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데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나시길래 웃다 의자에서 떨어지기까지 하시어요?"
생글생글 웃는 눈매가 퍽 귀여워 한참 앳되어보이는 얼굴. 제법 화려하게 한 치장이 어울린다 싶으면서도 어리게 보이는 얼굴에 말가니 띄운 미소는 보는 이의 정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하, 추태를 보였구나. 단지 팽 도령 이 무공 바보가 이리 수줍어하는 꼴이 우스워 그만 그리하였다."
"아니, 남궁 형!"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다. 무슨 소리를 그리 질러?"
"내가 뭘 수줍어 했다고 그럽니까?"
"후훗, 그래요. 수줍어하지 않으셨다 치지요."
"어흠흠. 어쨌든 그저 사이 나쁜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역산도 팽준호의 가문인 하북팽가는 도(刀)의 명가였다.
오랜 옛날부터 북쪽과 동쪽의 오랑캐와 투쟁해 온 하북 지역은 많은 이가 저마다 무공을 발전시켜 가족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힘써, 뛰어난 무가가 많은 곳이었다. 하북팽가는 그 온갖 무가 중 으뜸으로 꼽히는 가문으로, 손바닥만한 단도부터 사람 키보다도 큰 월도까지 도병(刀兵)에 대해서라면 천하제일을 자부하는 명문 무가였다. 그리고 단순하지만 패도적이며, 속임수 없이 솔직한, 그것이 바로 팽가의 무공이었다. 하여 팽씨세가 사람 중에는 당씨세가를 탐탁찮아하는 이들이 제법 되었다. 팽준호는 그런 이 중 한 명이었고.
"사이 나쁜 이웃이요?"
"뭐어, 같은 동네는 아니지만 맹 내에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웃이라고 치지 뭐. 어쨌든 사대세가니까."
"이봐 이봐. 이놈아, 팽 도령아, 맹의 깃발 아래 의와 협을 실천하고자 모인 무림동도다."
"난 당가놈들이 별로인걸 어쩌겠수. 사내라면 모름지기 한 자루 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봐야 마땅하지, 그놈들처럼 독이니 암기니는 좀..."
팽준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당난영은 그가 한 모금에 털어버린 잔에 이어질 말을 재촉하듯 술을 채워넣았다.
"게다가 그 뱀같은 당가 놈들이 요즘은 할 일도 제대로 안 한다 그거야."
"어허, 준호야, 뱀이라니. 누차 말하지만 무림동도에게..."
"그런데, 할 일이라뇨?"
뒤이어 나올 말은 뻔히 알고있는 사실이나, 당씨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무림맹을 떠받치는 건, 오파 일방과 사대세가거든. 우리 팽씨세가나, 남궁세가, 그놈의 당가놈들은 그 중 사대세가에 올라 있고.
이 수위 문파는 맹 내에서 위상이 대단하거든. 일원이라는 것만으로도 배분이나 나이에 비해서 어른 대접을 받게 마련이고, 유랑할 때 관(官)에서도 여러모로 편의를 봐준단 말씀이야."
"와아, 대단해요."
그녀 자신도 무림맹의 일원이므로 잘 아는 사실이지만, 짐짓 모른체 동그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 순진한 거한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뭐, 어쨌든 맹이라는 커다란 집채를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하느라 실력이 찬 후진이며 한창 때의 고수를 많이들 파견하거든. 나나 남궁 형도 그래서 고향집을 떠나 예까지 와 있는 것이고."
"어마, 참으로 쓸쓸하시겠어요."
"나야 뭐, 하북 쪽에서 온 사람들은 많으니까. 게다가 남궁 형이랑은 원래도 가까웠고. 헌데 그나마 당가에 유일하게 맘에 드는 사람인 독룡검제 대협이 어쨌든 의무인 그걸 저버리고 있다는 말씀이지."
다 아는 얘기를 모른 체 듣느라 얼굴에 쥐가 날 지경이던 당난영은 드디어 원하는 쪽으로 화제가 흐르자 반색했다.
"아, 독룡검제 대협이라면 검남도 쪽에서는 무림인이 아니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역시 검제라니까! 그 칙칙한 뱀 소굴에 어찌 그렇게 멋진 무인이 났나 몰라."
독룡검제에 대해 좋은 이야기가 나오자 팽준호가 신이 나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남궁익은 그의 말꼬리를 뚝 자르며 첨언했다.
