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자리에 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여주는 그 사이 찬미의 휴대폰을 열어볼까 망설이다 이내 포기하고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어차피 별장에 돌아가 찬미에게 상훈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찬미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고 여주 일행은 별장으로 향했다. 찬미는 별장으로 가는 내내 여주의 눈치를 살폈다. 여주의 표정은 평소보다 어두웠다.
별장에 도착하자 여주는 방으로 들어가려던 찬미를 불러 세웠다.
“비서언니는 잠깐 내 방에서 얘기 좀 해요.”
여주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찬미는 여주가 자신의 핸드폰을 봤다고 생각했다. 찬미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긴장한 채 여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주는 침대 발 밑 쪽에 있는 3인용 갈색 소파 맨 오른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찬미에게 자기 옆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찬미가 조심스레 여주 옆에 앉자 여주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
“박상훈 부사장은 개자식이야.”
여주는 아직까지 찬미가 상훈에게 속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찬미가 상훈의 계략을 알면서도 거기에 동참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죄송해요 사장님.”
찬미는 여주의 눈을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찬미는 여주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과한 것이었다.
“몰래 연애한 것 때문이 아니야. 내가 아까 박상훈 부사장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지 동생 결혼 하는 거 막으려고 비서 언니 이용한 거였어.”
“...죄송해요 사장님...”
상훈과 연애라니 그런 건 해본 적도 없었다.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찬미는 여주가 아직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상훈과 주고받은 문자를 봤다면 그것이 연애라고 생각할 리 없었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여주의 데이트 스케줄을 상훈에게 보낸 것은 분명 공범이란 뜻이었다. 찬미의 큰 눈에선 참회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주는 그저 상처받았을 찬미가 안쓰러워 찬미를 토닥였다.
“뭐가 죄송해. 비서 언니도 속은 거잖아.”
여주의 말에 찬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나도 알고 있었지만 박상훈 부사장을 짝사랑해서 사장님을 속여 왔다고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이 순간까지도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믿고 있는 여주에게 진실을 말하기란 어려웠다. 여주가 상처받을 테니까.
“그 자식이 도대체 뭐라고 꼬셨는지 모르겠는데 다 잊어버려. 번호도 지금 지우자. 핸드폰 줘봐.”
여주가 찬미의 핸드폰에 손을 대자 찬미는 있는 힘껏 핸드폰을 쥐었다. 여주에게 상훈과의 문자내용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찬미는 차라리 핸드폰이 부서지길 바라면서 온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알았어. 문자 내용 보여주기 창피한 거지? 그럼 비서 언니가 지워.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사이에 뭐 숨기지 말자. 박상훈 부사장이랑 연애한다고 했어도 내가 못 만나게 방해하진 않았을 거야. 애초에 그 사람은 맘에 안 드는 사람이었지만 난 비서 언니를 믿으니까 기다려줬을 거야. 난 비서 언니가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았을 때가 가장 힘들었어. 비서 언니 행동부터가 어색하니까 나까지 덩달아 이상해지고...우리 죽을 때까지 같이 갈 사이인데 고작 이런 걸로 어색해지지 말자.”
여주는 찬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여주가 말을 할수록 찬미는 여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더 괴로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여주에게 사실을 고백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찬미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흐느낄 뿐이었다.
“많이 힘들 텐데 방에 들어가서 쉬어. 박상훈 부사장한테 또 연락 오면 나한테 말하고. 그놈 손가락을 아주 다 부러트려 줄 테니까.”
찬미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찬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로 숨기지 말자는 여주의 말에 사실을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언제 말해야 할 지 고민이 많았다. 찬미는 밤새 뒤척이다 동이 트자마자 앞마당으로 나갔다. 앞마당에는 차를 마시기 위한 흰 테이블과 흰 의자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찬미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테이블 앞에 앉아 하늘만 바라봤다.
“비서 언니 일찍 일어났네.”
여주가 아침의 정적을 깨며 다가오자 찬미는 깜짝 놀라 뒤를 쳐다봤다. 여주는 부스스한 몰골로 살짝 젖은 잔디들을 자박자박 밟으며 찬미 옆에 앉았다.
“사장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찬미는 마당 나무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주와 찬미는 다른 사람들이 일어날 때까지 말없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여주는 상훈에게 배신당한 찬미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놀다보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다. 하지만 사실 찬미가 힘든 건 여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시계가 8시를 가리킬 때 쯤 지훈이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나왔다. 안경을 쓰지 않았지만 앞마당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여주와 찬미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별장에 여자는 여주와 찬미뿐이었고 요상한 잠옷을 입은 쪽이 여주였다.
