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무협물
파촉지룡
작가 : 부지화
작품등록일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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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하늘에 날벼락
작성일 : 17-12-01     조회 : 453     추천 : 1     분량 : 5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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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예랑은 그 날도 여느때처럼 신시가 되자마자 무림맹 장원을 나섰다. 그 발걸음이 도달한 곳은 일전에 보아 둔 버려진 연무장으로 그녀가 익힌 내공을 알려지지 않게 수련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지난 다섯 달간 그곳에서 내공 수련을 해왔다.

 

 '사실 외부랑 차단이 되는 맹 내의 운공실이 더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 내공과 무위는 10년만에 쌓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어쩌면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일지도 몰랐다.

 

 제 기억 속 가장 깊은 층위에는 그녀의 내공 심법에 대한 구결이 각인되어 있었다. 가장 오래 된 기억은 3살 때쯤인지 그녀의 어머니가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듯 무공 구결을 읊어주며 술이 달린 장난감으로 놀아주던 것이었다.

 

 '그래도 전에는 괜찮았는데 말야.'

 

 그 전에는 평범하게 수련실에서 스승의 호법을 받으며 운기행공을 행했었다. 헌데 재작년 하지께부터 운공을 하고 있노라면 정체 모를 독연(毒煙)이 스며 나와 자신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었다. 보라색을 띤 그 기류는 지닌 독기가 강하지는 않았으나 눈에 띄어도 너무 띄었다.

 

 유형의 기운이 주변에 뜨는 것이야 내공의 수준이 높아져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이고 오묘한 보랏빛이야 진기의 특성이 그렇다고 둘러대면 어렵잖게 덮을 수 있을 문제다.

 

 문제는 함께 스며 나오는 독기였다.

 

 주변에 자란 풀이나 나무가 생기를 잃어 잎이 누렇게 떠버렸다. 또 독기가 흙이나 목재 바닥, 벽지 같은 것에 스미면 기묘한 단내가 나며 생기를 잃어버리고 바닥의 목재나 벽지는 표면이 푸슬푸슬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히도 몸에 걸치는 의복에는 독기가 거의 흡수되지 않아 티가 나게 천이 상하지는 않었다.

 

 "평범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내 예상보다 더 비범했구나."

 

 처음 그녀가 내뿜던 불길한 보랏빛 기운을 본 스승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흉측한 요괴나 재앙의 전조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 웃음. 놀라움과 공포와 또 다른 감정이 어지러이 뒤섞여 심란하면서도 차마 손수 거둔 제자에게는 티내지 못해 짓던 미묘한 표정.

 

 "얘야, 랑아(娘兒)야."

 

 그날 저녁, 스승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평소와 같이 그녀를 불렀다. 태어나 가장 처음 익힌 악곡을 연주해달라던 스승에게 알고 있는 곡 중,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가르친 곡을 연주해보였다.

 

 "랑아야, 이 곡은 사실 어느 무공의 구결이란다. 옛날에 젊은 시절의 친우가 그리 이야기했었지. 아마 네가 익힌 내공심법의 구결일 게야."

 

 1년 반 뒤, 학명산(鶴鳴山)을 떠날 때 배웅 나온 스승은 그녀의 운공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더랬다.

 

 그 덕에 지금 잘 정비된 운공실도 사용하지 못하고 이렇게 버려진 연무장에서 내공 수련을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상념을 애써 머릿속에서 쫓아내보았다.

 

 간신히 고요해진 마음을 안고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자 선명하게 깨어나는 기감이 느껴졌다. 잘 벼려진 감각을 통해 산속보다 희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기운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예랑은 그것에 집중하며 숨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들이쉬었다. 한 식경쯤 지나자 들이마신 기운이 몸 속에서 꾸물꾸물 약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이 기운을 갈무리하여 전신의 혈도로 주천시켜 단전에 쌓을 차례였다.