"뭐, 글쎄다, 팽 도령아. 그 본인도 온갖 소문이 돌고 있잖느냐?"
"대인, 소문이요?"
"아아, 아까 말했듯 당씨세가가 사대세가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있잖느냐. 그게 실은 반정 과정에서 손수 죽인 가주가 친어머니라 가문 내 입지가 위태로워서 그렇다는 소문이 있단다."
"에이, 그 광명정대한 분이 그럴 리 없다니까요, 남궁 형."
"뭐 나도 뜬소문이라 여기고는 있다만, 그건 누구도 장담 못 하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오르겠어?"
"아니, 글쎄..."
팽준호의 선 굵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본래도 동경하는 독룡검제에 대한 험담을 잘 받아넘기지 못하는 편인데다 술기운이 더해져 그러했다.
"뭐, 어쩌면 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금방이라도 화를 벌컥 내며 칼을 뽑아들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피워올리는 팽준호를 보며, 남궁익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서 첨언했다.
"능력이 없다니요? 대인, 당씨세가는 검남도 일대는 물론이요 파촉 지역 전역에서도 으뜸 가는 집안인걸요?"
"파촉은 닫힌 땅이지. 중원은 그보다 수 배는 넓은 세상이란다. 더군다나 독룡검제 대협은 방계 출신, 가문의 빈 자리를 채운 것도 죄 방계 출신이라고 들었다. 직계는 전부 죽었다고 들었으니, 비전의 절학은 전부 실전된 셈이지. 무가의 무공은 곧 가세와 연결되는 것이니."
"아, 그런 거군요."
당난영은 애써 모른 척, 말가니 순진하게 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야 했다.
독룡검제가 반역을 일으켜 일족을 죄 죽여버린 건 확실해졌다. 게다가 다른 가문, 그것도 이웃한 지역에 있는 것도 아닌 남궁세가나 팽씨세가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라면, 사실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이제 남은 것은, 어머니 기생, 애월과 당창우의 반역 당시의 소가주였던 당초락이 동일인인가 확인하는 정도겠구나.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로 헝클어진 머릿속이 제법 정돈되었다 느꼈다.
"그런데, 남궁 형, 어쩌면 명분 부족도 맞을지 몰라요. 신물 얘기 들었어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들렸다.
신물.
스스로를 은소소라 소개했던 중년 부인은, 당씨세가 가주의 신물 셋 중 둘이 당난영의 손에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 현재 가주로 있는 독룡검제에게는 잘 해봐야 신물이 하나 뿐이리라.
"그래그래, 검과 열쇠와 인장이라지. 조부님께서 그 반정 이후로 당가에서 발행하는 비전(飛錢)이며 공문서에 찍힌 가주의 인장이 바뀌었다 하셨다."
무언가 이상했다. 검이라면 아마 양산을 검집으로 삼는 용린검일 터이었다. 허나 나머지 둘은? 옥으로 만든 지환과 보석을 박아 장식한 옥패가 아니었나.난데없이 튀어나온 열쇠와 인장의 존재가 쇠뭉치가 되어 머리를 후려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쪽이 옥룡환일까. 공문에 찍혀 나오는 인장이 바뀌었다니 옥룡환 쪽이 인장일까.
"아, 검이라면 들은 적 있어요. 당가 주제에 비늘이 번들번들하게 선 보검이라나 뭐라나. 우리 숙부 중 한 사람이 실물을 봤었다던데."
당난영은 정말로 한 방 맞은것처럼 뎅뎅 울리는 머릿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직 뽑지 못하여서 실제로 본 적은 없으나, 검의 생김은 그녀가 전해들은 바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멀리서 보면 칼날의 옆면에 비늘이 선 듯 보이게 세공되어있다고 하였으니.
"헌데 그놈의 인장이니 열쇠는 실물을 본 자가 없으니 말이다."
"하여간 뱃속은 시커매서 무슨 비밀 결사마냥 꽁꽁 숨어대는 작자들."
당씨세가는 파촉 땅, 높고 험한 산이 첩첩이 가로막은 그 땅 한가운데에 숨은 가문이다. 그나마 지리적으로 가까운 제갈세가 정도나 교류가 있을까, 그 와의 문파들은 당씨세가와 거의 접점이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문파나 세가와 달리 그간 맹으로 파견보낸 이들은 전부 방계, 알려진 것이 적을 수밖에.