“다들 일찍 일어났네?”
지훈은 잠에서 덜 깬 맹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여주 옆에 앉았다. 여주는 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 녀석 꽤 잘생긴 얼굴이었네’하고 생각했다. 방금 일어나 조금 부은 얼굴에 개기름까지 번들거렸지만 안경에 가려졌던 큰 눈과 날선 콧대가 잘생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주는 하품하는 지훈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웃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훈은 비몽사몽간이라 그 달달한 눈길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 후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관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앞마당에 있던 세 사람과 방에서 막 세수를 마친 김준 회장은 식탁 앞으로 모였다. 거실에 있던 야망이와 흑임자도 쪼르르 달려가 자기 밥그릇을 챙겼다.
“너희는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하고 뭐 했어?”
혼자 멀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준 회장이 말했다. 세 사람은 일어나자마자 앞마당으로 나와 앉아만 있던 바람에 세수도 못하고 눈곱만 간신히 뗀 상태였다. 지훈과 찬미는 김준 회장의 눈치를 보며 손으로 대충 머리모양새를 다듬었다.
“휴가에 게으름도 피워보고 그런 거지 뭘 그래.”
여주는 부스스한 머리에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도 당당했다. 여주는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아버지 눈치를 본 적이 없었다. 혼도 내보았지만 떡잎부터 남달랐던 여주는 늘 능글맞게 아버지의 훈계를 피해갔다.
여주는 거지꼴을 하고선 밥을 한 숟갈 듬뿍 퍼 입에 넣었다.
“이 정갈한 한정식을 그렇게 머슴처럼 먹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김준 회장이 경멸에 가까운 표정으로 여주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주는 대꾸도 않고 밥을 푹푹 퍼먹었다. 여주는 평소에도 밥을 빨리 먹는 편이었는데 특히나 아침은 더 그랬다. 원래 성격이 급하기도 했고 평소 아침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식사 시간을 줄인 이유도 있었다. 반면 지훈은 전형적인 재벌가 스타일로 밥을 천천히 조금씩 먹는 편이었는데, 여주가 먼저 밥을 먹고 일어날까 여주에게 속도를 맞춰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박 전무. 여주한테 억지로 맞추지 말고 편하게 먹어요.”
김준 회장이 여주 눈치만 보는 지훈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훈은 당황한 눈빛으로 김준 회장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천천히 밥을 씹었다.
“나 때문에 빨리 먹은 거였어? 안경 안 쓰니까 뵈는 게 없어서 막 먹는 줄 알았네.”
여주는 한 번 피식 웃더니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다른 사람이 밥을 반 공기 정도 먹어갈 때쯤 여주는 이미 밥을 다 먹고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지훈은 여주가 언제 일어날까 한편으론 여주의 눈치를 보고 한편으론 김준 회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보통은 제일 어른의 식사속도에 맞추는 게 예의이지만 여주가 떠난 테이블에서 편안히 밥을 먹긴 힘들 것 같았다. 여주는 자꾸만 자신과 아버지를 흘긋거리는 지훈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안 갈 테니까 편안히 좀 먹어. 휴가 와서 왜 눈칫밥을 먹냐.”
여주가 살짝 웃음을 터뜨리자 지훈은 여주를 보며 바보같이 해맑게 웃어보였다. 김준 회장은 그런 지훈을 보며 ‘여주 짝으로는 딱이다’라고 생각했다. 여주의 괄괄한 성격을 감당할 남자가 어디 흔한가. 지훈이라면 여주와 결혼하더라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살아낼 것 같았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여주와 여주의 아버지에게 점수를 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김준 회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방으로 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정돈했다. 김준 회장은 야망이와 흑임자를 마당에 풀어놓고 그 곁에서 차를 마셨다. 여름이었지만 근방이 다 산이어서 바람이 꽤 시원했다. 새가 지저귀고 햇살이 따듯해 평화로웠다. 30분 후 여주가 테라스로 나와 이 고요함을 깨기 전까지는.
“자전거 탈 사람!!”
얼굴에 선크림을 잔뜩 발라 귀신 몰골을 한 여주가 테라스에 나와 동네 사람 다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핫핑크 컬러의 반팔 반바지 차림은 마치 찜질방 옷 같았다. 차를 마시던 김준 회장은 여주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마시던 차를 푹하고 뿜었다. 방에서 안경알을 닦던 지훈은 허둥지둥 안경을 쓰고 나와 조심스레 손을 위로 들었다. 자기도 같이 자전거를 타겠다는 뜻이었다.
“아빠랑 비서 언니는 왜 답이 없어!!”
“시끄러워! 조용히 타고 오든지!”
