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아세요?”
자신을 바라보는 선명하고 맑은 그녀의 눈동자.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환희에 젖어있었다. 마치 자신을 만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빛에 현재는 놀라움보다 불안함이 자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가늘게 어깨를 떨던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경. 안경을 찾아야 해.
그의 시선이 침대 옆 탁상위로 향했다. 재민에게 맞을 때 떨어져 깨지긴 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런 생각에 그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픈 몸을 움직이는 그보다 그녀의 눈치가 더 빨랐다. 저도 모르게 그의 떨리는 손을 붙잡고 말았다.
웃지도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어? 내가 왜 잡았지? 그녀의 작은 손에 붙잡힌 그보다 선영이 더 당황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의 공기마저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어, 어? 아!”
화들짝 놀란 그녀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붙잡았던 그의 손을 놓았다.
놀라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난데. 엉뚱한 그녀의 행동에 그는 상처로 얼룩진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손등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나쁜 시력 탓에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도, 그녀의 붉어진 두 볼은 선명하게 보였다.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현재는 불편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자, 잠깐만!”
얼마나 급한지, 말까지 더듬었다. 곧바로 그녀의 손이 의자 옆에 치워뒀던 가방을 소란스럽게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디다 뒀더라, 잠시만.”
이윽고 그녀는 가방에서 그에게 익숙한 물건을 꺼냈다. 검은 뿔테안경. 그가 어젯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무대에 둔 채 도망쳐버렸던, 자신의 안경이었다.
“이걸…… 어떻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번개처럼 떠오르는 기억에 머릿속이 하얗게 굳어버렸다. 이제서야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지도.
선영은 어젯밤 무대 위의 그를 지켜본 여자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재빠르게 안경을 낚아챘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버린 그의 낯빛을 마주했다. 마치 보석을 훔치다 경찰에게 걸린 것처럼. 엄청난 비밀을 그녀에게 들켜버린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현재에 관한 모든 것들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래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호기심을 더욱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던 아이일까? 어젯밤- 아니, 여태까지 이 아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어제처럼 그가 도망갈까 두려운 마음이 제일먼저 앞섰다. 이번엔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 도망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사탕을 뺏긴 아이를 달래는 것마냥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 훔쳐볼 의도는 없었어. 핸드폰을 공연장에 두고 와서 찾으러 갔던 것뿐이었거든. 놀라게 했다면 사과할게. 그래도…… 그렇게 도망갈 필요는 없었잖아.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쓴 그는 아까보다 조금은 진정된 모습이었다. 빨갛게 상기됐던 그의 낯빛이 많이 가라앉았다. 적어도 지금은 도망가지 않겠구나. 하긴, 이 상황에는 도망갈 곳이 없는 건가.
그러다 그녀의 직업병이 스멀스멀 도지기 시작했다. 현재가 집어 쓴 저 뺑뺑이 안경. 하…… 정말 답도 없다. 그의 잘생긴 얼굴을 엉망으로 망쳐버릴 정도였으니까. 날렵한 눈매의 쌍꺼풀이 없는 큰 눈이 한 순간에 단추 구멍으로 돌변했다. 게다가 어제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길게 내려온 앞머리가 수려한 콧대까지 다 가리고 있었다.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았다면 같은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헐. 내가 미쳤나 보다. 아픈 환자를 앞에 두고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무대 위에 네가 그대로 도망쳐버려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꼭 다시 한번 널 만나고 싶었어. 최현재…… 널.”
낯선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하루하루가 산송장 같았던 그를 이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처럼 불러준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전율에 그의 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그의 삶은 그림자였다. 존재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녀가 그런 그를 현실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보고 있었다. 여태껏 그에게 그것보다 강렬한 충격은 없었다.
“네가 왜 공연에 올라오지 못했는지 묻지 않을게. 그리고 네 말대로 황재민이 널 이렇게 만든 것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게.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현재는 그녀가 어디까지 보았고 알고 있는지 모를 터였다. 하지만 그와 재민이 나눴던 대화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버렸다. 황재민.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소름 돋게 나쁜 녀석이었다. 주연자리를 빼앗기 위해 상식을 벗어난 짓을 하질 않나, 게다가 저 말끔한 현재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눈앞의 그에게는 티 하나 내지 말아야 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본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명한 판단이었다. 작은 일에도 소스라치게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처럼 그는 경계심이 많았다.
가까이, 더 친해지려면.
“앞으로 날보고 도망치지 말아줘.”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숨소리를 내며 웃었다. 선영 본인이 생각해도, 예상치 못한 의외의 부탁이었을 것이다.
“난 너에게 할말이 있고, 네가 끝까지 들어주기를 바라니까. 그러니까, 약속해줘.”
창피했는지 수줍게 웃음을 거두던 그는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지? 소리 없이도 전달되는 그녀의 눈빛에 안심이 떠올랐다.