"그런데 파촉 땅에서 그 천하의 당가네 가보를 아무리 난리가 났다지만 훔쳐 달아날 간 큰 작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말이다. 헌데 인장이 바뀐 것을 보면 그 난리통에 신물이 사라졌다는 말밖에 안 되잖냐."
"살아남아 도망친 사람이 들고 갔을지도 몰라요."
그녀가 저도 모르게 툭, 뱉어버렸다.
스스로도 놀랐지만 이미 주워섬길 수 없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뭐?"
두 사내는 화들짝 놀라 이편을 바라보았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대세가의 일원도 모르는 무림비사를 한낱 기녀가 어찌 아는지 변명을 짜내기 위해, 그렇게 말을 늘어뜨렸다.
"제가, 저는, 검남도 출신이잖아요. 원래는 게서 기녀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건 그런데... 네가 알기엔 너무 옛날의 일이 아니더냐."
남궁익이 타당한 지적을 했다. 이들은 요화의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
그녀는 이마가 넓은 편인데다 눈이 동그라니 큼직하고 턱은 조금 짧았다. 그러다보니 올해 스물 다섯이라고는 하지만, 많이 어리게 보는 이들은 그녀를 갓 머리 올린 소녀로 생각하고는 했다.
"어머나, 저는 기녀잖아요. 저는 어리지만 제가 뵈었던 분들은 어리지 않은걸요?"
"아."
남궁익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당난영은 재차 고운 미소를 피웠다. 이번에는 요요하다기보다는 소녀처럼 보이게, 그렇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움 츠리며 두 사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익주 자사 대인의 측근이라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독룡검제 대협이 직접 서찰을 보내 수색을 요청했대요. 십 사오세 정도의 소녀를 찾는 것을 도와달라고요."
비밀을 나눈다는 듯 한껏 몸을 붙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이가 제법 찼다고는 하나, 살아온 나날의 거의 대부분은 무관에 틀어박혀 살아왔던지라 아직도 소년같은 면면이 있었다.
그녀는 잔뜩 호기심이 동해 장난을 꾸미는 어린아이같은 표정을 한 두 사내를 보며 속으로 미소지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어차피 이들은 간파해 낼 능력이 없으리라 여겼다. 해서 거짓을 조금 더 보태기로 하였다.
"해서 부랴부랴 나간 관원들이 사람은 찾지 못하고, 흙투성이가 된 촉금(蜀錦) 옷만 찾아왔었대요. 세상에, 촉금으로 지은 옷을 그렇게 버려두다니..."
짐짓 아깝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팽준호는 의아하다는 투로 말을 보탰다.
"어어, 촉금이 귀하고 비싼 천이긴 하지만, 산지잖아?"
"어이구, 이 맹꽁이 도령아. 촉금은 황실 진상품이라 민간에 풀리는 게 거의 없단 말이다. 산지고 자시고 촉금 옷이란 게 아무나 덜렁덜렁 입고 다니는 물건인 줄 알아?"
"허, 설마, 그럼 그거 혹시..."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들었지만요."
"정황상 직계의 아가씨 하나가 도망치면서 벗어놓고 간 옷이라는 거로군."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다.
말을 퍼트리는 것도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이제 이 진실을 품은 거짓이 널리 퍼지기 위해 덮는 시늉을 해야 했다.
"어마, 발설하지 말라셨는데, 어쩜 좋아. 팽 대인, 남궁 대인, 이 이야기 어디 가서 하시면 아니되어요. 소녀가 큰 일 나요."
순식간에 눈가가 발그레하게 물들면서 물방울을 어룽어룽 매달았다. 두려움이 고운 얼굴에 먹물처럼 번져나가자 두 사내는 고개를 맹렬히 끄덕거렸다.
"그래그래, 다른데서 얘기하지 않으마."
"사내는 모름지기 입이 무거운 법이야. 걱정마!"
팽준호는 당부로도 모자라 짐짓 두려운 듯 떨리던 가녀린 어깨를 토닥이기까지 했다. 한껏 겁먹은 척하던 얼굴에 다시 생긋 미소가 올랐다.
그녀는 그 뒤로도 가까워진 손님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종종 흘리고는 하였다.
어딘가에 당씨세가주의 신물을 물려받은, 정통성을 지닌 가주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은 석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