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나요 사장님?”
찬미가 여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뭐...원래 지금 휴가 기간이니까...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그럼 저 회 먹고 별장으로 들어갈게요.”
“어, 어 그래...”
여주는 찬미가 점점 더 낯설어졌다. 여주 옆에는 항상 당연하게 찬미가 있었고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찬미의 의사를 존중하는 여주는 찬미를 상훈에게 보냈다. 찬미는 상훈과 떠나버리고 여주와 지훈은 덩그러니 낚싯대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조개 칼국수 먹으러 가는 거지?”
지훈이 정적을 깨고 물었다.
“어...너도 괜찮으면 그냥 그거 먹자. 아깐 아무거나 둘러 댄 건데 맛있을 것 같네.”
**
“비서 언니 빨리 왔네?”
별장으로 돌아온 여주는 찬미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물었다.
“네. 근처 횟집에 손님이 별로 없어서 금방 떠서 먹었어요.”
“어 그랬구나...아빠는 들어왔어?”
“회장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식사하시고 산에 가신 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아 그래?”
여주와 찬미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꼭 대판 싸우고 어색해진 자매 같았다. 여주는 괜히 마른 코만 몇 번 훌쩍이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누웠다. 여주는 혹시 자기가 찬미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지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여주는 찬미에게 직접 묻기로 결심하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비서 언니 혹시...”
문을 엶과 동시에 운을 띄운 여주는 문자를 보내다 황급히 휴대폰을 감추는 찬미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보다 훨씬 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 여주는 찬미가 변한 이유가 자신이 아니라 문자 상대방에게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 상대방이 누군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뭐 시키실 거 있으세요 사장님?”
“아니...어...저녁에 조개구이 먹자고 아빠랑 같이.”
“조금 있다가 회장님 들어오시면 전달할게요.”
“지훈이한테도 전해줘. 난...좀 쉴게.”
여주는 대충 아무 말이나 얼버무린 채 다시 방문을 닫았다. 왜 자꾸 말문이 막히면 조개가 생각이 나는지. 온종일 조개만 먹게 생겼다. 여주는 찬미의 문자 상대방이 궁금했지만 그래도 찬미의 핸드폰을 몰래 보는 건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생각에 한참을 갈등했다.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괴롭게 고민하던 여주는 문자 내용은 보지 않고 문자 상대방의 이름만 보는 것으로 자체 타협을 끝냈다. 물론 그것도 찬미 몰래 찬미 핸드폰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때의 얘기였다.
해가 떨어지자 여주 일행은 다 같이 조개구이집으로 향했다. 사실 조개구이쯤은 관리인에게 부탁해 앞마당에서 구워도 됐지만 여주는 바다를 보며 먹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밖에 있어야 찬미의 휴대폰을 몰래 보기가 더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개구이는 관리인한테 얘기하면 전 세계 조개를 다 세팅 해줄 텐데 왜 나가서 먹자는 거야?”
격식 없고 사람 많은 곳에서의 식사가 불편한 김준 회장이 투덜댔다.
“너무 안에만 있으면 그렇잖아.”
여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 여주는 거짓말이 서툴러 표정에서 티가 났다.
“너 맨날 집에 처박혀 있는 거 내가 모르냐? 야망이 산책할 때 빼고는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김준 회장이 정곡을 찔렀다. 여주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회장의 못마땅한 시선을 피했다.
조개구이집은 벌써부터 술 취한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김준 회장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고 지훈의 표정에서도 불편함이 느껴졌다. 미안했던 여주는 열심히 조개를 굽고 손질했다. 찬미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여주는 손사래를 쳤다. 찬미 손이 놀아야 무의식적으로 또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개들이 다 익어갈 때 쯤 찬미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핸드폰을 들고 가게를 나갔다. 여주는 아차 싶었다. 자기 눈앞에서 문자를 보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여주는 불판의 열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채로 울상을 지었고 지훈은 여주에게서 집게를 뺏어들었다.
