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자리는 스탠바이였던 재민이 대신했다.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기억할 것이다. 공연을 앞둔 그는 프로의식 없는 어설픈 패배자에 불과할 것이다.
한참을 어두운 방송실 안에서 웅크린 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 시간이 마치 몇 년의 세월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절망에 빠진 그를 발견한 건 경비아저씨였다.
‘어? 학생? 여기서 뭐하고 있던 거야?’
자신에게 묻는 그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했다. 그는 헐레벌떡 열린 문을 지나쳐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공연은 이미 끝나버린 뒤였다.
거대한 공연장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그는 모습을 드러냈다. 텅 비어버린 관객석을 앞에 두고서야, 그는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협박이었을까, 조언이었던 걸까. 현재는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그가 마주할 세상이 두려웠다. 시후의 옆에서 지켜봐 온 어른들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하며 비굴했다.
이제 몇 달 후면 현재도 어엿한 성인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나도 이제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하고 비굴해지는 걸까. 그는 텅 빈 무대 위에 서있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자랄 수 없는 아이가,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는걸.”
내뱉은 자신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나는 그림자가 아니야.
나도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나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그토록 미워했던 최시후가 아니던가. 그토록 차갑게 자신을 대하던 그에게 아빠라 부르기를 거부했던 자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별처럼.
병신 같아. 현재는 쓴 웃음을 삼켰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평생 숨어살아야 할 지도 모르는데. 내 주제에 연기자라도 하겠다는 거야?
땀으로 다 지워져 버린 분장과 부서져버린 마음을 움켜쥐었다. 비참한 상황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좋아. 좋았다.
관객은 없지만 온전히 자신의 두발로 서있는 무대가, 살갗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공기가.
그 동안 수백 번도 넘게 리허설을 통해 이 무대에 올라왔었다. 공연이 끝난 무대에 서고 보니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내 삶에 무대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관객들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그들의 목소리마저 들려오는 듯 했다.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이미 몸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을 두텁게 가로막는 안경을 벗어 던졌다. 계단 옆에 누군가 올려둔 물병을 열어 손바닥위로 물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끈적이는 폐부의 깊은 곳에서 뜨거운 한숨이 몰려와 내쉬었다.
그의 손이 무대 중앙, 처량하게 놓여있던 침대를 쓸었다. 깊은 잠에서 바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허공을 휘어잡고 자신의 두 팔을 껴안았다. 그대로 앞을 향해 걷던 현재는 소품인 낡은 거울 앞에 섰다.
불보다 더 뜨거운 눈동자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상 속의 괴물보다 더 일그러진 모습의 자신을 응시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심장을 쥐고 흔드는 뭉클한 감정이 몰려왔다.
그는 더 이상 최현재가 아니었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대사들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마치 몸에 새겨진 것처럼, 가슴에 박혔던 것처럼,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창조주……”
모두가 떠나간 그 자리에, 그의 무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죄를 짊어지는 듯 했다. 그 무거움에 선영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아니, 어른인 듯 어른이 아닌 남자 같았다. 갑자기 무대 위에 나타난 그는 안경을 집어 던진 뒤, 물에 젖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윽고 그는 무대 위의 소품인 거울 앞에 섰다.
“나의 아버지…... 나의 창조주……”
맑고 청량하며 괴로운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마이크도 없이 거대한 공연장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 그것이 그녀의 온 정신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곧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을 잊었다. 넋을 놓고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그녀의 눈동자만이 그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독백을 한다. 인간의 오만과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괴물이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저주한다. 원망하고 증오한다.
그와 그녀를 제외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연이었다.
“저주받을 나의 창조자여! 당신조차 외면해버린, 소름 끼치는 괴물을 왜 만들어낸 것인가! 사랑 받을 수도, 사랑할 수조차 없는 존재를 왜 만들어낸 것인가!”
깨진 거울에 비쳐진 그의 얼굴처럼 산산조각 나버린 괴물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녀는 자신의 몸이 깊숙한 늪에 빠져 가라앉고 있는 상상을 떠올렸다. 그의 몸짓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에 무거운 추를 달았다. 끝도 모를 깊은 슬픔과 우울의 바다로 잡아당겼다.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였어. 처음으로 숨을 내쉬고,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했을 때였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보고 웃어주기만을 바랐어. 당신이, 나의 아버지인 당신이 나를 안아주기만을 바랐지.”
비참한 괴물은 자신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 안았다.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고 눈가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당신은 도망쳐버렸어. 이렇게 외로운 나를 만들고 외면해버렸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세상사람들에게 괴물이 되어버렸고, 도망치고 숨는 신세가 되어버렸어!”
