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무협물
파촉지룡
작가 : 부지화
작품등록일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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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작성일 : 17-12-02     조회 : 463     추천 : 1     분량 : 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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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곡백과가 풍성히 영글고 그 기후마저 온화하여 풍요로운 땅 파촉(巴蜀), 그 땅의 제일가. 이것이 열네 살 소녀 당초락(唐草洛)의 가문이며 또한 그녀가 장차 물려받을 가문이었다.

 

 소녀 초락은 흑단나무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에 흑마노처럼 검게 빛나는 눈동자가 이지적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피부는 희고 입술은 작고 붉으며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를 감싼 눈매 역시 동그랗게 휘어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비록 무가의 작은 주인이라 할 만큼 뛰어난 무재(武才)는 아니어도 무술에 대한 재능은 좋은 편이었다. 머리가 몹시 뛰어나 어릴 적부터 무공 구결을 줄줄 외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치던 천재 소녀는 성도(成都) 어디를 가든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의 앞날도 언제나 그렇게 찬란히 빛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 그 날도 여느 때처럼 그런, 빛나는 날 중 하나라 생각했었다.

 

 유달리 안개가 짙게 낀 개평(開平) 4년의 어느 날, 당씨 장원에서도 직계의 주요 인물들이 기거하는 내원(內院)을 둘러싼 기관진식이 침입자를 감지해 발동했다. 내원 이곳 저곳에 기관진식이 울린 날카로운 소리가 땡땡땡땡 하고 울려퍼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둑한 정원을 내다보며 수를 놓아볼까 하던 소녀의 머릿속에 그 불길한 소리가 가득 울렸다.

 

 "소가주님, 침입자예요! 반역(反逆)이에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제 시녀 은소소(隱瀟瀟)의 다급한 목소리가 초락을 찾았다.

 

 "소소야, 나는 여기 있단다."

 

 "어서 가주님과 가서(家壻)께오서 계신 곳으로 가요."

 

 방문이 벌컥 열리고 소소가 긴장한 낯으로 제 주인의 손목을 붙들고서는 달려나갔다. 초락은 안개가 잔뜩 낀 해질녘이라 그런지 사위가 핏빛처럼 붉다고 생각했다. 제 앞날이 그처럼 불길할 것이라고는 채 생각이 닿지는 못했지만.

 

 "어서 오너라, 소가주."

 

 근엄한 중년 여인의 목소리. 초락의 어머니인 당가의 가주의 것이었다.

 

 "행동을 아주 빨리 했구나. 훌륭하다, 소소야."

 

 그녀의 왼편에 선 사내는 초락의 아버지였다. 그는 길쭉한 모양의 꾸러미를 안고 있었다. 가주는 그가 안은 꾸러미를 받아들어 초락에게 안기어 주었다.

 

 "소가주, 창우(廠又)가 주동자다. 그가 맹의 무사들을 이끌고 왔단다."

 

 "창우 오라버니가... 왜요?"

 

 당창우는 가주의 장남으로, 당가의 전통대로 다른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마자 방계로 내쳐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주의 소생인지라 직계의 이들이나 제 친 여동생인 초락과도 친밀한 관계였다. 특히 초락은 열두 살이나 많은 그를 오라비라며 퍽 따랐었다.

 

 "방금 자네가 받은 물건은 가주의 신물인 용린검(龍鱗劍), 과 화룡패(花龍牌), 옥룡환(玉龍環)이네. 어서 그를 가지고 피신하라. 지금 이 순간부터 파촉당가의 주인은 그대다."

 

 소녀의 여린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소소야, 네 주인을 이끌고 몸을 피하련."

 

 가주는 소소의 손에 주먹만한 주머니를 쥐어 주었다. 달각거리는 금속성의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필시 은자일 것이었다. 소소는 그 주머니를 제 요대(腰帶) 안쪽에 넣어 고정하고 작은 주인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크고 작은 두 소녀와 가주, 가서가 함께 달려 도착한 곳은 가주전의 후원이었다. 가주는 오른쪽 손바닥을 가볍게 베 피를 내 흙 위에 뿌렸다. 그리고는 피가 흐르는 손에 공력을 주입하여 땅 위에 얹었다.