김준 회장은 평화로운 티타임이 깨져 역정을 냈다.
“저는 좀 쉴게요. 박 전무님이랑 다녀오세요.”
찬미는 방문을 조용히 열더니 문틈으로 얼굴만 겨우 내민 채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박 전무는 자전거 탈 줄 아나?”
멍청히 손을 들고 있던 지훈에게 여주가 물었다.
“대학 때까지는 탔었어.”
지훈은 그제야 손을 내렸다.
“그럼 내가 뒤에서 잡아줘야 하는 불상사는 없겠네. 선크림 바르고 나와 자전거 준비해둘게.”
**
여주와 지훈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별장 대문을 빠져 나가 바다로 향했다. 여주가 준비한 자전거는 비싼 자전거가 아니라 뒤에 짐받이가 달린 보급형 자전거였다. 오래된 로맨스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뒤에 태우고 동네를 요리조리 누비던 그것. 여주는 영화에서 본 그 자전거에 꽂혀 여러 대를 별장에 비치해놓았었다. 막상 로맨스 영화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자전거는 멋져보였던 것이다.
자전거에 꼭 맞게 여주와 지훈은 편한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 여주는 회사 출근길에도 평범한 정장을 입은 적이 없으니 할 말 다한 것이다. 지훈은 여주의 의상코드에 맞추기 위해 잠옷으로 입으려고 가져온 흰색 반팔과 파란색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반짝이는 수면이 보이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바다를 따라 나 있는 한적한 도로로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여주만의 핫 플레이스였다.
“여기가 자전거 탈 땐 짱이야. 차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내 전용 도로 같은 느낌이거든.”
여주가 기분 좋은 얼굴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지훈에게 말했다.
“진짜 좋다. 이 세상에 우리 둘 뿐인 느낌이네.”
지훈은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 여주를 바라봤다. 지훈은 지금 이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둘만의 시간, 기분 좋은 바다냄새, 눈앞에서 찰랑대며 최면을 거는 듯한 여주의 머릿결. 지훈은 여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듯이 여주의 뒷모습을 쫓았다.
“여기가 사람이 없긴 한데 커브가 많아서 앞에 똑바로 안 보고 자꾸 그렇게 한눈팔면 위험해. 넘어진다.”
여주가 경고를 하기 무섭게 지훈의 자전거가 흔들거렸다. 곧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지훈이 옆으로 넘어졌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지훈의 오른쪽 무릎과 종아리엔 생채기가 났다. 여주는 자전거를 멈추고 지훈에게 다가왔다.
“아야...”
“조심하라고 빨리 말할 걸. 괜찮아?”
“응.”
지훈은 다시 일어나 자전거를 타려 했지만 이번엔 자전거가 문제였다. 살짝 넘어졌을 뿐인데 자전거는 무슨 영문인지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았다.
“영화에 나온 거처럼 생겨서 샀는데 역시나 싸구려는 오래 못 가네.”
그냥 자전거를 끌고 별장까지 걸어가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던 여주는 뜻밖의 아이디어를 냈다.
“어차피 망가진 자전거는 버려야하니까 저기 해수욕장 근처 고물상에 갖다 주고 넌 내 뒤에 타.”
여주가 자기 뒤에 남자를 태운다는 건 꽤 큰 의미가 있었다. 맞선 때는 지훈에게 자기 뒤에 서 있지도 말라고 했던 여주였다. 지훈에게 자기 등 뒤를 맡긴다는 건 마음이 조금 열렸다는 증거였다.
“뒤에 짐칸? 영화에서 보면 보통 여자가 거기 타던데.”
“내 자전거니까 네가 뒤에 타.”
**
고물상에 망가진 자전거를 두고 나온 여주는 자전거에 올라타 짐받이를 탁탁 치며 지훈에게 눈짓을 했다. 지훈은 조금 망설이다 자전거 짐받이에 간신히 올라앉았다. 짐받이는 그렇게 튼튼한 편이 못 됐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것 같았지만 5분 거리인 별장까지는 간신히 버텨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안 잡고 짐받이 위에서 버티긴 힘들 테니까 날 잡게 해줄게. 대신 내 몸에 닿지 않게 옷만 잡아.”
여주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남자를 태우고 가는 게 쉽지 않을 법도 한데 여주는 타고난 다리 근육으로 영차영차 꽤 속도를 냈다. 지훈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여주의 옷을 잡았다. 자전거가 덜컹일 때마다 살짝 살짝 여주의 등에 지훈의 손가락 마디가 닿았고 그때마다 지훈은 여주가 화를 낼까 움찔 거렸으나 여주는 조용히 페달을 밟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