 

 가늘게 벌린 잇새로 스며 나오는 기운을 느끼며 진기를 주천시켰다.

 

 기실 하예랑 자신도 이것이 제 내공 심법이 본래 전하던대로의 방법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아홉 살께 죽은 어머니가 살아 있던 동안에 매일 유도해주고 가르쳐준대로 흉내낼 뿐이었다.

 

 기운을 갈무리하고 체내에 쌓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줄기줄기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감각에 미세한 기의 흔들림이 먼 곳에서 잡혔다. 뒷목이 공포로 뻣뻣이 굳었다. 양지옥을 깎아 놓은 듯 희고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갈무리했던 기운을 도로 풀어놔버렸다.

 

 이 광경을 누군가가 목격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또 이 누군지 모를 이가 저를 건드려 운공 도중에 주화입마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 역시 사양이었다.

 

 "쯧..."

 

 기의 흐름이 완전히 잦아든 것을 느끼고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경공을 전개해 자리를 떴다. 가볍게 박찬 땅바닥에는 난향(蘭香)만이 훅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좀 이르긴 하지만 오늘은 일찍 가볼까?"

 

 풍월루 후문 인근의 어느 작은 객점. 낡아빠지고 빛바랜 나무문이 열리자 소복(素服)차림의 여인 하나가 걸어나왔다.

 

 흰 비단에 광택이 도는 흰 수실로 포도 덩굴을 한가득 수놓은 치마는 풍만한 가슴을 감싸 누르고 거기에 자그마한 나비 문양이 언뜻언뜻 비치는 반투명한 흰 저고리를 겹쳐 입었다. 으레히 걸치는 반비(半臂)나 피백(被帛)조차 없는 가벼운 차림새의 여인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게다가 희고 맑은 얼굴빛에 절로 시선을 모으는 미모까지 더해져 여선(女仙)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흰 천에 비파를 감싸 안아든 여인, 하예랑은 풍월루 뒷문으로 들어갔다.

 

 "요화 낭자, 오늘은 좀 빨리 나오셨네요."

 

 작달낙한 키에 통통하게 살이 붙은 뺨이 귀여운 소녀가 미소를 띠며 하예랑을 맞이했다.

 

 "향아(香兒), 안녕.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향아라 불린 소녀는 비파를 받아들고서는 세 걸음 정도 앞장 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어떤 옷으로 하시겠어요?"

 

 풍월루 지하에는 외부에서 들락거리는 기녀(技女)들, 그러니까 하예랑 자신 같은 이들을 위한 치장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본디 루에서 구비해둔 의복이며 장신구, 화장품들이 있지만 그 외에도 정기적으로 오는 이들이 맡겨 놓은 각자의 치장물들도 보관한다. 요화란 기명으로 불리는 그녀 역시 제 화장품과 장신구는 이곳에 보관했다.

 

 "글쎄... 향아가 골라주련? 네가 안목이 높잖니."

 

 향아는 다섯 살에 풍월루에 팔려와 열 일곱이 된 지금까지 하녀로 일하며 자랐다. 얼굴이 귀여워 기녀로 키워볼까 했던 모양이나 여러모로 솜씨가 엉망이어서 하녀가 되었다 들었다. 비록 재주는 별로지만 거의 평생을 기루에서 자란 데다 눈썰미가 좋고 머리가 영리해 귀금속이나 보석을 보는 눈도 뛰어나고 여인의 치장에 대한 감각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음... 어떤 색을 입고 싶으세요?"

 

 "옅은 푸른색이 입고 싶은데."

 

 "그러면... 이건 어떠세요?"

 

 물을 함빡 머금은 회회청(回回靑)빛 비단 치마를 들고 와 보여주었다. 거의 흰색에 가까운 연하디 연한 푸른색 비단 치마에는 흰 실과 은사(銀絲)를 겹쳐 꼰 수실에 좁쌀만큼 작은 진주를 꿰어 구름을 가득 수놓아 무늬를 그려내었다.

