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네 사람은 전날의 등산으로 온 몸이 뻐근했다. 마치 체력장 다음 날 아침처럼 제대로 걷기도 힘이 들었다.
“아 미친...분명 어제는 괜찮았는데...아이고 사람 살려...”
여주는 깡통 로봇처럼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간신히 세수만 한 후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제주도 관광이고 뭐고 집에 가서 누워 있어야지 안 되겠다.”
여주는 당장 서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좀비 같은 몸으로 방에만 갇혀 있을 거면 호텔보다야 익숙한 자기 집이 나으니까. 여주가 찬미에게 짐을 싸라고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지훈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지훈-굿모닝!
“굿모닝은 개뿔.”
여주-굿모닝 같은 소리하네. 삭신이 쑤셔 죽겠다. 나 지금 서울 갈란다.
여주는 지훈에게 귀환 통보를 마친 후 찬미에게 짐을 싸라고 문자를 보냈다.
20분 만에 대충대충 짐을 싼 여주가 캐리어를 챙겨 문을 열자 이미 돌아갈 준비를 다 마친 지훈이 여주를 반겼다.
“아이씨 깜짝이야! 야! 죽을래? 자꾸 문 앞에 서 있지 말란 말이야!”
“미안해. 집에 가자.”
여주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지훈은 여주의 캐리어를 뺏어들었다. 거의 모든 로맨스 영화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내 여자 짐 들어주기' 장면. 내 여자를 보호하는 강하고 든든한 남자. 그것을 따라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삭신이 쑤시는데 네가 멀쩡하단 말이야? 캐리어 두 개를 끄시겠다?”
여주는 지훈이 영 못 미더웠다. 전날 산에서 후들거리던 지훈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가자.”
지훈은 태연한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었지만 자기 의지와는 달리 다리에 힘이 풀려 덜그덕 거렸다. 로맨스 영화보다는 유머 1번지나 개그콘서트에 어울리는 숭구리당당숭당당. 지훈은 미친듯이 민망했지만 내색을 하면 더 민망할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새로 나온 걸그룹 안무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게 센 척은.”
여주는 다시 자기 캐리어를 뺏어들었다. 그냥 내 짐 내가 들겠다는 여주와 굳이 자기가 들어주겠다는 지훈이 투닥거리는 동안 찬미가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 준비 다 하셨어요?”
“어. 빨리 가자. 집에 가서 찜질하고 쉴래.”
“잠깐만 기다리세요. 프론트에 연락해서 짐 가지러 와달라고 했어요.”
찬미의 말에 여주와 지훈은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진작 그렇게 할 걸 굳이 왜 실랑이를 했을까. 현명한 찬미 덕에 세 사람의 짐은 호텔 컨시어지가 차 앞까지 내려다 주었다.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찬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호텔에 혼자 남은 상훈을 걱정했다. 나이를 41살이나 먹은 데다 그 호텔 부사장인 사람이 혼자 남는다고 큰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비서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아니에요.”
찬미는 자신이 상훈을 신경쓰고 있음을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찬미는 차가 공항에 도착할 때 쯤 조용히 상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찬미-사장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저희 먼저 서울로 갑니다.
“누구한테 문자하는 거야?”
평소 핸드폰을 잘 보지 않는 찬미가 어두운 표정으로 문자를 보내니 여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친구요.”
“내가 모르는 친구도 있었나?”
“네. 아주 가끔 문자만 하는 친구...”
안 해도 될 거짓말이었다. 찬미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내뱉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찬미가 여주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주는 뭔가 꺼림칙했지만 찬미를 믿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
제주도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출근 중인 여주에게 어김없이 지훈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지훈-굿모닝. 출근 중이지? 몸은 좀 괜찮아? 오늘 저녁에 영화 어때?
여주-무슨 영화?
지훈-로맨틱 코미디 어때?
여주-난 그냥 코미디.
지훈-그래 그럼 그냥 코미디.
여주-비서 언니까지 3명.
지훈-또 3명 ㅠㅠ 알았어.
“박 전무님이세요?”
지훈과 문자 중인 여주에게 찬미가 물었다.
“응. 영화 보자고 하네.”
“언제요?”
