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19년 전의 악몽을 꾸고 발작하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은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숨을 몰아쉬는 여주의 입가로 햇살이 내리쬈다. 여주가 식은땀에 젖어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를 정리하던 그때, 의자 위에 대충 걸쳐 둔 자켓 속에서 핸드폰이 지잉 지잉 하고 울렸다.
지훈-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지훈의 문자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해맑았다. 여주는 그냥 그대로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자고 일어난 뒤 기분은 아까보다도 더 최악이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사장실에 여주가 없는 걸 확인하고 달려온 찬미가 문을 두드렸다. 여주는 초췌한 모습으로 찬미를 집안에 들였다.
“안 괜찮아.”
여주는 거실 소파에 풀썩 앉으며 대답했다. 찬미는 조심스럽게 여주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여주의 손을 잡았다. 여주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힘없이 입을 열었다.
“비서 언니 나 한 달만 쉴게. 내가 하던 일은 부사장님한테 인수인계 좀 해줘. 비서언니는 당분간 부사장님 밑에서 일 도와드리고. 아빠한테는 내 변덕이라고 해. 국토대장정을 한다고 하든지 어떻게든 변명 좀 해줘.”
“한 달 동안은 뭘 하시려고...”
“이 집에서 안 나갈 거야. 사람 없는 것처럼 조용히 살아야지. 한 달이면 회복될 거야. 회복 안 돼도 한 달 뒤엔 나갈게. 아버지한테는 나 집에 있다고 하지 마. 걱정하실 거야. 도우미 아주머니도 한 달 동안 오지 말라고 하고.”
“박 전무님한테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알겠습니다.”
**
여주가 집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 째. 찬미 덕분에 공식적으로 여주는 국토대장정을 떠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주의 특이한 성격이 이럴 때는 참 다행이었다. 사장이 갑자기 훌쩍 국토대장정을 떠났다고 해도 직원들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지훈은 여주의 잠수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켜진 여주의 핸드폰엔 지훈으로부터 온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수백 통 쌓여있었다. 여주는 문자들을 하나씩 천천히 읽었다.
어디야? 갑자기 국토대장정은 왜? 내가 만나러 갈게 어디쯤이야? 왜 연락이 안 돼. 밥은 먹었어? 몸은 괜찮아? 연락 좀 줘.
문자를 눈으로 읽을 뿐인데 여주의 귀엔 지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 시간 간격으로 쌓인 부재중 전화 목록에서도 지훈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런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 두고 계속 도망치는 건 나쁜 짓이겠지.’
여주는 지훈에게 보낼 답장을 천천히 타이핑했다.
여주-넌 내가 왜 좋아? 단지 초등학교 때의 기억 때문이야?
여주가 문자를 전송하자마자 지훈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여주는 통화를 거절했다. 지훈은 통화가 곤란한 상황이겠거니 생각하고 문자를 보냈다.
지훈-멋져서 좋아. 천하무적으로 강하고 당당하고 착하고 솔직하고. 근데 너 지금 어디야?
지훈의 답장을 읽은 여주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지훈이 말하고 있는 여주는 지금의 여주가 아니었다. 지금의 여주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겁에 질려 무기력하게 집에 갇혀있는 신세였고 다른 사람들에겐 국토대장정을 갔다는 거짓말을 둘러댄 사람이었다. 여주는 ‘결국 지훈이 사랑한 것은 이미 예전에 없어진 나의 잔상이 아닌가’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여주-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지훈-아니야 넌 그런 사람이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여주-넌 초등학교 때 나랑 한 번 마주친 것뿐이잖아.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지훈-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여주는 지훈에게 보내는 마지막 답장으로 장문의 글을 적었다.
여주-넌 날 볼 때 33살의 김여주를 보는 거야 아니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네 첫사랑을 보는 거야? 네 기억 속의 나는 너보다 크고 강하고 멋지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해. 너는 계속 20년 전 초등학생인데 나는 과거 따위 잊어버리고 싶은 33살이야. 너도 나도 아직은 사랑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애초에 그딴 고리짝 첫사랑 스토리로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만 하자.
여주는 지훈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고 가슴 아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더 이상 지훈이 좋아하던 그때의 명랑한 아이가 아니었다. 무기력하고 두려웠다. 지금부터의 자신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트라우마를 무의식 저편으로 보낸다 해도 누군가와 연애를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언제 다시 트라우마가 깨어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훈은 여주의 답장을 읽자마자 계속 통화를 시도 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응답만이 돌아왔다.
**
여주의 한 달은 악몽과 불면증의 나날들이었다. 여주는 오롯이 혼자 그것들을 이겨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할 일이 필요했고, 여주는 처음 회사 일을 시작했을 때로 돌아가 신제품을 기획했다. 사람보다는 수치와 씨름하는 게 훨씬 나았다. 한 달을 그렇게 혼자 있으니 증상은 꽤 완화된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악몽은 꾸지 않았다.
여주는 칩거 한 달째 되는 날 드디어 출근 준비를 했다. 여주는 신제품 기획안을 가방에 넣고 직접 차를 운전해 회사로 향했다. 혼자인 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찬미에게도 일언반구가 없었다. 여주는 여느 때와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그것은 여주의 우울한 상태를 보여주는 차림이었으나 미관상으로는 훨씬 좋아보였다.
예고도 없는 여주의 출근에 직원들은 귀신을 보듯 여주를 쳐다봤다. 홀연히 국토대장정을 떠났던 사장이 갑자기 돌아온 것도 놀랄 일인데, 멀쩡한 옷차림에 진지한 태도라니.
