을 부르는 찬미의 모습이 너무나 어색했다.
**
호텔로 돌아온 후 여주는 찬미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여주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찬미에게 옆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혹시 박상훈 부사장 맘에 들어?”
여주는 ‘다 아니까 어서 불어라’하는 표정으로 찬미를 쳐다봤다.
“네? 무슨...”
찬미는 시치미를 뗐지만 표정에선 티가 잔뜩 났다. 으악 들켰다 하는 표정.
“난 비서 언니가 수줍음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 맨날 정색하고 있고 웃을 때도 소리 없이 미소만 짓는 정도잖아. 난 언니가 구*에서 새로 만든 로봇인 줄 알았는데. 박상훈 부사장 좋아해?”
여주는 찬미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오늘 두 번째 본 건데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어요.”
찬미는 애써 여주의 시선을 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무표정인 찬미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잘 감추지 못했다.
“두 번 봤지만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었으니까 얘기가 다르지. 솔직하게 말해봐.”
“...그냥 멋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좋아하는 거 맞네! 근데 비서 언니가 너무 아깝다.”
“뭐가 아까워요. 그쪽은 부사장이고 저는 일개 비서인데...”
“일개 비서가 아니지. 비서 언니는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아무나랑 결혼시킬 순 없지. 박상훈 부사장은 나이도 언니보다 6살이나 많고 장가도 갔다 왔잖아. 난 반댈세.”
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며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어보였다.
“반대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오늘 저한테 잘해준 것도 사장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거지 저 때문이 아니에요.”
찬미도 알고 있었다. 상훈이 자기에게 잘 해주는 것이 여주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찬미는 상훈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하는 꼬라지 보니까 아무 여자한테나 잘해줄 놈처럼 보이던데 뭐. 내가 나중에 진짜 괜찮은 남자 소개시켜줄 테니까 부사장은 잊어버리고 들어가서 자.”
여주는 상훈이 영 탐탁지 않았다. 특별히 콕 집어 어디가 별로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느낌이 구리다고나 할까. 찬미가 여주의 방에서 나가고 여주가 침대에 풀썩 눕자 여주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지훈의 문자였다.
지훈-피곤하겠지만 아직 안 자면 잠깐 나올래?
여주-무슨 일인데?
지훈-하고 싶은 말도 있고 밤바다도 같이 걷고 싶어서.
여주-알았어. 1분만 기다려.
여주는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겉옷 하나를 걸치고 슬리퍼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여주의 눈에 보인 것은 코앞에 서있는 지훈이었다.
“아이씨 깜짝이야!”
여주는 너무 놀라 욕을 뱉을 뻔 했으나 과거의 피나는 욕 끊기 연습이 몸에 익어 참을 수 있었다.
“놀랐어? 미안. 마음이 급해서.”
지훈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
여주와 지훈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벤치로 가 나란히 앉았다.
“할 말이 뭐야?”
할 말이 있다면서 내내 말이 없던 지훈에게 여주가 먼저 물었다.
“내가 너랑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
지훈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지금 반말하고 있는 거잖아.”
“...네가 느끼기에도 내가 너한테 너무 들이댄다는 생각 들지? 이제 두 번 본건데.”
지훈은 여주를 쳐다보지 못하고 땅바닥만 쳐다봤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여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긴 한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 내가 집에 개를 키우는데 그 개도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엄청 들이댔거든. 그래서 너 보면서도 별 생각이 없었어. 성격이 원래 좀 멍멍이 같은가보다 하고 말았는데.”
“...사실 나 널 20년 동안 짝사랑했어.”
“뭐?”
지훈의 뜬금없는 고백에 여주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했다. 지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여주가 자신을 구해줬던 일과 그때 여주에게 반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고 살아 왔음을 고백했다.
“내가 그런 오글거리는 멘트를 했다니 충격이군. 근데 넌 또 그거 때문에 반했어? 게다가 고작 그딴 일 때문에 20년을 짝사랑 했다고?”
여주는 지훈의 고백이 감동적이라기보다는 황당했다. 유치한 인터넷 소설도 아니고 초등학생 때의 짝사랑이 어떻게 서른 넘어서까지 유지된단 말인가. 여주는 오늘이 만우절이었나 하고 날짜를 확인해보았으나 확실히 만우절은 아니었다.