“오늘 저녁. 코미디 영화 보자고 했어. 비서 언니도 당연히 같이 가는 거야.”
그때 찬미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상훈이었다.
상훈-찬미씨 오늘 여주씨랑 지훈이 만나요?
찬미는 잠깐 고민하다 사실대로 답장을 했다.
찬미-네. 저녁에 영화 보신대요.
상훈-어디서 몇 시에 보는 지 확정되면 알려줄 수 있어요?
찬미는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답장을 하지 않은 채 문자 창을 빠져나갔다. 여주의 자세한 스케줄까지 알려주는 것은 비서로서의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훈이 데이트 스케줄을 묻는 것은 데이트를 방해하겠다는 예고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찬미가 안 된다고 답장을 하는 대신 아무 답장도 하지 않은 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또 저번에 그 친구야?”
“네.”
여주의 물음에 찬미는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두 번째라 그런지 지난번보다는 죄책감이 조금 덜한 느낌이었다.
**
저녁 6시.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자 여주에게 지훈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지훈-퇴근 준비 중? 8시 영화 괜찮아?
여주-응
지훈-그럼 8시까지 xx역 m박스 영화관으로 와.
여주-응
“8시까지 xx역 m박스로 오래.”
여주가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찬미에게 말했다.
“오늘 일은 다 끝내셨어요?”
“어 오늘은 다행히 일이 별로 없네. 저녁 먹고 가자.”
찬미는 여주와 저녁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오는지 코로 들어오는지도 모를 만큼 고민스러웠다. 상훈에게 약속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어야 하나. 여주에 대한 신의와 상훈에 대한 끌림 사이에서 한참 방황한 끝에 찬미는 여주 몰래 상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찬미-오늘 8시에 xx역 m박스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
여주와 찬미는 영화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매표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지훈을 발견했다. 캐주얼한 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명품 수트를 차려입은 키 큰 남자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여기 덤덤앤 더머로 3장 끊었어.”
지훈은 여주와 찬미에게 표를 한 장씩 내밀었다. VIP관이 아닌 일반상영관 티켓이었다. VIP관은 자리가 2인 단위로 끊어져 있어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지훈은 일반상영관 티켓을 끊은 것이었다. 2인석이면 여주가 찬미와 앉을 게 뻔했으니까. 여주는 VIP석이 아니란 것에 딱히 불만을 갖지 않았다. 여주도 셋이서 영화를 볼 때는 일반석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는 세 사람 뒤에는 상훈이 있었다. 상훈은 영화관에 가장 먼저 도착해 지훈을 지켜보고 있었다.
“덤덤앤 더머 한 장이요.”
상훈은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훈이 산 영화표를 따라 사고 상영관으로 숨어들었다. 먼저 들어갔던 세 사람은 지훈, 여주, 찬미의 순서로 앉아있었다. 시끄러운 광고가 나오는 사이, 뒤이어 들어온 상훈은 찬미 옆에 앉은 남자에게 10만 원짜리 수표 3장을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자리 좀 바꿉시다.”
자리 주인은 이게 웬 횡재냐 하는 표정으로 흔쾌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상훈은 조용히 찬미 옆에 앉았다. 찬미는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상훈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찬미는 이미 상훈의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찬미는 상영 내내 상훈이 신경 쓰여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지만 상훈은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 웃으며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가 끝난 후 상영관에 불이 들어오자 비로소 상훈은 일행 앞에 자신을 드러냈다.
“영화 재밌네요. 그죠 여주씨?”
“어? 왜 여기 계세요? 아까 못 봤는데.”
여주는 옆에서 조용히 떨고 있는 찬미가 공범인 것도 모른 채 상훈과 인사를 나눴다. 지훈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상훈에게 따져 묻기만 할 뿐이었다.
“뭐야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어?”
“영화 보러 왔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계시네요. 운명인가 봐요. 영화 중간에 여주씨 봤는데 관람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참았어요.”
상훈은 지훈의 물음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운명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어떻게 알고 왔냐니까? 형이 무슨 혼자 일반석에 앉아 영화를 본다고 그래?”
“제주도에서 먼저 가셔서 서운했어요.”
상훈은 계속해서 지훈을 무시했고 여주에게만 말을 걸었다.