 

 우웅.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피가 스민 흔적을 따라 자색을 띤 빛이 새어 나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흙을 가르고 자그마한 사당이 솟아났다.

 

 "가주님, 어서. 서둘러야 해요."

 

 은소소가 당초락의 손목을 붙들었다. 바뀐 호칭에 놀라 떠는 제 주인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재촉하는 발걸음을 옮겨 들어선 건물 안에는 사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다리 아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점령한 토굴이었다.

 

 "아아, 어쩌면 이렇게 캄캄하니 어둡다죠. 게다가 좀 좁은 것 같아요, 가주님."

 

 "가주... 그래, 이제 내가, 가주..."

 

 토굴은 점점 좁아져 급기야는 허리를 숙이고도 모자라 엎드려 기어가야 지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정순한 내공을 쌓아 곱고 희던 소녀의 손이 온통 흙으로 더러워졌다. 바닥을 더듬어가며 토굴을 기는 등 뒤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희미하게 흩뿌리던 빛이 사라졌다.

 

 땅 위에 남아 있던 이들이 기관을 이용해 지상으로 드러났던 건물과 사다리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켜 전부 파괴해버렸다. 이제 지하 통로와 당가장을 잇는 길은 사라져버렸다.

 

 두 소녀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생각한 순간, 작은 빛이 새어나왔다.

 

 "아, 맞다. 소소야, 이 요패(腰牌)는 야명주(夜明珠)를 엮은 거였어."

 

 "정말 다행이에요, 가주님."

 

 야명주의 연한 황록색(黃綠色) 불빛이 칠흑같은 어둠을 살풋 몰아내었다. 두 소녀의 공포심도 얼마간 걷히었다.

 

 얼마를 기었을까, 통로가 넓어지면서 공기가 바뀌었다. 흙 속에 고인 공기가 아니라 강가의 물기가 스민 신선한 바람이었다.

 

 "아아, 다 왔구나."

 

 "어서 올라가요, 가주님."

 

 토굴의 끝은 성도 외곽의 금강(錦江)에 닿아 있었다. 두 사람은 강물로 얼굴과 몸을 닦고서야 꾸러미 안에 생각이 미쳐 그것을 풀어보았다.

 

 양지옥에 모란을 본따 홍옥과 비취을 세공한 옥패, 자옥(紫玉)에 협죽도를 본따 투각해 자그마한 꽃송이마다 고운 빛의 황옥을 세공해 물린 지환, 연보라색 비단 양산이 나왔다. 가주의 신물 셋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곱게 개인 옷가지가 나왔다. 무명으로 만들어 허름한 모양새지만 말끔했다.

 

 "흙투성이긴 해도 촉금으로 된 옷보다야 눈에도 덜 띌테죠."

 

 두 소녀는 옷을 갈아입고 꾸러미를 다시 챙겨 거리로 향했다. 사람이 몰리는 길목에 방이 붙어 있었다.

 

 「여인이 득세하여 음양의 이치를 어지럽히던 당가를 무림맹이 바르게 하였다. 이에 검을 쥘 줄 아는 모든 당 가의 여인을 추살(追殺)하였노라.

 무림맹 사천지부 지부대인 이명화(李明化) 배상」

 

 이 방문이 진실이라면 당초락과 은소소가 의탁할 곳은 중원 무림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아니, 한 군데가 있다."

 

 소소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제 주인을 바라다보았다.

 

 "마교(魔敎)로 가자."

 

 무위가 높았다면 육로로 향하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나, 불행히도 이 두 소녀의 무위는 형편 없는 축에 들었다. 심지어 은소소는 무인으로서 교육받은 적조차 없었다.