“힘들지? 이제 내가 할게.”
“응? 아니 조개 굽는 것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지훈과 여주가 집게를 들고 실랑이 하는 사이 찬미가 돌아와 집게를 뺏어들었다.
“역시 제가 굽는 게 좋겠죠?”
찬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찬미가 조개를 굽기 시작한 지 10분 쯤 지나자 가게 안으로 상훈이 들어왔다.
“여기서 또 보네요.”
지훈은 상훈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목소리만 듣고도 이마에 금이 갔다. 화가 솟구쳐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여주의 아버지가 있는 자리라 태연한 척 상훈을 맞이했다.
“형 자주 보네 하하.”
지훈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복화술을 하듯 말했다.
“오! 자네 박 전무 형이지? 호텔 부사장.”
김준 회장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상훈을 반갑게 맞이했다. 상훈과 김준 회장이 악수를 나누는 동안 여주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저 남자는 왜 자꾸 내 앞에 능글맞게 나타나는가. 이 정도면 운명이라고 하기에도 억지인데. 그러다 여주는 상훈을 보며 묘하게 웃고 있는 찬미를 발견했다. 아! 찬미 언니가 부른 것이구나! 드디어 모든 것이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비서 언니와 문자를 하던 사람은 박상훈 부사장이고 비서 언니가 장소를 알려주는 바람에 자꾸만 나타난 것이었구나. 유레카!’
하지만 여주는 찬미와 상훈이 비밀연애를 한다고만 생각했다. 상훈은 찬미를 이용하고 있고 찬미는 기꺼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주는 꿈에도 몰랐다.
상훈의 합류로 조개가 추가되고 저녁식사 자리가 길어졌다. 상훈은 비즈니스에 능하고 언변이 좋아 김준 회장과 죽이 잘 맞았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상훈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뜨자 여주도 그를 따라 나갔다. 비서 언니와 사귀는 것을 알았으니 몰래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비서 언니에게 잘 대해주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상훈의 뒤를 몰래 밟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통화내용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넘어오라는 회장 딸은 안 넘어오고 애먼 사장 비서만 따라붙었어. 어쨌든 비서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따라줘서 지금 회장까지 만났다. 회장 딸 꼬시는 것보다 회장 꼬시는 게 쉬울지도 몰라. 멍청한 박지훈은 회장 눈치 보느라 화도 못 내고 억지로 웃고 있어. 얼굴 진짜 웃겨.”
남자화장실 바로 앞에 서 있던 여주에게 화장실 문 너머로 상훈의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훈은 통화에 정신이 팔려 여주가 따라왔다는 것도 모른 채 여유롭게 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여주는 상훈의 계략을 모두 알게 됐고 이성의 끈은 툭하고 떨어져버렸다. 여주는 상훈이 남자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상훈의 멱살을 잡아챘다.
“야이 양아치 새끼야.”
갑자기 여주가 멱살을 잡고 욕설을 하자 상훈은 당황하며 여주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여주는 엄청난 힘으로 상훈의 멱살을 쥐고 놓지 않았다.
“왜 이래요 김여주씨!”
“왜 이래요는 개뿔 진짜...뒤질래?”
“미쳤어요? 이거 놔요!”
“미쳤어요? 미친 건 너겠지 이런 쓰레기야. 넌 네 친동생도 배신하고 내 가족들을 기망했어. 법이 없었으면 네 주댕이를 벌써 부셔놨을 텐데 법치국가인 게 아쉽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영어로 해주리?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은 확 씨. 너 네 동생 결혼 막자고 우리 비서 언니 속이고 나랑 어떻게 해볼라고 그랬냐? 우리 아빠가 웃으면서 얘기해주니까 이혼남도 막 사위로 받아줄 거 같고 그러디? 어?”
상훈은 이미 다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량한 표정을 풀고 인상을 찌푸렸다.
“남의 통화 내용을 듣는 건 너무 비매너 아닌가?”