“나한테는 그딴 일이 아니었어.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랑 적자생존이 유일한 교육법이셨던 냉정한 어머니 밑에서 나는 외롭고 지쳐있었어. 뭐든지 항상 형한테 밀리는 바람에 부잣집에서 태어난 주제에 사회에 불만도 많고 그냥 눈에 띄지 않게 살면서 나이 먹기를 기다리는 애였지. 근데 어느 날 영화처럼 네가 나타난 거야. 강하고 당당하고 솔직했지. 다른 애들한테 너에 대해 묻다가 네가 JUNE 식품 외동딸 김여주라는 걸 알았을 때는 충격적이기까지 했어. 너희 어머니가 안 좋은 일로 돌아가셨다는 거 뉴스에서 봐서 알고 있었거든. 나보다 훨씬 삐뚤어져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너무 멋있었어. 멀리서 널 바라보면서 처음엔 너처럼 되고 싶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너랑 함께 있고 싶었어.”
지훈은 요동치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주를 쳐다보지는 못하고 애먼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지금 굳이 하는 이유는?”
“내가 너무 미련하게 들이대도 좀 봐달라고. 20년 동안 보고 싶었던 게 터져버려서 나도 내가 잘 제어가 안 돼. 그러니까 내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여주는 지훈의 고백이 당황스럽기만 해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몰랐다. 지훈에겐 20년 동안의 짝사랑이었으나 여주 입장에선 두 번 본 남자가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래도 여주는 지훈이 왜 맞선 자리에서 그렇게 절실해보였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하는 거 봐서. 내가 그렇게 자비롭고 관대한 캐릭터는 아니거든.”
여주는 애매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훈의 진심은 잘 알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갑자기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훈의 진심은 지훈의 것이고 여주의 마음은 별개의 것이니까. 지훈 역시 여주의 확실하고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크게 실망을 하진 않았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자러 가야겠어. 피곤하다.”
여주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지훈은 처음 여주를 만났을 때처럼 여주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찬미는 여주의 방에서 나온 이후 잠이 오지 않아 호텔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찬미는 산에서 상훈과 손을 잡았던 순간을 되짚고 있었다. 상훈의 따듯한 손과 친절한 목소리가 찬미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때 찬미의 뒤에서 찬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훈이었다.
“찬미씨!”
상훈의 목소리에 찬미는 놀라 뒤돌아봤다. 머릿속에 있던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찬미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찬미씨 맞네. 뒷모습 보고 아리까리해서 일단 부르고 봤는데.”
상훈은 찬미에게 천천히 걸어오며 능글맞은 얼굴로 웃어보였다.
“잠이 안와서 산책 좀 하고 있었어요.”
찬미는 차마 상훈과 눈을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 땅바닥을 보며 말했다.
“나돈데. 같이 걸어요.”
상훈은 자연스럽게 찬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얼마나 여자를 많이 만났는지 친하지 않은 여자에게도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찬미는 또다시 자기도 모르게 수줍어졌고 그런 모습을 상훈에게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몇 분 간 말없이 걷다가 상훈이 말문을 열었다.
“뭔데요?”
“여주씨랑 찬미씨는 일반적인 사장이랑 비서 사이 같진 않던데 언제부터 같이 다녔어요?”
찬미는 상훈의 질문에 ‘역시나 사장님에게 관심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슬펐지만 성실하게 대답했다.
“사장님 고1 때부터요. 사실 저랑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어쩌다보니 특별한 관계가 됐어요.”
“사연 좀 들려주면 안 돼요?”
찬미는 조금 망설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장님이랑 저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사장님은 고1이고 저는 고3. 저희 아버지는 제가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놓고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교까지 쫓아와서 저를 때리곤 하셨어요. 그날도 점심시간에 아버지가 찾아오셨다는 얘길 선생님한테 전해 듣고 교문으로 나갔는데, 아버지는 절 보자마자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렸죠. 자주 있던 일이라 저는 그냥 말없이 맞고 있었어요. 그때 사장님이 교문 근처에 있던 체육관에 심부름 하러 가셨다가 그 장면을 보신 거예요. 다른 학생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다 모른 척하고 가는데 사장님만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무서울 법도 한데 사장님은 막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오셨죠. 아버지가 사장님한테 막 욕을 하니까 사장님은 더 심하게 욕을 하셨어요. 사장님이 등치가 워낙 크니까 아버지는 주춤거리다 그냥 가버리시고 저는 멍청하게 서 있고.”
