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마지막 마침표까지 읽고 나자 여주는 현기증이 몰려왔다. 어지러움에 질끈 눈을 감았지만 속에서 무언가 비집고 나오려는 듯 헛구역질이 났다. 여주의 머릿속엔 19년 전 사건이 자꾸만 떠올랐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어느새 사장실로 들어온 찬미가 여주의 옆으로 와 물었다. 여주는 간신히 힘을 쥐어 짜내 입을 열었다.
“박 대리가 그만 둔대.”
여주의 상태를 짐작하기에 충분한 한 마디였다. 여주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는 찬미로서는 박 대리의 사직 소식이 여주에게 어떤 의미인 지 알 수 있었다.
“사장님 조금 쉬었다가 같이 병원에 가요.”
“JUNE 식품 사장이 정신과 들락거린다는 소문 퍼져서 좋을 것 없어.”
여주는 책상을 더듬더듬 짚어 겨우 의자에 앉았다. 얼굴을 감싸 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여주 옆에서 찬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찬미는 조용히 사장실을 나가 아무도 사장실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비서실에 신신당부를 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여주의 현기증은 가라앉았다. 세수라도 하고 정신을 차리려 사장실을 빠져나간 여주는 자신을 만나러 온 김준 회장과 마주쳤다.
“여주야 잠깐 얘기 좀 하자.”
그러나 여주의 눈에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앞에 있는 것은 분명 아버지인데, 여주의 눈에는 악마처럼 웃고 있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좌우로 머리를 흔들고 다시 확인하니 아버지가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끔찍한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여주는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오늘은 얘기를 못 할 것 같아요.”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존댓말까지 하고.”
“그냥 컨디션이 좀...오늘은 일 좀 쉴게요.”
“야 오늘 임원회의 있는 거 잊었어?”
“오늘 하루만 빼주세요. 오늘은 먼저 집에 들어갈게요.”
여주는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아버지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금 상태로는 운전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여주는 택시를 타기로 하고 1층에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직원들은 여느 때처럼 여주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여주의 눈에는 직원들조차 악마처럼 웃는 남자들로 보였다. 이것이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여주는 괴물에 쫓기듯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 택시를 잡았다. 행선지를 물으려 뒤돌아보는 택시 기사의 얼굴마저 악마처럼 보였지만 여주는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애써 참고 집주소를 말했다.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여주는 오만 원 권을 기사에게 쥐어준 뒤 잔돈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집으로 달음박질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모든 자물쇠를 꼼꼼히 채운 여주는 침실로 뛰어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괴로운 생각이 들 때면 항상 그랬듯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주는 알지 못했다. 악몽 속에서는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여주가 그토록 잊고 싶었던 19년 전의 기억은 꿈속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
19년 전 가을, 여주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여주는 학교에 두고 온 숙제 때문에 오후 6시의 텅 빈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책상서랍에서 숙제를 챙겨 반을 나섰을 때, 위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마! 만지지마!”
“가만있어 이년아!”
남녀가 싸우는 소리 같았다. 여주의 귀에 책상이 넘어지는 소리와 남자의 욕설이 들려왔다. 여주는 늘 그랬듯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 망설임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소리의 출처는 미술실이었다.
여주는 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미술실 안쪽을 살폈다. 생각보다 안쪽의 상황은 처참했다. 여학생 한 명이 남학생 다섯에게 둘러싸여 옷이 찢겨지고 주먹질을 당하고 있었다. 여주의 머릿속엔 문득 두려움이 찾아왔다. 자신이 저 여자를 구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원초적인 두려움이었다.
여주의 눈에는 지옥이 보였다. 괴물 다섯 마리가 서로 사냥감을 먼저 먹겠다고 물어뜯는 지옥. 남학생들의 얼굴에선 끔찍하게 미소 짓는 악마가 보였고 여자의 얼굴은 지옥 불에 타고 있는 희생양 같았다. 겁에 질린 여주는 미술실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교무실로 달음박질 쳤다.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교무실에 남아있는 선생님은 없었다. 여주는 다시 정문 옆에 있는 학교 경비실로 달려가 경비아저씨를 미술실로 데려왔다.