그리고 현재의 차례였다. 한층 진정된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들을 물어야 할 순서였다.
“우리 학교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에요?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리고, 저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뭐예요?”
숨도 안 쉬고 묻는다. 그의 불안하고 다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번 열리자마자 튀어나오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하하하…… 천천히, 하나씩 천천히.”
그녀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나 미국에서 유학했을 때 친했던 선배가 너희 학교 선생님이거든. 너도 알 거야. 박상철 선생님. 내가 많이 따랐던, 존경하는 선배지.”
손에 바리바리 비타민음료를 들고 그를 힘겹게 찾아가던 이유, 그게 바로 너야.
“너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찾아가던 중이었어. 길을 헤매던 중이었는데, 그런 곳에서 널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너 덕분에 엄청 놀라고, 앞으로 조심해야 할 사람도 알게 됐어, 뭐.”
앞으로 그녀가 속해있는 <먼데이 엔터테인먼트>와 재민이 일할 기회는 단 한번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최현재,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왜인지 모르겠는데,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사랑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마른 침을 삼키는 자신이 우스웠다. 초반부터 경계심을 잔뜩 보였던 현재 때문인지, 망설임이 앞선 탓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그를 찾아온 목적, 그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됐다.
“……혹시 연기하고 싶은 생각 없니?”
어느새 그녀의 작은 손엔 명함이 들려있었다.
<먼데이 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장 강선영>
하얀 바탕에 금테를 두른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대 위, 혼자만의 연기를 들켰던 그때보다 그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기획사에서 나온 사람일 거란 사실을 예상조차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 연기를 보고 난 후, 어젯밤 한숨도 잠을 못 잤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머릿속이 맑은 느낌이야.”
밤새 뒤척이며, 오로지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찾던 별. 그게 바로 너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녀의 삶에서 이토록 감동을 준 배우는 지금까지 만나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뱅뱅 돌려 말하는 재주 따위는 없었다.
“너에겐 정말 배가 아플 정도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네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순간을 함께 할 기회를 나에게 줘. 널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 줄게. 최고의 연기자가 될 수 있도록 옆에서 내가 최선을 다할게.”
그 어떤 배우지망생이라도 단번에 홀릴 수 밖에 없는 황홀하게 달콤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 유명한 <먼데이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렇다고 선영은 현재의 앞에서 잘난 척이나 과시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점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충분히 겸손하고 훌륭한 사람처럼 보였다. 기껏해야 이십 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임에도 팀장이라니. 분명 능력도 좋을 테지.
뜨겁게 그녀의 명함을 응시하던 현재의 입술이 움직였다.
“안경 찾아주신 것, 그리고 오늘 도와주신 것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그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양 볼을 타고 귓가로 올라갔다. 그러다 깨달았다.
응? 잠깐. 이게 아닌데. 우리 지금 이 이야기 하던 게 아니지 않나?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행동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단칼에,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볼 것도 없이, 거절이었다.
아마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지 않을까?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현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이 코앞에 들이밀어지자, 그는 당황했다.
하지만 선영은 자신의 돌발행동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를 피해 한껏 침대 끝으로 몸을 내뺀 그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들은 것 같아서 그런데…… 지금, 내 제안을 거절한 거야?”
“돌려 말했는데…… 직설적인 거 좋아하시나 봐요.”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 올리며 현재가 대답했다. 그녀의 질문은 확인 사살하는 꼴밖에 안됐다.
“……네. 거절이에요.”
확실한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봤던 어젯밤 무대의 별이, 밤새도록 그녀의 잠을 방해했던 별이, 애절한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도, 도대체, 왜? 혹시 다른 기획사랑 이미 계약한 거야? 아니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해서 그런 거야?”
선영도 알고 있다.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지.
“조건도 들어보지 않고 거절이야? 팀장이라는 직급으로 내가 장담하는데, 그 어떤 회사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 조건으로 맞춰준다고 약속할게. 정말이야.”
살면서 싫다는 남자한테도 이렇게 매달려 본적 없는데, 지금은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저는 그냥……”
다 놓아버린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기자가 될 생각 없어요.”
거짓말.
“……지금도. 앞으로도.”
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찰나의 순간, 그가 얼마나 슬픈 표정을 짓는지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스스로 알 리 없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 나 강선영, 무려 <먼데이>에서 나온 사람이야. 우리랑 일하는 배우들 모두 유명하고 잘나가. 내가 잘난 척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네 삶에 흔치 않은 기회가 온 거야.”
눈물없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네가 바라는 건 최대한 해줄게. 그러니까 찬찬히 다시 생각해봐.”
하지만 현재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죄송합니다.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겠네요. 두 번 생각해도, 제 대답은 항상 똑같을 거에요. 저는……”
우우웅-.
그때, 갑자기 침대 옆 탁자 위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향한 그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현재의 핸드폰 액정위로 정남의 번호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