슬픈 기억이었지만 찬미는 웃고 있었다. 그때 자신을 구해주러 달려오던 여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럼 그 인연으로 계속 친하게 지내다가 비서로 취직한 거예요?”
“친한 정도가 아니라 저를 가족으로 받아주셨어요. 저를 때리던 사람이 제 아버지라고 말했더니 고등학교 졸업하면 자기 집으로 들어와도 된다고 하셨어요. 자기 집에 방 많다고. 그래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회장님 댁으로 들어가 살게 됐고 사장님의 비서이자 경호원이 되기 위해 공부했어요. 그래봤자 사장님이 싸움을 더 잘 하시지만요.”
“어떻게 처음 본 사람을 자기 집으로 들였을까요? 여주씨가 생각보다 마음이 약한가 봐요?”
“저도 그게 너무 의아해서 언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날 뭘 믿고 집으로 들였냐고. 알고 보니 제가 사장님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았대요. 원래는 구해주고 그냥 가려고 했는데 제 얼굴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냥 보내기가 싫었다고 하시더군요.”
“아 맞아 여주씨 어머니가 무슨 전과자한테 살해당했다고 그랬나? 뉴스에서 본 거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래요?”
“사장님 어머니는 평검사셨는데 높은 형량으로 구형했던 범죄자가 앙심을 품었던 모양이에요. 출소하자마자 사장님 어머니를 찾아와서...그때 사장님이 11살이었어요.”
“부잣집 사모님이 평검사로 일했어요?”
“사모님은 평범한 집안 분이셨고 부잣집에 시집간 거랑은 별개로 계속 자기 일을 하셨대요. 평검사로 일하던 중에 회장님을 만나게 됐고 회장님이 사모님한테 반해서 프로포즈 하신 걸로 알아요.”
“집안에서 반대 안 했대요? 평범한 집안 평검사면 순탄하게 결혼하진 못했을 텐데?”
“그래서 회장님이 가장 작은 회사를 물려받으셨어요. 회장님의 아버지는 자식들 중에 회장님을 총애 하셨는데 회장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계열사 중에 가장 작은 식품회사를 물려주셨죠. JUNE 식품이 JUNE 그룹으로 커진 건 회장님 노력의 결과에요.”
찬미는 자기도 모르게 추억에 젖어 말을 하다가 쓸데없이 너무 많은 정보를 상훈에게 주고 있었다. 찬미가 하고 있는 말들은 여주가 특별히 찬미에게만 자세히 얘기해주었던 것들이었다. 상훈은 그런 찬미를 보며 속으로 사기꾼처럼 웃고 있었다. 상훈은 찬미가 더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녀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대단한 집안이네요. 여주씨도 능력 있기로 유명한데 유전인가 봐요.”
“...저희 사장님한테 관심 있으시죠?”
찬미는 여주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고 상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 관심 있어요. 찬미씨가 도와줄 수 있어요?”
상훈은 대범하게도 대놓고 그녀를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지금 박 전무님이랑...”
“호텔 차기 사장은 저예요. 제가 여주씨랑 더 어울리지 않겠어요?”
상훈은 마치 최면을 걸듯 찬미에게 자신을 주입시켰다.
“글쎄요...전...”
찬미는 망설였다. 찬미는 여주가 상훈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여주에게 지훈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찬미는 상훈을 단호하게 잘라내지 못했다. 상훈과 여주를 완전히 떨어뜨리면 자신은 더 이상 상훈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찬미는 여주에 대한 신의와 상훈에 대한 끌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상훈은 독심술사처럼 찬미의 마음을 읽었다. 찬미가 자신을 좋아해서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상훈은 찬미의 눈빛만으로 알아챘다.
“사장님 번호요? 그건 좀...”
“아니 찬미씨 번호요.”
“저요? 제 번호는 왜...”
“서로 돕고 살자구요.”
상훈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찬미는 엉겁결에 상훈과 번호를 교환했다. 여주의 번호가 아니라 자신의 번호니까 언제든 그를 잘라낼 수 있다는 생각, 여주에겐 피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연락할게요!”
상훈은 번호 교환이 끝나자 볼일 끝났다는 듯 호텔로 뛰어갔다. 찬미는 덩그러니 서서 그런 상훈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