 

 "어머나, 고와라."

 

 하늘하늘하게 나비 모양이 비치는 반투명한 흰 저고리를 받쳐 입고 물총새 빛의 피백을 걸쳤다. 화장을 하려 향분을 꺼내던 차에 그 예민한 귀에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내줘!"

 

 우당탕. 무엇인가 넘어지는 소리.

 

 "틀림 없다고!"

 

 "나, 올라가볼게!"

 

 손등을 전부 덮도록 긴데다 폭이 넓어 흐늘거리는 소맷자락도, 발걸음을 떼기만 해도 다리에 휘감기는 치렁치렁한 치맛자락도 그녀의 몸놀림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무희처럼 가볍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단 세 걸음만에 계단 끝까지 올랐다.

 

 "세상에..."

 

 1층을 들여다 본 하예랑은 나지막히 탄식했다. 탁자며 의자들이 죄 자빠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한 중년 부인이 머리채와 양쪽 팔을 쥐어잡힌 채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발버둥을 치던 그녀가 하예랑과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 난영(蘭英) 아가씨!"

 

 "난영이라니? 그런 사람이 우리 가게에 있던가?"

 

 의아스러워하는 이들 사이에 단 한 사람만은 죽을 듯이 놀라고 말았다. 하예랑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랗게 커지고 고운 눈동자가 어지러이 떨렸다.

 

 "그... 그 이름을... 그 이름을 어떻게..."

 

 하예랑, 아니 난영은 제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오는 제 목소리가 비명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난영, 이 세상에 그 이름을 알 이는 자신까지 꼽아도 단 셋 뿐. 그나마도 그 중 한 명인 어머니는 고인(故人), 다른 한 사람은 학명산 깊고 깊은 곳에 틀어박힌 제 스승. 그리고 나머지 한 명 역시 제 눈앞의 이 중년 부인과는 전혀 연결점이 없다. 누구도 알 리 없는 본명이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사람들을 제치며 비척비척 쓰러질 듯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이름을, 어떻게, 어떻게 아세요?"

 

 어느샌가 호위무사들은 중년 부인의 팔을 놓아줘,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난영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저를 아세요? 당신은, 당신은 누구신가요?"

 

 "저는 초락(草洛)님의 시녀 소소(瀟瀟)라고 하는 천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오랫동안 아가씨를 찾았어요."

 

 "초락? 난 그런 사람은 몰라요. 당신 정말로 누구죠?"

 

 소소는 당혹감으로 가득한 난영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 분은 아가씨의 어머님입니다. 본명은 모르셨군요. 애월(哀月)이라고 하면 아시겠지요?"

 

 난영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자신은 어머니의 본명은 알고 있지 않았다. 그거 모두들 부르는 기명(技名)인 애월이라는 이름만 알 뿐이었다.

 

 "네, 맞아요.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르겠어요."

 

 소소의 어깨를 부축해 일으켜세우고 지하로 데리고 내려갔다. 이미 향아가 탁자며 의자, 간단한 다과까지 준비해 두고 올라간 뒤였다.

 

 "어... 그러면, 소소... 님?"

 

 "편히 부르세요. 저는 아가씨의 어머님을 모시던 시녀. 아가씨 역시 제게는 모셔야 할 주인이십니다."

 

 "네. 그러면, 소소. 제, 제 어머니의 시녀라구요?"

 

 "네, 아가씨. 난영 아가씨는 혹시 당씨세가(唐氏世家)에 대해 아시나요?"

 

 "파촉(巴蜀)의 지배자, 그 파촉당가 말이에요?"