“미리 연락 안 하고 출근해서 미안해요. 핸드폰 켜기가 싫어서. 조금 있으면 백 비서 올 텐데 오면 이거 좀 전해줘요. 신제품 기획안이니까 준비해달라고.”
여주는 비서실에 신제품 기획안을 맡기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도착한 찬미는 비서실에서 기획안을 전달받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사장님! 출근하실 거면 미리 말씀을 하시지. 아침에 차가 없어서 놀랐어요.”
“미안해. 이제 매일 출근할 거니까 걱정 마. 신제품 기획안은 전달 받았지? 그거 부서에 전달 좀 해줘.”
“이제 괜찮으세요?”
“어 이제 출근할 수 있어.”
찬미는 여주가 아직 괜찮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여주가 평범한 옷을 입는다는 건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찬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사장실을 나갔다. 힘들게 견디고 있는 사람에게 굳이 괜찮지 않은 상태라는 걸 각인시켜 좋을 것은 없었다.
여주가 출근한 지 30분 쯤 지나자 김준 회장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다른 직원들로부터 여주가 출근했다는 소리를 듣고 온 것이다.
“야 김여주. 갑자기 국토대장정 간다고 결근하고 이제야 돌아와? 사장도 잘릴 수 있다는 거 몰라? 내가 네 뒷감당하느라 어휴...”
“죄송해요 아버지.”
여주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자 김준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 무슨 일 있냐?”
“아뇨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할게요. 죄송해요.”
여주는 평소와 다르게 어른스럽고 차분하게 말했다. 김준 회장은 그런 여주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 굳은 얼굴로 회장실로 돌아갔다.
회장실로 돌아간 김준 회장은 한참을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다 옆에 서있던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김 비서...큰일이야.”
“왜 그러세요 회장님?”
“여주가 나한테 존댓말을 하면서 아버지라고 불렀어.”
“잘 됐네요 회장님.”
“잘 된 게 아니야. 여주는 정말 슬플 때만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 내가 왜 평생 재혼 안 하고 혼자 살았는지 아나?”
“저는 잘...”
“여주가 나한테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를까봐. 나한테 더 이상 편하게 장난치지 않을까봐. 여주가 나한테 처음 아버지라고 부른 게 지 엄마 죽었을 때였어. 그 어린 게 나한테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는지...여주는 힘들어지면 모두를 멀리해. 가족인 나조차도...”
김준 회장은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
한편 난데없이 사장의 기획안을 전달받은 직원들은 갑자기 비상이 떨어졌다. 사장이 직접 기획했으니 최대한 빨리 검토하고 개발 준비를 해야 했다. 긴급회의가 소집됐고 여주가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여주가 기획한 것은 성인전용 와인 아이스크림이었다. 개발 부서는 난색을 표했지만 여주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이스크림을 어린이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이에요. 이젠 아이스크림도 19금이 나올 때가 됐어요. 게다가 와인은 상류층만의 풍류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여러 와인을 맛볼 수 있게 한다면 서민들의 작은 사치로 각광받을 거예요. 소매가 기준 2000원에서 3000원 사이로, 와인 포도 품종별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게 내 목표예요.”
여주의 프레젠테이션에 직원들은 토를 달아도 될지 말지 서로 눈치를 봤다.
“로마네 콩티 아이스크림 이런 거 말씀이신가요? 와인은 명칭 규제가 강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텐데요. 게다가 와인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 이상 원재료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구요.”
일처리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걸로 유명한 신제품 개발 담당자가 용감하게 끼어들었다.
“아뇨 와인 브랜드나 지명은 이름에 들어가지 않아요. 오직 포도 품종만 이름으로 들어갈 거예요. 와인 원산지도 프랑스일 필요 없어요. 가격대비 퀄리티가 좋은 칠레 와인을 생각중이에요.”
여주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재벌들의 교양으로 와인을 배운 탓에 와인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다. 칠레산 와인을 이용한 가공 식품은 대학시절부터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와인에 그리 친숙하지 못하잖아요. 특히나 그런 저가 아이스크림은 일반 서민이 타겟인데...와인 브랜드명이나 프랑스 지명이 아닌 포도품종은 더더욱 낯설 텐데 괜찮을까요?”
두 사람의 대담은 그렇게 한참이나 계속되다가 겨우 합의점을 찾았다.
“그럼 일단 시장반응을 보게 레드와인 1종 화이트와인 1종만 내보죠. 제일 대표적인 포도 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이랑 샤르도네로. 생산량도 한정하고.”
“좋습니다.”
긴급회의가 마무리 되고 각 부서는 신제품 개발로 풀가동 됐다. 모든 부서는 기존에 하던 일을 대강 정리하고 사장이 새로 지시한 일을 하느라 바빴다. 회장이나 사장이 뭐 하나 아이디어를 내면 항상 이랬다. 빨리 결과물을 내서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모두가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주는 사장실로 돌아와 밀린 업무들을 확인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자리를 비운 동안 바뀐 것은 없는지 구석구석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다 책상 서랍 안에 곱게 접혀 있는 박 대리의 편지를 발견했다. 찬미가 챙겨둔 것이 분명했다. 여주는 편지를 버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편지를 한 번 더 접어 안쪽 구석으로 밀어 넣고 그대로 서랍을 닫았다. 여주가 트라우마를 대하는 방식이 이것이었다. 완전히 버리지도 못하고 그나마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쑤셔 넣어 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