“비매너는 새끼야 네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비매너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너 진짜 죽을래?”
여주는 멱살 잡은 손을 있는 힘껏 아래로 당겼다. 상훈의 상체가 앞으로 기우뚱 하며 셔츠 단추가 줄줄이 튿어져 나가 구정물이 잔뜩 고인 바닥에 떨어졌다. 상훈은 앞섶이 다 풀어헤쳐져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성난 식스펙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가 뭔 힘이 이렇게 세?”
상훈은 여주의 힘에 당황했으면서도 태연한 척을 했다. 상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세를 꼿꼿이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남자의 자존심, 센 척은 상훈에게 생명과도 같았다.
“나 지금 CCTV 때문에 참고 있거든? 다음에 CCTV 없는 곳에서 만나면 넌 얻어터지는 거야. 비서 언니한테 다시 연락해도 죽여버릴 거니까 다신 내 근처에 얼씬도 말고. 알겠냐?”
여주는 밀려오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씩씩대며 말했다.
“부잣집 아가씨가 입이 그렇게 상스러워서 쓰나? 아~ 그래서 연애를 못 했구나?”
상훈은 여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기 때문에 여주 앞에서 입을 씰룩거리며 비아냥댔다. 결국 여주의 분노와 짜증은 화산폭발처럼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여주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상훈의 명치를 날렸다. 여주의 온 힘을 다한 펀치는 생각보다 강했다. 단 한 대였지만 상훈은 순간 숨이 턱 막혀 지저분한 바닥으로 넘어졌다. 켁켁대는 상훈을 보며 여주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화를 조금 가라앉혔다.
“생각해보니까 CCTV 신경 안 써도 될 거 같다. 네 자존심에 여자랑 1대 1로 있다가 얻어맞았다고 고소하진 못할 거 같거든. 뭐 고소해도 상관없어. 부자인 내가 징역살 리는 없고 뉴스에 나오면 너만 쪽팔리겠지. 깽값이라도 받고 싶으면 회사로 찾아와도 돼. 요즘 관광객 적어져서 호텔 힘들다던데 병원비 명목으로 좀 뜯어내든가.”
이번엔 여주가 비아냥대며 말했다. 상훈은 이제 일어날 수 있었지만 여자에게 한 대 맞고 넘어진 게 창피해서 계속 바닥에 누워있었다. 여주는 어릴 때부터 남자와 싸운 적이 많아 남자들의 싸움 유형에는 빠삭했다. 자존심이 센 남자애들은 여주에게 맞아도 누구에게 이르는 법이 없었다. 여주는 상훈이 자존심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못할 거란 것도, 그리고 지금 자신 앞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여주는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상훈을 뒤로 한 채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상훈은 여주가 사라지자 벌떡 일어나 연신 옷을 털어댔다. 셔츠에는 넘어지면서 묻은 모래가 잔뜩 붙어있었다. 상훈은 다른 사람 앞에 멋지지 않은 모습으로 있는 걸 가장 싫어했기 때문에 황급히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한편 조개구이집으로 돌아온 여주는 개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박상훈 부사장은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 우리도 별장으로 돌아가자.”
여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나랑 한참 얘기하다 말고 그냥 갔어? 진짜 급한 일인가보네. 박 전무는 안 가봐도 되는 일인가?”
김준 회장이 지훈을 보며 물었다.
“예? 저는 특별히 연락 온 게 없는데...”
지훈은 급히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아무 문자도 온 것이 없었다.
“박상훈 부사장 개인 스케줄일 거야.”
의미심장하게 웃는 여주 옆에서 찬미는 상훈이 걱정되어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찬미는 여주 몰래 상훈에게 문자를 보낼 타이밍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잠깐 화장실 좀...”
찬미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주가 찬미의 손목을 잡았다.
“휴대폰은 놓고 가. 화장실에 휴대폰 놓을 곳도 없는데 괜히 변기에 빠뜨리지 말고.”
찬미는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여주의 표정을 보면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