전신을 휘감는 괴물의 고통을 선영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소름 끼치는 괴물이 그녀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부서진 나무 벽 틈으로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와는 너무 달랐어. 그들은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지. 그들은 아름답고 고귀했어. 이렇게 흉측한 괴물인 나와는 달리 말이야. 내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한 인간은 나에게 <숲 속의 아름다운 요정>이라고 했지. 하지만 나를 마주하자마자 비명을 지르고 매질을 하기 시작했어. 그들은 나를 자신들의 집에서 내쫓았지. 나는 이제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존재야. 그 어디로도 갈 곳 없는 존재야. 신에게도, 당신에게도 버려진 존재야.”
괴물은 인간처럼 살고 싶었다. 인간과 가까워지고,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괴물의 열렬한 구애와 노력에도 돌아온 것은 서늘한 배척뿐이었다. 괴물의 차가운 표정위로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따라 그녀의 감정도 움직였다.
“나의 아버지.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어.”
소리 없이 내쉬던 선영의 숨이 턱하고 막혔다.
더할 나위 없이 불안하고 철없던 20살. 그 시절, 그녀의 인생과 머릿속을 집어삼켰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았다.
외롭고 힘겹던 미국생활에서 그녀의 혼을 쏙 빼갔었던 공연.
몇 날을 밤잠을 설치고 뒤흔들어놨던 그 연기자.
지금 무대 위에 있는 남자가 그녀를 그곳으로, 그때로 데려갔다.
그의 연기는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놓을 만큼 불어오는 폭풍과도 같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과 감동은 그 시절과 다를 바 없었다.
관객 없는 무대에서 홀로 공연하는 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몰래 지켜보는 한 여자.
씹지 못한 무언가를 삼킨 듯 목부터 가슴까지 꽉 막혀버렸다. 손이 데일 만큼 뜨겁기도, 얼얼함이 느껴질 만큼 차갑기도 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선영이 떠올린 사실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최현재. 그 녀석, 물건이야.’
너였구나.
그제서야 상철 선배가 짓던, 세상 다 잃은 표정이 이해가 됐다.
이런 소름 끼치는 경험.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뺨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에 손을 올렸다. 그의 감정이 전이되어 흘렀던 눈물. 낯설게 찾아온 익숙한 감촉에 놀라고 말았다.
그가 연기한 괴물. 잠시였지만 그가 서있는 무대,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이 한겨울처럼 차디차게 느껴졌다. 연기하는 그를 보는 동안 그녀는 마치 자신이 괴물이 된 양, 그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이 되어버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그래서 괴물의 서글픈 감정에 몰입해버렸다.
찾았다.
그 동안 선영은 실체 없는 허상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맨 사람을 만난 것처럼 묘한 성취감이 몰려왔다.
더 보고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가 알고 싶어. 그의 연기와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바로 그녀의 우주에 별이 나타났다.
“쿵.”
적막을 깬 소음이 그들의 우주를 뒤흔들었다.
몸을 일으키던 선영의 구두가 문제였다. 중심을 잡지 못한 그녀는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한낱 구두가 중요한 순간을 망쳐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는 괴물의 마지막 대사를 듣지 못했다. 투명한 얼음 같던 고요함이 깨져버렸다.
넘어진 채로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올린 선영은 자신보다 더 놀란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붉게 물든 괴물의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멀 지경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심장소리였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조각난 거울을 보던 그의 얼굴보다 직접 마주한 그의 얼굴은 훨씬 아름다웠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얼굴, 날렵하지만 선하게 뻗은 눈매, 사과를 베어 문 듯한 선홍 빛 입술.
눈물에 젖은 남자의 얼굴에 이렇게 흔들릴 수 있다니.
선영은 어디서 본 듯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랐다. 하지만 눈 앞의 그는 떠올린 얼굴과 닮으면서도 달랐다. 그보다 더 선하고 선명했다. 맑고 청초하면서 우수에 젖은 슬픔을 간직한 이미지.
소년답지 않은 큰 골격의 남자는 큰 비밀이라도 들킨 양 미세하게 어깨를 떨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피어 올랐다. 지금 자신의 표정도 그럴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하얀 눈사람처럼 가만히 두면 그대로 녹아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녹아서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놓칠 수 없었다.
“아, 저, 저는……”
선영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훔쳐보려고 한 게 아니라, 원래는 제가 먼저 왔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제, 제 폰이 여기에……”
미동도 없는 남자의 모습에 그녀의 말은 앞뒤 없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지도 못했다.
“저, 저기, 혹시 그 쪽은……”
그 순간, 그가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바람에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허둥대는 그의 발치에 소품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도망치지마. 그렇게 사라지지 마.
그녀의 애절한 외침을 듣지 못한 그는 서둘러 무대를 뛰쳐나갔다.
그는 도망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