이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한 여주의 눈에 펼쳐진 광경은 아까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여학생은 이미 맞을 대로 맞아 멍투성이가 된 채 기절해 있었고 남학생 하나는 그 여학생 위로 올라타 있었으며 나머지 남학생들은 옆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도 그 광경을 보자 차마 바로 문을 열지 못했다. 이내 경비가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자 남학생들은 경비를 밀치고 도망쳐 버렸고 여주는 기절한 여학생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처음에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그때 문을 열었더라면, 내가 소리라도 질렀더라면. 그랬다면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 그 죄책감이 여주의 머릿속에 낙인처럼 찍혔다. 여주는 자신이 나약한 방관자라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져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이후의 상황은 여주를 더더욱 몰아붙였다. 목격자였던 경비는 경찰이 아니라 교장에게 사건을 알렸고 학교는 경찰에 연락 하지 않았다. 가해자 중 한명은 여주만큼 유명한 부잣집 아들이었다. 학교에서 어떻게 처리할 지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피해 학생은 심각한 폭행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학교에 나오지도 못했지만 가해학생들은 뻔뻔한 얼굴로 학교에 나왔다. 교장은 피해자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피해 학생의 학부모를 설득했다. 일을 크게 만들어 좋을 것은 없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니 서로에게 가장 좋은 방법으로 끝내자고. 슬프게도, 교장의 더러운 말에 설득당할 만큼 피해 학생은 가난했다. 피해 학생은 병원 입원실에서 3000만원에 합의를 했고 가해 학생들은 ‘폭행’을 이유로 교내 봉사 일주일의 처분을 받았다.
더욱 최악인 것은 학생들과 교사들의 반응이었다. 가해자들은 그 사건을 계기로 영웅처럼 취급됐다. 혈기왕성한 남학생들 앞에서 그들은 대단한 업적을 말하듯 그날 일을 떠들어댔고, 한 달 넘게 입원했다가 돌아온 피해자는 야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조롱을 당한 것은 가해자 쪽이 아니라 피해자 쪽이었다. 놀랍게도 교사들 또한 이런 수군거림에 동참했다. 다만 교사들은 그것을 야설이 아닌 스릴러로서 즐겼다. 피해 여학생의 고통은 끝날 기미가 없었고 그럴수록 여주는 더욱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직 순진하고 정의로웠던 여주는 자신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이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자기가 총대를 메면 그들이 결집할 거라 믿었다. 여주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익명의 탄원서를 써 아침 일찍 학교 곳곳에 뿌려두었다.
「
<탄원서>
성범죄에 합의를 종용하는 것, 벌금형을 내리는 것 모두 여자를 매춘부로 만든다. 그런 관행이 고착될수록 모든 여성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해진다. 가해자들은 벌금과 합의금을 낼 돈만 있다면 누구든 골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합의를 거절하는 여성은 꽃뱀이 된다. 관행적으로 받는 합의금에 합의가 되지 않으면 가해자는 적반하장으로 화를 낼 것이다. 마치 매춘부가 가격을 높여 불렀다는 듯이 피해자를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이고 이 시대의 상식인가? 그래서 오랜 스승이 나서 제자를 매춘부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가?
오직 가해자들만이 피해자의 상처를 순결의 상실정도로 매도한다. 피해자는 한 달 넘게 입원할 만큼 폭행당했고 평생 안고 갈 정신적 피해가 생겼으며 스승과 친구들을 잃었다. 그럼에도 학교는 철저히 가해자들의 편에 서서 가해 학생들에게 교내봉사 1주일의 처분만을 내렸다. 이는 교내 절도 사건의 징계보다도 약하다. 이에 나는 이번 사건에 대한 학교의 징계를 받아들일 수 없어 탄원한다. 」
안타깝게도, 전교에 뿌려진 이 탄원서는 몇몇 학생들의 비웃음이 담긴 종이비행기로 전락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누가 탄원서를 썼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 교장은 크게 화를 내며 탄원서의 범인을 색출하라고 교사들을 쪼아댔지만 여주임이 발각되지는 않았다.
한 학기를 채 버티지 못하고 피해자는 전학을 갔다. 피해자가 사라지자 그 일은 흥미로운 에피소드쯤으로 여겨졌다. 어째서 악행이 더 떳떳하게 받아들여지는가. 여주는 더 이상 분노와 회의감을 혼자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시 짓기 연습을 하던 국어시간에 여주는 결국 사고를 쳤다.
「누가 토끼를 죽였나?
심심했던 소년이 던진 돌에
집으로 돌아가던 하얀 토끼는 맞아 죽었다
마을 촌장이 물었다
누가 이 아름다운 토끼를 죽였나?
내가 그랬어요!
소년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토끼에게 멋진 무덤을 지어주거라
촌장이 내린 벌의 전부였다
토끼야 미안해
소년은 웃으며 죽은 토끼의 등을 쓰다듬었고
하얀 토끼는 그 손길을 거부할 수도 없이
원치 않는 사과를 받아야 했다
소년에겐 장난꾸러기라는 별명이 생겼고
사람들은 그것을 훈장처럼 불렀다
이미 죽고 없는 그때의 토끼가
사람들의 입에서 죽고 죽고 또 죽는 동안
또 다른 하얀 토끼들은
또 다른 장난꾸러기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누가 토끼를 죽였는가
누가 토끼를 죽이는가」
국어 교사는 수업이 끝난 후 여주의 시를 교장실로 가져갔고 교장은 여주를 불러들였다.