 

 잔도와 계곡을 따라 인적 없는 길로 십만대산까지 가기에 이들은 너무 어리고 약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이들은 장삿배에 숨어들었다. 금강(錦江)에서 민강(岷江)으로, 다시 거기서 장강(長江)을 타고 나와 장안(長安)에 닿았다. 몰래 배에 오른 것이 들켜 강 복판에 던져질 뻔하기도 했고 노예로 팔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도착한 장안에서는 남복을 한 채 비단길을 향하는 상단 말단 관리인에 은자를 쥐여 주고 숨어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열사(熱死)의 땅 복판에서 몰래 빠져나와 한낮의 작열(灼熱)하는 태양과 어둔 밤의 추위와 맞서며 남으로 향했다.

 

 결국 두 소녀는 십만대산이 있다는 천산에 도착했다. 마교, 아니 천마성교(天魔星敎)에서는 이미 당가의 일을 알고 있었고 기꺼이 갈 곳 없는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당가의 새 가주인 당초락은 마교도가 되었다.

 

 잘 먹고 잘 쉬자 본래의 고운 미모가 회복되었다. 타고난 미모와 명석함, 명가 자제다운 교양과 예법, 그러나 낮은 무위는 결국 그녀를 마화각(魔花閣)으로 밀어넣었다.

 

 마화각은 마교에서 외부에 지은 기루와 그 기루에 속하는 기녀를 총괄하여 그 거대한 무력 단체의 돈줄이 되어주는 곳이었다.

 

 마화각에서 기녀 수련을 거치던 당초락은 단연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수련 기간이 끝나는 16세 봄, 낙양의 옥화원(玉花院)으로 발령되었다. 함께 마교로 향했으나 이미 무공을 익힐 나이도 지났고 익힌 무공도 없던 은소소는 마화각 소속 하녀가 되었다가 낙양으로 향하는 당초락의 시녀를 자청하여 따라갔다.

 

 애월(哀月). 당초락이 그 찬란한 제 가문을 버리고 마교의, 그것도 그 산하 기녀가 되어가며 얻은 새 이름이요 새 신분이었다.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아름다운 옥화원 애월이의 비파를 연주하는 손가락 끝이라고 보겠다며 수많은 사내가 보화를 내어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옥화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이 중에는 제갈세가의 이공자 제갈명(諸葛明)도 있었다.

 

 약관을 갓 지난 이 귀공자는 이름만큼 영명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게다가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로 잘 생겼다며 명안공자(明顔公子)라 불리며 중원에 수많은 아가씨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애월이 된 당초락도 손님으로 왔던 그 명안공자에게 첫눈에 반해 마음을 졸이곤 했더랬다.

 

 열 일곱 소녀와 스물 하나 청년은 그렇게 불꽃같은 사랑을 했고 소녀의 안에는 둘의 사랑의 열매가 맺혔다.

 

 하지만 제갈명은 이듬해 강호 유람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오란 명을 받았다. 당초락 역시 몸을 풀기 위해 마화각의 규칙에 따라 대산으로 돌아가야 하게 되었다.

 

 "명랑(明郞),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애월아, 내가 어찌 너를 잊겠느냐."

 

 톡. 제 머리칼에 꽂힌 비녀를 뽑아 한 벌로 고정되어있던 보요를 떼어냈다.

 

 "이것, 잃어버리지 마시어요."

 

 보요를 떼어낸 그것은 점취로 잘게 매화를 상감했을 뿐 형태 자체는 별다른 장식 없는 단순한 막대기 같은 모양의 양지옥 비녀였다.

 

 제갈명은 상투비녀 대신 그 비녀를 상투에 꽂았다.

 

 "그래, 그러마. 내 언젠가 반드시 너를 데리러 오겠다."

 

 하지만 이 어린 연인의 언젠가 재회하자던 눈물 젖은 이별의 말은 지켜지지 못했다.