“아 그땐 죄송했어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겠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가면 간다고 말씀은 드리는 게 예의인데.”
여주는 방금 상훈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제주도에 상훈을 버리고 온 것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마치 그날 서울에 돌아가자마자 생각이 났다는 듯 사과했다. "그쪽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서 몰랐네요"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 여주가 아무리 막돼먹은 성격이었어도 이 정도 예의는 있었다.
“미안하면 다음에 밥 사세요.”
상훈은 여주와 단 둘이 만날 핑계를 만들기 위해 운을 띄웠다.
“밥 먹을 돈이 없어? 밥을 왜 사달래? 내가 돈 줄 테니까 가서 사먹어.”
옆에 있던 지훈은 언성을 높이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상훈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상훈에게 지훈은 여전히 투명인간이었다. 지훈이 돈을 내밀든 말든 상훈은 여주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다음에 지훈이랑 밥 먹을 때 같이 만나서 먹어요. 제가 살게요. 저희 회사 근처에 맛있는 한식집 있는데 한식 괜찮으세요?”
여주는 상훈과 단 둘이 만나는 게 불편했기 때문에 다 같이 밥을 먹을 것을 제안했다. 상훈은 속으로 아쉬워했지만 태연한 척을 했다.
“전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봬요.”
상훈은 젠틀하고 잘생긴 웃음을 지으며 뒤돌았고 지훈은 웬일인지 순순히 물러나는 상훈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여기까지 쫓아와서 그냥 가다니 무슨 꿍꿍이일까. 지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상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사실 오늘 일은 찬미를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훈은 찬미가 앞으로도 자신에게 정확한 정보를 줄 것을 확신했다. 확신의 근거는 여주 옆에서 공범처럼 떨고 있던 찬미의 태도였다.
**
토요일 아침 9시. 쉬는 토요일이라 간만에 늦잠을 잔 여주가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꺼진 핸드폰의 전원을 켜니 역시나 얼마 안 되어 지훈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참 성실해...어쩜 토요일 아침부터 연락하네.”
지훈-공원에서 조깅 어때?
여주-난 원래 주말에 헬스 따로 가는데
지훈-실내에서 운동하는 것보다 밖에서 조깅하는 게 꽃도 보고 좋잖아.
여주-어디서 조깅할건데?
지훈-여의도 공원 어때? 저번에 얘기한 나랑 성격 비슷한 개도 데려와
여주-안 그래도 야망이 꽃구경 시켜줄 때 되긴 했다.
지훈-개 이름이 야망이야? 웃기다. 몇 시에 만나는 게 편해?
여주-점심 먹고 만나는 게 좋겠어. 한 2시?
지훈-그래 그럼 2시에 여의도 공원?
여주-응. 오늘도 비서 언니 데려간다.
지훈-ㅠㅠ 알았어 ㅠㅠ
“2시에 여의도 공원에서 지훈이랑 조깅하기로 했어. 같이 가자.”
여주는 찬미와 점심을 먹으며 조깅 약속에 대해 일러주었다. 쉬는 날이어도 찬미의 업무는 끝나질 않았다. 같은 집에 사니 업무와 일상이 혼연일체가 됐다고나 할까.
찬미는 여주의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여주한테 끌려다닐 생각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상훈으로부터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주말이니 당연히 데이트 약속이 있을 거라 생각한 상훈은 찬미에게 또다시 데이트 정보를 요구했다. 찬미는 또다시 갈등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찬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기 직전 신발장 옆에서 상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찬미-2시 여의도 공원이요.
여주는 여의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찬미의 어두운 표정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비서 언니 오늘 컨디션 별로야? 표정이 영 안 좋네. 괜히 같이 가자고 했나?”
“아니에요.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고민 있어? 말해 봐.”
“별 거 아니에요.”
여주는 왠지 찬미가 낯설게 느껴졌다. 평생 서로에게 뭔가를 숨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찬미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편 찬미는 여주에게 자꾸 거짓말을 하게 돼 마음이 좋지 않았다. 거짓말을 거듭할수록 죄책감은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았지만 공범으로서의 불안함은 점점 커졌다. 뒷자리에 있던 야망이는 둘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느끼고 가운데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