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 들어간 여주는 곧장 음료 코너로 향해 물을 집어 들었고 찬미는 물건을 고를 생각은 하지 않고 여주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뭐 먹는다더니 왜 안 골라?”
“사실 사장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따라왔어요.”
두 사람은 편의점을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스탠드에 나란히 앉았다.
“할 말이 뭔데? 박상훈 부사장 이야기야?”
여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찬미에게 물었다.
“아니요 제 얘기예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주에게 찬미는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번도 더 시뮬레이션 했던 것이었다.
“사장님. 저 사실 지금까지 사장님 속였어요.”
“무슨 말이야?”
“저 다 알고 있었어요. 박상훈 부사장이 동생 혼삿길 막고 사장님이랑 어떻게 해보려고 저한테 접근했다는 거.”
“...그게 무슨 말이야.”
여주의 목소리는 푹 가라앉다 못해 거의 남자목소리에 가까워졌다.
“박상훈 부사장은 저랑 연애를 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항상 저한테 사장님 데이트 정보만 요구했어요. 멍청하게도 그런 남자를 짝사랑하게 된 저는 사장님 데이트 정보를 빌미로 계속 그 남자를 봐 온 거구요. 단지 그 남자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장님을 속였어요.”
여주는 충격에 말을 잃고 잔뜩 인상을 쓴 채 찬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미는 차마 그런 여주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제가 사장님을 이용한 거예요. 그딴 남자 얼굴이나 보자고 항상 절 믿어주신 사장님을 이용했어요. 사장님은 뭐든지 저한테 솔직히 얘기해주셨는데 저는 사장님을 속이고 그 남자랑 문자하면서 그 남자와의 만남을 기다렸어요.”
“왜 날 버리고 그 남자를 선택했는데?”
여주는 찬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었다.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여주는 찬미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주는 찬미를 자신의 둘도 없는 단짝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왜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남자 때문에 10년 넘게 함께 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여주는 화가 치밀었다.
“...모르겠어요. 처음 사장님 선 자리에서 만났을 땐 그냥 잘생긴 남자라고만 생각했어요. 근데 제주도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났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어요. 한라산에서 손을 잡았을 때도 노래방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을 때도 그 남자가 내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냥 떨렸다고? 태어나서 잘생긴 남자를 처음 본 거야? 왜 그 쓰레기 같은 남자한테만 끌린 건데? 쓰레기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
여주는 누군가를 짝사랑해본 경험이 없던 터라 찬미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사랑에 빠지는 건 불가항력인 것을.
“죄송해요 사장님...”
찬미는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서러움을 꾸역꾸역 아래로 밀어냈지만 기어코 눈물은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이, 그 사랑 때문에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 자신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무도 자기를 위로해주지 않는 다는 것이 너무도 서러웠다.
“...이젠 그 남자 안 좋아해?”
여주는 흐느껴 우는 찬미를 더 이상 몰아붙일 수 없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배신감에 화가 나도 찬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찬미가 이제 더 이상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여주는 그런 생각으로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네.”
찬미의 대답은 영 시원치가 못했다. 망설이듯 뱉은 한 마디엔 확신이 없었다.
“나 때문에 억지로 대답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줘. 지금 흔들리고 있잖아.”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면 안 되니까. 근데 다시 그 사람이 생각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가 없어요.”
찬미는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여주도 찬미의 답변이 가장 솔직한 답변이란 것을 알았다. 누구나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은가. 지우려 해도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것.
“그럼 이것만 확실히 해줘. 그 남자 때문에 다시 날 속일수도 있는 거야?”
사실 여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찬미가 누굴 좋아하든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아니요. 이건 정말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절대 다시는 사장님 안 속여요.”
“...그럼 됐어.”
찬미의 분명한 대답을 들었는데도 여주는 어째 마음이 시원치가 못했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걸까. 여주는 조금 슬픈 표정으로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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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색하게 둘만 남겨진 지훈과 김준 회장은 여주와 찬미를 기다리며 모래사장 한복판에 멀뚱히 서 있었다. 어찌나 불편한지 지훈은 침도 겨우겨우 삼켰다.
“자네 우리 여주 진짜 좋아하나?”
파도소리만이 가득 채우던 정적을 깨고 김준 회장이 입을 열었다.
“네?...네! 진짜 좋아합니다!”
지훈이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했다.
“우리 여주 어디가 좋나? 다른 남자들은 다 질색을 하며 도망가던데.”
“어...일단 여주는 키도 크고 예쁘고 힘도 세고 유머감각도 있고 똑똑하고 능력 있고 의외로 다정한 면도 있고 자신감 넘치고 또...”
지훈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막힘없이 여주의 장점을 나열했다. 짝사랑 20년차에게 이 정도 미션쯤이야 껌이었다. 김준 회장은 막힘없이 여주의 장점을 집어내는 지훈을 보며 피식 웃음이 터졌다.
“자네. 여주를 진짜 좋아하는구만. 그 장점들은 나만 알고 있는 건줄 알았는데. 보통은 JUNE그룹 외동딸인 걸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하지.”