 

 열 여덟이 되던 해의 가을, 눈처럼 희고 눈동자가 제 아비를 쏙 빼닮아 호박처럼 빛나는 여아가 태어났다. 당초락은 갓난 딸을 난영(蘭英)이라 이름짓고 그 딸을 위해 당가에 전해내려오는 비법대로 고(蠱)를 준비했다.

 

 그 날 저녁, 모옥에 한 사내가 찾아들었다.

 

 마교의 뇌옥에서 탈옥했다는 사내는 배은망덕하게도 상처를 치료해준 당초락을 범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설마 당씨세가의 진짜 가주라고는 생각지 못하여 방심했다가, 마비독에 당했다.

 

 당초락은 전신이 마비된 사내를 고 항아리 속에 던져버렸다.

 

 그로부터 백 일 뒤, 당초락은 제 딸에게 고독비술(蠱毒秘術)을 행했다. 온갖 독충, 독수의 독에 사람의 시독까지 합해진 고독(蠱毒)의 지독한 독기를 유도해 어린 딸의 기경팔맥을 그 단전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매일 자는 아이의 내력을 유도해 그 독기를 진기로 흡수하게 도왔다.

 

 무사히 독기를 제 진기로 흡수해 낸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당초락은 제 딸이 저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무재(武才)임을 알아차려 기뻤었다.

 

 뛰어난 아이에게 그 머릿속에 빼곡히 든 것을 하나도 빠짐 없이 일러주었다. 당가의 직계에만 물려주던 온갖 비기를 그 작은 머릿속에 한 자라도 더 집어넣으려 애썼다.

 

 당난영은 어머니의 젖을 물면서부터 자장가 대신 옥란주사신공(玉蘭蛛絲神功)의 구결을 들었다. 입이 트이면서부터는 유엽도화검법(柳葉桃花劍法)의 구결로 말을 연습했다. 걸음마를 떼고부터는 호접지보(蝴蝶之步)로 걸으며 손아귀에 힘이 생기고부터 목검을 쥐고 검법을 연습했다.

 

 당초락은 제 딸이 강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커가는 딸을 보며 복수가, 아이의,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할 저의 남은 인생을 전부 털어넣을만치 가치 있는 것일까 번민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일러주지 않았다.

 

 두 모녀와, 이 모녀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은소소, 이 셋은 낙양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그리고 건세(建世) 11년, 당난영이 꼭 아홉 살이 되던 해 겨울의 일이었다.

 

 무림맹 그믐 연회가 파한 시각, 당초락은 캄캄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고향을 등지고 열두해만에 익숙한 기감이 느껴졌다. 당가 혈족의 내기. 그것도 제법 강한 이의 그것이었다.

 

 "소소야, 도망치렴."

 

 언제부터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함께 한 친우나 다름없는 시녀 은소소. 그녀의 기척이 사라졌다.

 

 나이도 비슷하고 실제로는 사촌 오라비이기도 한 당강리(唐鋼悧)가 나타났다.

 

 아아, 이제 끝이로구나. 더는 도망갈 곳이 없구나.

 

 상념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떠돌아 눈가로 흘러넘쳤다.

 

 그렇게 당초락은 스물 여섯 살이 되던 해의 겨울, 혈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작가의 말
 

 가서(家壻)는 여왕의 남편을 이르는 국서(國壻)에서 따온 말로, 모계전승으로 설정한 본작 속 당씨세가 가주의 남편을 이르는 말로 설정했습니다.

 협죽도는 소설 원작인 모 중국드라마에도 등장한 맹독성 식물로, 유엽도 내지는 유도화라고도 부르는 꽃나무입니다.

 개평은 정사 속 후량 태조 주전충의 건국연호이며, 건세는 소설 속 설정에서의 후당 재건 때의 가상의 연호입니다.

서희seohee 17-12-23 17:33
 
ㅠㅠ 너무 슬픈 이야기네요~ 그래도 난영의 아버지는 살아있겠군요^^*
  ┖
부지화 17-12-23 22:00
 
네, 친부는 아마 어디에선가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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