“김여주 학생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교장이 여주 앞에 시를 던지며 물었다.
“그냥 토끼가 죽은 이야기인데요. 문제 있나요?”
“전에 탄원서 쓴 거 김여주 학생 짓이죠?”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말로는 부정하면서도 여주는 교장을 경멸하듯 보고 있었다.
“김여주 학생은 그 사건 목격자였고 이 시는 누가 봐도 그 사건 얘기잖아요. JUNE그룹 딸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행동은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어요.”
“왜 이 시가 그 사건과 관련됐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사건 피해자는 사람이고 이 시에서 죽은 건 토끼인데요. 아, 피해자를 가해자와 동등한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신가요? 아니면 하얀색이 순결을 상징해서인가요? 더 이상 하얀 토끼가 아니라 죽은 토끼니까 순결을 잃은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선생님들이 사건을 쉬쉬하면서도 뒤에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계속 하던 게 비슷하던가요? 도대체 왜 이 시에 나오는 하얀색 짐승이 피해 학생이라고 생각하신 거죠?”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격앙된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네. 김여주 학생 아버지한테 연락 갈 겁니다. 아버지랑 얘기하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제게 잘못이 있어서 징계를 받는다면 1시간 정도겠네요. 강간범들이 1주일이었으니까.”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은 삽시간에 학생들의 입에 올랐다. 탄원서를 쓴 게 목격자였던 김여주였으며 이상한 시를 써서 교장실에 불려갔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김준 회장은 여주의 일로 교장에게 사과를 해야 했고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교장에게 금품을 쥐어줬다. 여주가 학교생활에 불편을 겪지 않도록 신경써달라는 의미였다. 여주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어른들의 세계였다.
목격자의 고통은 이해받기도 힘든 것이었다. 사실 그날의 끔찍한 일은 여주에게도 큰 후유증을 남겼는데도 말이다. 그날 이후 여주는 남자와의 스킨십이 힘들어졌다. 남자의 손이 자기 몸에 닿으면 끔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그 날의 피해자가 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여주는 아버지에겐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건을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괴로워 할 게 뭐 있냐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주가 점점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가 되어가자 김준 회장은 어느 조용한 일요일 아침 여주를 거실에 앉히고 여주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네 엄마랑 정말 닮았어. 네 엄마도 그런 적이 있었지. 성폭행 사건을 하나 맡았는데 네 엄마가 범인한테 엄청 높게 구형을 했어. 피해자들이 엄청 심하게 맞아서 갈비뼈가 다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될 정도였거든. 네 엄마는 피해자가 뺏긴 건 빌어먹을 순결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자유라고 소리를 쳤지. 신성한 법정에서 ‘빌어먹을’이란 단어를 쓴 게 맘에 안 들었던 판사는 결국 징역 2년만 내렸지만 말이야. 난 네 엄마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 사실 난 네 엄마가 틀린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래서 결혼했지. 근데 말이야...꼭 옳은 말을 하는 쪽이 이기는 건 아니란다. 이 세상이 그래.”
김준 회장은 마른 손을 비비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빠도 엄마가 맞다고 생각한다면서 왜 저에겐 그만 하라고 하세요?”
여주는 반항어린 말투로 물었다.
“네 엄마를 죽인 전과자...바로 그 강간범이었다. 출소하자마자 네 엄마를 찾아왔지. 네 엄마가 죽고 나서야 그 놈은 무기징역을 받게 됐어. 그 놈이 평생 교도소에서 썩을 걸 안다고 나한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난 그냥 네 엄마가 돌아오길 바랐지. 나는 너도 그렇게 잃을까봐 겁이 나. 그래서...그래서 널 말리는 거야. 네가 더 이상 이런 일들에 얽히는 걸 원하지 않아. 아빠를 위해서라도 모른 척 하면 안 되겠니?”
회장의 물음에 여주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어느새 여주의 눈엔 반항기가 사라졌고 초점은 텅 비어있었다. 여주는 무언가 가슴속에서 울컥 차오르는 느낌에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조용히 손을 비비적거리던 여주는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알았어요 아버지. 대신 여중으로 전학시켜주세요.”
여주는 아버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여주는 침대 위에 풀썩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집엔 적막이 흘렀고 베개는 점점 젖어들었다. 여주는 베개를 다 적시도록 울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이후 여주는 더 이상 그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영원히 기억 속에 묻기로 했다. 그리고 괴로운 생각이 들 때면 이때처럼 잠을 청하는 버릇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