“저 진짜 여주 좋아합니다. JUNE그룹 외동딸이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 셋째 딸이어도 좋습니다.”
“보면 알겠어. 식사자리에서 내 눈치보다도 여주 눈치를 더 많이 보는 걸 보면 내 돈에 관심이 있는지 여주한테 관심이 있는지 보이지. 박 전무가 우리 여주 좋아하는 건 잘 알겠는데...여주도 자네를 좋아하나? 지난번에 쓰러졌을 때 챙기는 거 보면 여주도 자네가 맘에 드는 거 같기도 한데...또 어떻게 보면 그냥 친구 같기도 하고.”
“...여주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지훈의 100점짜리 대답에 김준 회장은 씨익 웃으며 지훈을 바라봤다.
“아주 좋은 자세야. 자네라면 여주가 좋아한 두 번째 남자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네.”
“두 번째 남자요? 그럼 여주가 좋아한 첫 번째 남자는 누구...”
“내가 첫 번째지 이 사람아.”
껄껄 웃는 김준 회장 옆에서 지훈은 아하핫 소리를 내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다 좋은데 건강관리는 좀 신경 쓰게. 여주는 체력이 넘치는 아인데 그거 받아주려면 튼튼해야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지훈은 열사병으로 잃었던 점수를 대화 몇 마디로 모두 만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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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둘이 왔어요? 저희 네 명이긴 한데 같이 놀래요?”
별장으로 돌아가던 여주 일행 앞에 한창 작업 중인 남자 넷이 나타났다. 네 남자는 팔짱을 끼고 걷던 두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 지 여주 일행은 그쪽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요 저희 우정여행이라 저희끼리 놀 거예요.”
두 여자는 하루 종일 이런 작업에 시달렸는지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아이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요.”
“왜 이러세요. 같이 안 논다구요.”
“아이 X발 X나 도도하게 구네. 우리가 잡아 먹냐?”
분위기는 급격하게 험악해졌다. 두 여자는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들은 그 둘을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때릴 듯 손을 올렸다.
불안한 눈빛으로 그 장면을 보던 여주는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과거의 악몽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평소 여주 같았다면 당장 뛰어가 남자들에게 쌍욕을 하며 위력을 보였을 텐데. 여주는 귀신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왜 그래 여주야? 저 남자들 때문에 화난 거야?”
지훈이 멈춰 선 여주를 보며 물었다. 지훈에게 여주는 언제나 강한 영웅적 이미지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 강한 사람, 언제나 당당한 사람. 지훈은 여주에 대한 강한 이미지 때문에 여주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젊은이들! 저기 경찰도 있는데 그만하지?”
가만히 서 있는 여주를 대신해 김준 회장이 남자들에게 소리쳤다. 다행히 남자들은 200M 쯤 떨어진 곳에서 단속 중이던 경찰들을 쓰윽 확인하더니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나 별장으로 돌아갈래. 빨리 가자.”
남자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여주는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주는 거의 뛰어가듯 앞으로 걸었고 다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여주의 뒤를 쫓았다.
여주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이 급한 사람 마냥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여주는 곧장 침대 위로 올라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슬금슬금 올라오는 과거의 악몽을 다시 억누르려 노력했다. 찬미를 불러 불안한 마음을 위안 받고 싶었지만 찬미를 울렸던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여주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잠을 자는 일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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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여주는 퀭한 얼굴로 가장 먼저 기상했다. 이제 막 차가운 새벽의 기운이 가신 참이었다. 여주는 겨우겨우 기억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멍하고 불안했다. 또다시 옛 기억이 떠오른다면 한참을 괴로워할 것이 분명했다.
“너 어디 아프냐? 낯빛이 탁하네. 밥은 또 웬일로 천천히 먹어?”
김준 회장이 가장 먼저 여주의 변화를 눈치 채고 물었다.
“나 컨디션이 별로야. 남은 휴가동안 밖에 안 나갈래.”
여주는 자기 앞에 놓인 밥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 아파?”
이번엔 지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신경 쓰지 마. 휴가동안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 정리할 게 있어서.”
여주가 차가운 말투로 대답하자 아무도 더 이상 여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사람 눈을 쳐다보지 않고 대답하는 것만큼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분명한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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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휴가를 애매하게 끝낸 여주가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비서실에서는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휴가 다녀오시는 동안 어떤 여직원 분이 꼭 사장님께 전해 달라고 맡기고 가셨습니다.”
사장실로 들어가 흰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지난 번 영업팀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였던 박 대리의 편지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지난번 성추행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영업 팀의 박 대리입니다.
그때 사장님의 배려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건 이후 예상대로 다른 동료들은 저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한 차장님은 저에게 묘한 눈치를 주셨습니다.
처음엔 사장님의 말씀대로 그런 장면들을 찍고 녹음했지만 끝내 사장님께 가져갈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사장님께 이걸 가져가서 한 차장님과 다른 동료들이 징계를 받는다 해도 제가 그 팀에서 다시 일할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사장님께는 따로 알리는 게 예의 같아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