 

 "네. 그 파촉당가가 바로 아가씨의 가문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 그녀를 덮쳐 내리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입은 뻐끔거리되 단 한 마디의 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가씨의 어머니, 그러니까 당초락 님은 당가의 소가주셨어요. 본래의 가주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제대로 예(禮)를 치르지는 아니하였어도 단 하나뿐이고 정당한 적통(嫡統)의 가주셨습니다. 적어도 그분이 돌아가신 16년 전까지는요."

 

 "어머니, 가, 마화각원(魔花閣員)이기는 하셨지만, 무위는 대단치 않으셨는데 가주... 라뇨?"

 

 기억 속의 어머니는 아주 곱디 고운 여인이었다. 자그마하고 가녀리고 희디희어서 바람이 불면 스러질 이화(李花)같은 이였다. 일종의 무력단체기도 한 마화각에 간신히 소속될만큼의 무위.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노라면 현재의 자신보다도 연약했었다.

 

 눈 앞의 중년 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초락 님은 천재(天才)시나 뛰어난 무재(武才)를 지니지는 못하셨어요. 어떤 무공 구결이든 한 번만 들으면 단 한 자 틀리지 않고 줄줄 외고, 누군가의 가르침 없이도 그 묘리(妙理)를 스스로 깨쳤어요. 다만, 머리로는 이해한 것을 몸으로 다 따라가지 못하셨을 뿐이랍니다."

 

 "그런데, 여자잖아요? 게다가 지금 당가에는 독룡검제(毒龍劍帝)대협이 가주로 있는데요."

 

 으드득. 이를 가는 소소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당창우(唐廠又)따위를 대협이라니요. 그자는, 가주님을, 제 부모를 찢어 죽인 패륜아입니다. 그 손에 일족의 피를 가득 묻히고 종내 여동생마저 죽여버린 자예요. 그, 그따위를 대협, 이라뇨!"

 

 "네?"

 

 그녀의 말이 쏟아지자 하예랑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지 모를 아비와 인기 좋은 기녀 어미 사이에서 태어나 무림맹의 하급 무사인 천애고아였다고 생각했다.

 

 헌데 하루아침에 살아있는 외숙(外叔)과 그 외숙이 죽여버린 외조부모(外祖父母)와 수많은 친척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게다가 저더러는 일가의 가주, 그것도 파촉 땅에 군림하며 용독술(用毒術)과 암기술(闇器術)로는 천하제일이라는 그 당가의 정당한 가주란다.

 

 "하아..."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 헝클어진다. 발밑은 아득하게 무너져내린다.

 

 "아가씨, 복수하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아가씨는 나름대로 터를 닦아가며 잘 살고 계시죠? 저는 아가씨가 디딘 발밑을 무너트리고 싶지 않답니다."

 

 온화한 목소리가 복잡한 머릿속으로 빠져드는 정신을 붙들었다.

 

 "일단, 일단은 들어야겠어요. 복수를 하든 이대로 덮고 살든 결정은 그 다음이에요."

 

 "그래요, 아가씨. 그리 길지는 않은 이야기예요."

 

 소소는 따스한 찻물로 입술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작가의 말
 

 반비(半臂)는 수/당대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저고리 위에 즐겨입던 겉옷의 일종으로, 깃이 없고 소매가 없거나 아주 짧게 달려있었습니다. 통일신라 때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입고는 했던 모양입니다. 당나라 복식은 화려하고, 또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주 개방적인 복식입니다. 현대의 기준으로도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천(四川)이란 지명의 유래는 명대에 와서야 찾을 수 있는지라, 굳이 더 이전의 지명인 파촉으로 했습니다.

서희seohee 17-12-23 17:13
 
그러면 하예랑의 이름은 요화이기도 하고 난영이기도 하는 거네요~ 어머니는 암살당했고ㅠ
  ┖
부지화 17-12-23 21:59
 
이게 다른 연재처에서 복사해온 작가의 말이 잘렸네요. 네, 본명이 당난영이고, 요화란 기명을 사용해왔습니다. 그리고 1화에도 지나갔던 죽은 여인이 어머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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